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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강설] 진실한 신통은 번뇌 그대로 정각 이루는 것

기자명 법보신문

신통이 성불이라면 마법사가 곧 부처
공부하다 보면 魔가 신통으로 나타나
번뇌 사라진 누진통 얻어야 진짜 성불

38. 신통은 반야를 장애할 수 있다

 
김홍도 作. 절로도해. 간송미술관 소장.

若不具神變 將何攝化.
문 : 만약 신통변화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무엇으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若純取事相神通 有違眞趣. 如輔行記云 修三昧者 忽發神通 須急棄之 有漏之法 虛妄故也. 故止觀云 能障般若. 何者 種智般若 自具諸法 能泯諸相. 未具已來 但安於理 何須事通. 若專於通 是則障理. 又 不唯障理 反受其殃 如鬱頭勝意之徒 卽斯類矣.

답 : 만일 겉으로 드러나는 신통력만 취한다면 불법의 참뜻을 찾아가는 것과는 어긋난다. 이는 『보행기』에서 “삼매를 닦는 사람이 홀연 신통이 생겨도 이를 재빨리 버려야 하니 신통은 유루법(有漏法)으로 허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관』에서 “신통은 반야를 장애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는 반야지혜’는 스스로 온갖 법을 갖추면서 집착하는 모든 상(相)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반야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다만 이치에 안주할 일이지 어찌 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신통력으로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신통력에 전념하는 것은 이치를 장애하는 일이다. 또 이치를 장애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불러들이니 울두승의 무리들이 이런 종류에 해당한다.

夫言眞實神變者 無非演一乘門 談無生理 一言契道 當生死而證涅槃 目擊明宗 卽塵勞而成正覺 刹那而革凡爲聖 須臾而變有歸空 如此作用 豈非神變耶. 所以 寶積經云 文殊師利白佛言 世尊 夫說法者 爲大神變 若是下劣根機之者 諸佛大慈 不令孤棄 一期方便 黃葉止啼. 如維摩經云 以神通慧 化愚癡衆生 若上上根人 只令觀身實相 觀佛亦然.

진실한 신통변화는 일승(一乘)의 도리로 ‘생멸이 없는 이치’를 이야기하고, 한마디 말끝에 도와 계합하여 생사에서 열반을 증득하며, 밝은 종지를 보아 번뇌 그대로 정각을 이루고, 찰나에 범부가 성인이 되며, 잠깐 사이에 유(有)에서 공(空)으로 돌아가니 이런 작용이 어찌 신통변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보적경』에서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세존이시여, 법을 설함이 큰 신통변화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크나큰 자비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이라도 그대로 외롭게 버려두지 않고 상황에 맞는 방편으로 노란 잎을 돈이라 하여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십니다.”라고 하니, 이는 『유마경』에서 “신통지혜로 어리석고 우매한 중생을 교화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최고의 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만 몸의 실상을 관하도록 하며, 부처님의 실상도 관하도록 한다.

如昔有彭城王問 諸大德等 實若證果 卽得成聖者 與我左腋出水 右腋出火 飛騰虛空 放光動地 我卽禮拜汝爲師.

이는 옛날 팽성왕이 스님들에게 질문한 신통력에 대하여 우두융 대사가 답한 것과 같다.

팽성왕 : 대덕 스님이시여, 실로 도를 터득해 성자가 되어 좌측 겨드랑이에서 물을 쏟고 우측 겨드랑이에서 불을 뿜어 허공을 날면서 빛을 놓아 대지를 흔들 수 있다면, 저는 곧 그대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배를 올리겠습니다.

牛頭融大師答云 善哉善哉 不可思議. 今若責我 如此證果者 恐與道乖. 審如是成佛者 幻師亦得作佛. 且與諸大德 及諸大士證者 昔釋迦在於僧中 演無上道 與僧不異 維摩在俗 說解脫果 與俗不殊 勝鬘女人 說大乘法 女相不改 善星比丘 行闡提行 僧相不移. 此乃 正據其內心解與不解 以爲差隔 何關色身男女相貌衣服好醜. 若言形隨證改 貌逐悟遷 是聖者 則瞿曇形改 方成釋迦 維摩相遷 乃成金粟. 卽知 證是心證 非是形遷 悟是智變 非關相異. 譬如世間 任官之人 爲遷改官 官高豈卽貌別.

우두융 : 참 좋은 질문이니 생각하기 어려운 것을 물으셨습니다. 지금 그런 신통력이 곧 도를 터득한 것이라 여겨 저를 책망하신다면, 이는 참다운 도와 어긋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신통력을 성불이라 하면 마법사 또한 부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스님들이나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최고의 가르침을 설했지만 비구의 모습이 바뀌지 않았고, 세속에 있던 유마도 해탈과를 설했으나 속세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으며, 승만 여인도 대승의 법을 설했지만 여인의 모습이 바뀌지 않았고, 선성 비구가 개망나니 짓을 하였어도 승려의 모습은 여전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도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근거해 차별이 있는 것이지, 어찌 남녀의 모습이나 옷차림의 좋고 허름함에 관계가 있겠습니까.

만약 깨달은 도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해야 성자라면, 구담도 모습을 바꾸어야 비로소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고 유마도 속인의 모습이 바뀌어 금속여래(金粟如來)가 될 것입니다. 곧 아셔야 합니다. 증득은 마음이 증득하는 것이요 형상이 바뀌는 게 아니며, 깨달음은 지혜가 변화하는 것이요 모습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이는 세간에서 한 관직을 맡은 사람이 다른 관직으로 옮기는 것과 같으니, 관직이 높아졌다고 하여 어찌 그 사람의 얼굴까지 달라지겠습니까.

又 古人云 不改舊時人 只改舊時行履處 設或 改形換質 千變萬化 皆是一心所爲. 乃至 神通作用 出沒自在 易小令大 展促爲長 豈離一心之內. 故知 萬事無有不由心者 但證自心 言下成聖. 若不識道 具相奚爲. 故金剛經云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又 偈云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또 옛 스님께서는 “예전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니라, 다만 예전의 삶이 바뀌었다” 하였으니, 설혹 형상을 고치고 내용을 바꿔 끝없이 변화하더라도 모두 하나의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신통작용으로 출몰이 자재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고 오그라든 것을 길게 펼치는 일이 어찌 한마음을 벗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다만 자신의 마음을 증득하면 바로 성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온갖 형상을 갖춘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서른두 가지 뛰어난 모습으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겠구나.” 하며, 또 게송에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려 하거나 소리로써 부처님을 찾으려 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 가는 것이니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인연 없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古人云 若不達此理 縱然步步脚踏蓮華 亦同魔作. 龐居士偈云 色聲求佛道 結果反成魔. 若決定取神通勝相作佛者 不唯幻士成聖 乃至 天魔外道妖狐精魅鬼神龍蜃等 皆悉成佛. 彼咸具業報五通 盡能變化故. 若不一一以實相勘之 何辯眞僞. 但先悟宗鏡 法眼圓明 則何理而不通 何事而不徹. 一切佛事 攝化之門 自然成就.

또 옛 스님께서도 “만일 이 도리를 통달하지 못한다면, 설령 걸음걸음이 극락세계 연화대를 밟더라도 이 또한 마구니 장난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방(龐) 거사도 게송으로 “색이나 소리로써 부처님의 도를 구한다면 그 결과는 도리어 마구니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신통의 수승한 모습만을 보고서 부처님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마법사도 성자가 될 뿐 아니라, 천마, 외도, 요사스런 여우, 숲속의 정령, 귀신, 용, 이무기 등이 다 성불할 것이니, 그들 모두 오신통(五神通)을 갖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하나하나를 모두 실상의 안목에서 감별하지 않는다면 어찌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먼저 종경을 깨달아 법을 보는 안목이 오롯이 밝아진다면, 어떠한 이치엔들 통하지 못하고 어떠한 일인들 꿰뚫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불사와 중생 교화를 자연 성취할 것입니다.

강설) 유루(有漏)는 새는 게 있다는 뜻이니 중생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번뇌를 말한다. 신통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마구니 경계로 나타날 수 있기에 유루법이라 한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마(魔)’가 신통으로 좋은 경계나 나쁜 경계로 나타나 방해를 놓기도 하는데 이는 삿된 경계가 된다.

‘육신통’에서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가지가 ‘오신통’이다. 첫 번째 ‘신족통’은 자유자재로 원하는 곳에 몸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다. 두 번째 ‘천안통’은 중생들이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디라도 걸림 없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세 번째 ‘천이통’은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네 번째 ‘타심통’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능력이다. 다섯 번째 ‘숙명통’은 전생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뛰어난 ‘오신통’을 갖추었다하더라도 마음속의 번뇌가 사라진 ‘누진통’을 얻지 못하면 성불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려 하거나 소리로써 부처님을 찾으려 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 가는 것이니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인연 없으리.[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말한다.

울두승의는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 만난 신통을 부리던 신선이고, 금속여래는 유마거사의 다른 이름이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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