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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 전 주의 모으는 게 사띠”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1.28 13:19
  • 댓글 0

마인드풀니스 & 사띠 논쟁-9
경북대 철학과 임승택 교수 기고

인경 스님 주장은 사띠 인지적 측면일 뿐
‘챙김’ 지적엔 공감…‘마음지킴’이 바람직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및 ‘사띠’의 번역과 이해를 둘러싸고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인 인경 스님과 김재성 서울대학원대 교수가 열띤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어 자비선 명상센터 지도법사 지운 스님이 이번 논쟁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가운데 이번에는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가 사띠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임승택 교수는 초기불교 수행론에 대한 논문으로 2001년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미얀마 참매센터와 쉐우민센터 등에서 실제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도 했다. 편집자


지난해 법보신문을 통해 뜨겁게 일었던 ‘니까야 논쟁’의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조용히 지나가도 좋을 연말연시에 다시 ‘사띠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인경 스님과 김재성 교수 사이에 벌써 서너 차례씩의 공방이 오갔고, 거기에 지운 스님께서 개입하셔서 도합 여덟 라운드를 치른 셈이다. 필자는 사띠 개념만을 가지고 이미 세 차례에 걸쳐 학술논문(2001년, 2003년, 2009년)을 발표했다. 따라서 이번의 논의가 시작될 때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급기야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심했다. 필자는 앞서 세 분의 논의에서 등한시 되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사띠(念, sati)’의 의미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평소 명상의 실천에 모범을 보이는 인경 스님과 김재성 교수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논의에서만큼은 두 분과 견해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필자가 느끼기에 두 분의 주장은 서로의 논점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못한 채 엇나가 있다. 인경 스님은 현대 심리학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반면에, 김재성 교수는 초기경전 및 주석서에 나타나는 ‘사띠(念, sati)’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번의 논의가 이렇게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인경 스님에 따르면 ‘마인드풀니스’ 혹은 ‘사띠’의 번역어인 ‘마음챙김’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챙김’이라는 용어는 번뇌에 해당되는 것으로 불교 수행의 핵심 개념을 담아내기에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번역의 엄밀성을 꾀하자는 맥락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사실 필자 또한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였고, 그 대안으로서 ‘마음지킴’을 제안한 적이 있다(임승택, 「마음지킴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2003). 기존의 논문에서 필자는 ‘수의(守意)’라든가 ‘의지(意止)’와 같은 ‘사띠’의 한역어에 주목하였고, 또한 “[사띠란] 눈 따위의 [감각의] 문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Vism. 464쪽; SN. IV. 194쪽 비교).”라는 해설들을 전거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의 문제점을 환기시킨 인경 스님께 일단 공감한다. 그런데 필자는 인경 스님의 문제제기가 과연 무엇을 의도하는지에 관해 의구심을 갖는다. 인경 스님의 애초 논지는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이 서구 심리학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마인드풀니스’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인경 스님은 초기경전에서 사용된 ‘사띠’보다는 심리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마인드풀니스’에 초점을 맞추고서 논의를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이 논의의 진행과 더불어 차츰 애매해지면서, 나중에는 초기경전의 ‘사띠’도 그렇다는 쪽으로 선회한 듯하다.

인경 스님은 초기경전의 ‘사띠’와 심리학자들의 ‘마인드풀니스’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후자에 입각하여 전자의 내용을 짜깁기하려는 의도마저 노출하고 있다. 필자는 서구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의 용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며, 그것이 초기경전의 ‘사띠’와 다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수긍한다. 그들의 방식대로 그것을 사용하겠다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미 독자적인 의미와 쓰임을 구축한 ‘마인드풀니스’에 대해서는 초기경전의 ‘사띠’와 구분을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점에서 필자는 인경 스님의 논지에 반대한다.

주지하다시피 사띠의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이다. 즉 특정한 사태를 놓치지 않고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인경 스님이 강조하듯이,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사띠’에는 ‘알아차림’이라든가 ‘통찰’ 혹은 ‘위빠사나’ 따위의 인지적 측면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사띠’의 원래 의미를 엄밀히 따지자면 그러한 인지적 측면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인경 스님이 주장하는 ‘알아차림’이란 ‘사띠’의 실천을 통해 결과로서 얻는 것이다. 예컨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기 이전에, 호흡이라는 특정한 사태를 놓치지 않고서 그것에 주의를 모으는 것이 ‘사띠’이다.

사념처의 명상을 한다고 치자. 우리에게는 호흡 말고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들이 많다. 엉덩이의 결림도 알아차려야 하고, 내면의 욕심이나 갈등 따위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알아차리는 것이 정답일까. 일단 강하게 포착되는 하나의 대상을 선택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로 그때 무릎이나 엉덩이의 결림과 같은 ‘느낌에 속한 사태(受念處)’, 혹은 내면의 욕심과 같은 ‘마음의 사태(心念處)’ 따위를 배제하고 굳이 호흡이라는 ‘몸의 사태(身念處)’를 선택하여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사띠’이다. 만약 이러한 ‘사띠’가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알아차려야 할 여러 대상들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인경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크리스토퍼 거머 등에 따르면 ‘마인드풀니스’라는 용어는 ‘사띠’에서 유래된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는 ‘통찰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에 더욱 가까운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서구 심리학자들은 ‘마인드풀니스’가 초기경전의 ‘사띠’에서 이미 멀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들은 치료적 관점에서 불교 명상의 인지적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통찰명상’ 혹은 ‘위빠사나’에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잊지 않음’이라든가 ‘집중’ 따위의 비(非)인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원래의 ‘사띠’에 대해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띠’ 개념에 대해 ‘알아차림’이라는 인지적 측면을 고집스럽게 강조하는 인경 스님의 태도는 매우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사띠’의 인지적 측면에 초점을 모으는 인경 스님의 입장은 서구 심리치료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그와 같은 입장에 대해 불교 명상의 치료적 효과를 분명히 드러내자는 취지로 이해한다. 또한 그러한 입장에 설 때 일체의 인위적 조작을 쉬도록 유도하는 불교 명상의 본질적 측면이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원래의 ‘사띠’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쓰임으로, 혹은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이해에 의해, 경전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던 거머 등의 심리치료자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와 원래의 ‘사띠’를 구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인경 스님의 주장과 달리, ‘사띠’라는 용어에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결심이라든가 의지 따위의 정의(情意)적 측면들이 포함된다.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전거를 확보하고 있다. 우선 『청정도론』에는 “이것은 들뜨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  대상에 대해 확고히 서는 것이므로 기둥과 같은 것이고, 눈 따위의 [감각의] 문을 지키므로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Vism. 464쪽).”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사띠’란 특정한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것에 집중하여 마음의 방황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해설을 뒷받침하는 용례들로서 초기경전에는 문지기(dovāriko)라든가, 감관의 억제(indriyasaṁvara), 감관의 통제(indriyasaṃyutta), 감관의 문을 지킨(indriyesu guttadvāro), 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indriyesu guttadvāratā) 따위의 수식어들이 ‘사띠’의 쓰임과 관련하여 도처에 등장한다(SN, IV. 194쪽; AN, IV. 111쪽 등).
한편 ‘사띠’의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우 빤디따 사야도(U Pandita Sayadaw)는 다음의 언급을 하였다. “굳이 한 가지를 고른다면 ‘마음지킴’이 좀 더 [원래의 사띠에] 가깝다. ‘사띠’는 우리 마음이 대상과 일대일로 밀착돼 있는 상태로서, 이 상태는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즉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 마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사띠에] 가깝다(「현대불교」 제393호)” 필자는 이러한 언급 또한 ‘사띠’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데에 참고할 만하다고 본다. 앞서의 『청정도론』과 『니까야』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띠’를 행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다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AN. V. 99-100쪽). 즉 호흡이나 느낌 따위에 대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사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의 다른 구절에서는 불건전한 생각 따위가 비정상적으로 계속되면 ‘사띠’를 그만 두라고도 이른다(MN. I. 120쪽; AN. III. 185-186쪽). 즉 “마치 눈에 들어온 대상이 보고 싶지 않을 때 눈을 감거나 다른 대상을 보는 것처럼 하라.”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사띠’의 실천에는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경우’도 포함된다. 이러한 전거들은 “사띠는 판단이나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법보신문」 제1030호).”라고 강변하는 인경 스님의 주장에 명백히 반한다.

‘사띠’의 용례를 대변할 만한 경구 하나를 언급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고자 한다. “세존이시여, 여인들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만약 보게 되었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이야기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이야기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DN. II. 141쪽).” 여기에서 마지막 문장을 인경 스님의 방식대로 번역해 보자. “알아차림을 확립해야 한다.”가 된다. 그러나 필자는 ‘알아차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고매하신 인경 스님이라면 한 순간의 ‘알아차림’만으로 일체의 불순한 생각들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둔근기 중생에게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 ‘알아차림’에 더하여 ‘들뜨지 않음(apilāpana)’과 ‘잊지 않음(asammoha)’과 ‘지킴(ārakkha)’ 따위가 요구된다. ‘마음지킴’이라는 번역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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