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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이 공한 도리 깨달으면 부처로 뽑히리라

『선요(禪要)』는 선(禪)의 요체를 담은 법문입니다. 즉문즉설(則問則設)입니다.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한다는 뜻으로 깨달음에 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중국에 방거사란 분이 있었습니다. 방거사는 “시방동취회(十方同聚會)하야 개개학무위(箇箇學無爲)하나니 차시(此是) 선불장(選佛塲)이라 심공급제귀(心空及第歸)라.”라는 게송으로 유명합니다.

해석하자면 “지금 한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 그래서 여기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니 마음이 공한 도리를 깨달아야 급제해 돌아가리라”는 내용입니다. 요즘도 선방을 선불장이라고 말하는데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공한 줄, 또 그림자인 줄 아는 것이 공부의 시초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 몸도 마음도 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했습니다. 오온이 공한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의 첫걸음이며 정견(正見)을 확립하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급제’라는 표현은 마음의 고향인 본래 면목, 본래 부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위법을 배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유위법은 분별의 세계, 사람의 분별로서 헤아리는 세계, 생각 이후의 세계를 말합니다. 반면, 무위법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생각 이후의 유위의 세계에서 화두라고 하는 일념을 통해 생각 이전의 무위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무위법은 일체 차별이 끊어진 자리에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한 생각 일으키는 곳이 선불장

그런데 어느 날 한 스님이 방거사의 게송을 가지고 와서 묻습니다. “방거사의 말씀에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한 물음에 고봉 스님께서는 “있다”고 하십니다. “그 내용이 어느 구절에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큰스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물어라.” 문답이 다시 이어집니다. “어느 것이 시방세계 대중이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까?” “용사가 혼잡하고 범성이 서로 부딪히면서 참여한다. 즉 함께 뒤섞여 있느니라.” “어떤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위법을 배우는 것입니까?” “입으로는 부처와 조사를 집어삼키고, 그러니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자기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는 그 자리이니까, 눈으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을 본다는 이 말은 천지를 다 깨우쳐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를 뽑는 도량입니까?” “동서가 십만 리고 남북이 팔천 리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중생이 한 생각 일으키는 곳이 선불장이기에 깨달음의 시공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의식의 세계는 항상 규정을 합니다. 모양으로 이름으로 규정하는 것은 분별의 세계입니다. 무분별의 세계는 오직 모를 뿐에서 시작합니다. 판단 보류, 판단불가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화두가 나옵니다. 몰라도 됩니다. 오로지 무규정, 무분별의 입장에서 간화선이 시작됩니다.

“어떤 것이 마음이 비어서 급제하여 돌아가는 것입니까?” “움직임 하나하나에 근본으로서 당당하면 낮은 근기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말씀마다 분명한 진리이며 구절마다 으뜸가는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이 도리를 그대는 어디에서 보았는가?” 그러니까 그 스님이, “할”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은 “막대기를 휘둘러 달을 치려고 하는구나.”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막대기를 휘둘러 달이 쳐 집니까? 허공에 상처를 내려고 하면 상처가 날 수 없지요. 자기가 다치고 맙니다. 내 참 마음을 아무리 번뇌 망념이 오염시키려고 해도 오염시킬 수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 일은 그만 두시고, 서봉사에서 오늘 시방세계 대중이 모여 선불장을 이루니 마침내 어떤 상서로운 일이 있겠습니까?” 당시 신도들이 꽤 모였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고봉 스님이 “산하대지와 삼라만상 유정과 무정이 모두 다 성불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 눈에는 세상이 모두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 만 보일 뿐인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작용이 공한 줄 알면 중생 그대로가 부처요 번뇌 그대로가 보리인데, 그런 줄 모르니까 성불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다 성불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저는 성불하지 못했다고 합니까?” 엄밀히 말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나는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이렇게 물으니, “그대가 성불하여 있다면 어찌 땅으로 하여금 성불하게 하겠는가.”

배우는 이가 성불했다면 주객이 사라져서 성불을 논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땅은 무정물입니다. 생각이 있으면 유정이고 생각이 없으면 무정이지요. 그런데 자신은 성불 못했다고 하니, 본래 성불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모두 다 성불이지만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성불한 존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모두 중생인데 자네가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보고 있으니 무정물인 땅이 어찌 성불한 모습으로 보이겠는가라는 말입니다.

“저의 참회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절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데 하자마자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어리석은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을 물려고 하고 지혜로운 사자는 흙을 던지면 던진 사람을 물려고 한다는 『법구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곧 사자가 아니라 개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불자를 세우시고 대중을 불러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부처를 뽑는 도량이며, 마음이 비어 급제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영리한 사람이 이 자리에서 알면 곧 방거사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본 것이다.”

그러니까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이미 다 해 마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흙덩이를 따라 쫓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방거사의 안심입명처를 보면 역대 부처님과 조사의 안심입명처를 보는 것이며, 불조의 안심입명처를 본 사람은 곧 자신의 안심입명처 역시 볼 수 있다, 모두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미 자신의 안심입명처를 보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물러 앉아 주장자와 바랑을 치우고 세 개의 서까래 밑 일곱 자 방석 위에 앉아 쌀알 없는 밥을 먹고 국물 없는 국을 마시며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자더라도 보내는 세월이 행복하기만 할 것이다.”

비록 세 개의 서까래는 아주 작은 집이라는 말입니다. 일곱 자는 2m의 방이니까 아주 작은 방입니다. 작은 방에 있으면서 쌀알 없는 밥과 국물 없는 국을 마신다, 다리를 쭉 펴고 코를 드렁드렁 골더라도 이미 보내는 세월이 무위의 정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다만 즐겁기만 할 뿐이다, 『증도가』에 언급된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배움이 끊어진, 깨달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나라고 왜 못하겠냐’는 발심부터

고봉 스님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쓸데없는 소리라고 합니다. 바로 이심전심 들어가면 되는데 신랑과 종, 쑥과 보리도 구분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구름을 모아 고양이 밑그림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 보면 호랑이 등에 올라탈 일이 있을까 싶어서 화두 법을 일러 줬다는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 아시죠? 고봉 스님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듣고 이로부터 무릇 의심덩어리가 생겨 잠자거나 먹는 것도 잊고 밤낮도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화두 일념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엿새 째 되는 날, 대중을 따라 경을 읽다가 머리를 들게 되었는데 그 때 문득 오조 법연 화상의 진영에 있는 글을 보고는 갑자기 이전에 앙산 스님이 물었던 “송장 끌고 다니던 놈이 누군가”를 확실하게 알았답니다. 마치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앉아 자신과 함께 모든 사물이 사라지는 것이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환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천칠백 공안을 처음부터 다 검토를 해 보니 막히는 곳 하나 없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화두만 붙잡고 있으라고 해도 딴 생각을 하잖아요. 제방 선원에서는 스님들이 용맹정진을 할 때는 삼칠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정진하더라도 화장실에 가서 10분이 지나면 좌복을 빼 버립니다. 그러니까 분발해서 고봉 스님도 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이렇게 발심을 해야 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월암 스님이 9월 9일 부산 미타선원 행복선수행학교에서 열린 『선요』 특별공개강좌의 두 번째 시간을 통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월암 스님은

1973년 경주 중생사에서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과에서 돈오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과 한국의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를 지냈다. 현재 경북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과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학술위원장의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간화정로』와『돈오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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