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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부산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실천 함께 해야 해탈 길 열린다

이번 하안거 기간 동안 미타선원에서는 금강경 산림 수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일 사시예불 때 마다 금강경을 독경하고 지금처럼 강설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이번 산림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금강경을 읽고 있는데, 참 좋습니다.

늘 함께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어려운 것이 인간사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심(本心)은 그것이 아닌데, 본심과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 때문에 다투면서도 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을까 후회하기도 하고 간혹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본심과 다른 말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웠을까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본심에서는 아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부처님이 49년이나 목 아프게 얘기하고 발 아프게 돌아다니셨을까요. 보살님들도 스스로는 이미 평안하지만 왜 눈물을 흘리고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불보살님들에게 는 나라고 하는 것이 이미 없지만, 중생을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고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머리 아닌 몸-마음으로 무상 느껴야

금강경의 가장 큰 가르침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상(相)들이 다 무상(無相)한 것임을 아는 것 입니다. 금강경은 ‘괴로워하는 것은 다 무상한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허상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금강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즉 종지는 바로 무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머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고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금강경의 본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여기서 ‘금강(金剛)’은 금강석을 이야기합니다. 너무 단단해서 결코 부서지는 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금강석은 비유하면 산에 있는 금입니다. 이 금이 바로 불성입니다. 그 불성은 그냥 얻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불로 태워서 잡된 것은 사라지게 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이 순금입니다. 중생의 마음속에 금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이 산에 묻혀 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가려져 있던 금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것을 가리고 있는 여러 가지 상(相), 옳다. 그르다. 하는 온갖 상들을 지혜의 불을 통해 녹여버리면 저절로 원래 있는 금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찾는 불성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덮고 가린 먼지를 지혜의 불로 태우면 그런 것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남는 것은 불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워 버려야 할 것은 바로 상(相)입니다. 그 상은 지혜의 불로 태워서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공부가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을 알긴 아는데 알기만 하면 될까요? 금강경은 아는 것만이 아니라 ‘행(行)’을 강조합니다. 마음에 불성이 있다는 의미를 금강이라고 썼고 그 다음에 반야경이라고만 하면 되는데 왜 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고 있을까요. 반야(般若)는 지혜입니다. 또 바라밀(波羅蜜)은 행입니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의 행이지요. 금강경은 지혜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지혜와 실천이 양 수레바퀴처럼 함께 해야만 해탈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 자체에 금강을 넣고 반야바라밀을 붙였습니다.

“공(空)을 잘 알아도 행하지를 않으면 이름은 있지만 본체는 없는 것이다. 또 그 뜻을 알 때 행을 잘 닦으면 반야바라밀이 잘 구비된 것이다.”
육조 스님의 설명입니다.
공을 잘 안다는 것은 무상을 잘 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지만 무상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가는 길만 알고 실제로 가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이 잘 구비되기 위해서는 금강경의 종지인 무상을 잘 이해하되 그것을 바라밀행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금강경이 구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교가 지혜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지혜는 그 방법을 모르면 가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행을 통해서입니다. 행을 닦기 때문에 수행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닦지 않으면 범부요, 닦으면 성인의 지혜와 계합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제 반야의 뜻을 살펴볼까요. 이것은 범어이지만 중국(당나라)에서 지혜(智慧)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혜의 지(智)는 우리 마음에서 탐, 진, 치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혜(慧)라는 것은 방편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야의 의미는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좋은 방편을 쓰는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육조 스님이 금강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석을 달았지만 그 주석도 필요할 때 잠깐 쓰이는 것입니다. 지혜도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고 방편을 갖는 데 필요한 것이지 지혜가 절대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꼭 그것을 갖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을 때 잠깐 필요한 것이지 그것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상한 것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금강경 원문에도 법을 설하지만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그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프니까 약이 필요한 것이지 아프기 전과 다 나은 이후에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무명(無明)에서 완전히 밝아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원칙을 계속 확인합니다.

바라밀은 왜 바라밀이라고 할까요. 바라밀에 대한 설명을 봅시다. 바라밀은 그 당시 말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생멸(生滅)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언덕에 우리가 살잖아요. 그리고 저 언덕이 있고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고 합시다. 생멸,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하는 생멸 속에 사는 것이 이 언덕입니다. 그런데 저 언덕은 생멸이 없는 세계입니다.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생과 멸 사이에서 우리는 괴로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생과 멸 사이에 애착이 없으면 괴롭지 않은데 한 마음 일어나면 애착이 붙습니다. 그 한 생각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고 고집하고 싸우고 갈등이 생깁니다. 그 갈등의 원인이 되는 한 생각, 이 언덕에서는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있지만 저 언덕에서는 애착이 없습니다.

지혜는 행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

그래서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저 언덕에 이른다, 즉 생멸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견고함이 없어서 일체 법상에 생멸의 상이 있습니다. 근본 본래 마음에서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본래 마음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바람만 살짝 불어도 모든 마음이 가는 대로 항상 쫓아다니며 일어나는 생각 곳곳에 가기 때문에 아직 진여의 땅, 저 언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삿되면 이 언덕이고, 마음이 바르면, 즉 팔정도의 마음으로 무상을 보면 곧 저 언덕이 됩니다.

마음이 미혹하면 바로 차안, 이 언덕이고 마음이 무상을 깨달으면 저 언덕, 피안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금강경을 읽고 마음으로 금강경을 행하면 법신 즉, 우리의 몸이 바라밀에 있으며 부처님의 세계로 잘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세계로 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經)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지나간 길이라는 뜻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금강은 드러나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 본래의 성품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고 바라밀은 행입니다. 열심히 마음을 맑히고 경을 읽으면 길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행을 잘 하면 부처님의 세계로 잘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경’에는 부처님의 세계로 잘 안내하는 친서이기 때문에 한 구절이라도 외우고 지녀 달라는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기만 해도 언젠가는 인연이 되었을 때 갈 수 있지만 모르고 있으면 오랜 세월을 해매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이 복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부처님 세계에 갈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마음에 금강경이 늘 함께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부처님이 곧 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법이 곧 나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을 32품으로 나눈 것은 한 품 한 품이 서른 두 분의 부처님 말씀이고 모습이라는 의미겠지요. 옛 어른들의 지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합니다. 부처님께 직접 설법을 듣는다는 자세로 금강경을 마주 대하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부산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이 6월 3일 ‘하안거 금강경 산림 수행정진’ 네 번째 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하림 스님은

1986년 지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6년 동국대학교 졸업 후 1998년 실상사 화엄학림을 졸업했다. 2000년 뉴욕 불광선원에서 살면서 해외포교의 현실을 경험하고 2004년 귀국 후 실상사에서 거주했다. 2005년에는 해외포교잡지 「클리어마인드」 발행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1월 부산 용두산 미타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도심 속 수행도량으로 이끌고 있으며 행복선수행학교를 설립, 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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