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의 스님 다삼매를 찾아] 4. 대둔사와 월출산

기자명 법보신문

순연한 자연에서 깊은 삼매에 들다

‘채산기행’ 등 탈속한 삶의 자취 곳곳에
다산 요청으로 월출산을 화폭에 담기도

 
초의 스님이 다산의 부탁을 받아 직접 그린 월출산 ‘백운도’. 이 그림은 젊은 시절 초의 스님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대둔사(현재 대흥사)는 남도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앉은 채로 입적한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곳.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이끌고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했던 그의 공을 기린 표충사에 정조의 친필 사액이 내려졌다. 조선시대에 승려의 사당을 만들어 나라에서 제물물목을 하사하는 곳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었으랴. 서산대사의 양대 제자 편양과 소요가 이룩한 대둔사의 수행 기풍은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할 만큼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했다.

대둔사. 이곳은 초의 스님의 몸과 마음을 살찌웠던 큰 도량. 그는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났던가. 50년을 넘게 지관(止觀)했던 대둔사에는 어디든 그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그가 완호 스님을 따라 대둔사로 거처를 옮긴 후 여기에서 보낸 단편적인 삶은 1810년에 지은 「채산기행(采山蘄行)」이나 「계행(谿行)」, 「만일난야(挽日蘭若)」에 잘 드러난다. 이 시들은 대둔사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약초를 캐거나 나물을 뜯던 당시 그가 느낀 대둔사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나 탈속한 그의 삶이 오롯이 배어난다.

특히 「채산기행(采山蘄行)」에 “승검초를 캐려 승검초를 캐려(採蘄復採蘄)/ 높고 먼 험한 산을 오르네(迢遞躋巑岏)/ 새벽 골짜기, 이슬은 짙고(谷曙艸露繁)/ 깊은 산, 산 공기는 차기도 해라(山深嵐氣寒)/ 처음에는 나무꾼 다니던 길조차 끊겼나싶더니(初愁樵徑斷)/ 점점 하늘이 넓어져 마음이 놓이네(漸喜洞天寬)”라고 한 것이나 「계행(谿行)」에 “나물을 뜯어다가 시냇가에서 쉬노라니(採蔌休溪畔)/ 흘러가는 계곡물은 맑고도 고요해라(溪流淸且漣)/ 연한 등나무는 비 갠 뒤 더욱 깨끗하고(新藤經雨淨)/ 오래된 비석은 구름 덮여 어여쁘다(古石依雲娟)/ 막 펴진 여린 잎은 어여쁘기도 하고(嫩葉憐方展)/ 풍성한 꽃들은 화사하고 싱그럽네(花欣未)/ 수놓은 병풍을 친 듯 에워싼 푸른 바위(靑巖當繡屛)/ 파란 이끼는 아름다운 자리를 깐 것 같아라(碧蘚代紋筵)/ 사람이 살면서 또 무엇을 구하랴(人生亦何求)/ 담담히 턱 고인 채, 돌아가길 잊었네(支頤澹忘還)/ 해는 저물어 으슬으슬 싸늘해지고(滄凉山日暮)/ 숲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네(林末起暝烟)”라고 하였다.

그가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순연한 자연과 함께 하나가 된 그의 소박한 삶이 어찌도 이리 아름다운가. ‘담담히 턱 고인 채 돌아가길 잊었다’라는 대목은 바로 삼매에 든 자신의 경지를 이리 표현한 것이리라. 이미 월출산에 올라 대오(大悟)의 경지를 이룬 초의 스님의 수행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자자구구(字字句句)마다 시원하고 은근한 감회가 일어나게 하는 건, 분명 시공(時空)을 초월한 그의 법문이 이 시를 통해 후인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늘 순임금처럼 되기를 갈구했던 공자의 큰 제자 안회는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긍지심을 지니고 자신을 탁마했던 그의 뜻이야 이미 알려졌건만 사람의 품질은 상하가 있는 것이 자명한 듯. 약관의 나이에 드러낸 그의 천성은 이미 닦을 것도 없는 자질을 타고 난 것인가.

하지만 그도 뒤따를 스승을 늘 찾아 나섰으니 “옛 선생 여러 모습 새롭게 기억하려고(先生新記多顔色) 좋은 종이에 깨끗한 글씨를 푸른 병풍에 비치고 있네(玉篆烏絲照翠屛)”라고 한 「만일난야(挽日蘭若)」에서의 이 시구는 분명 만일암에서 수행했던 옛 스승들의 수행 기풍을 항상 새롭게 기억코자했던 그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1812년 9월 12일 초의 스님은 다산을 따라 월출산을 다시 찾았다. 월출산 백운동은 이덕휘의 소박한 집이 있는 곳. 다산은 초의와 윤동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월출산의 12승지를 돌아본 후 산림처사 이덕휘의 집에 머물렀던 다산은 이 경승지의 아름다운 경치와 훈훈한 인정을 못내 잊지 못해 초의에게 「백운도」를 그리게 하였다.

후일 이 「백운도」와 「다산도」는 이 화첩이 세상에 알려져 다산의 후기를 통해 「백운도」에 얽힌 아름다운 승경유람(勝景遊覽)의 내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그림은 젊은 시절 초의 스님이 그린 화풍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십육나한도」와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추사를 위해 그린 「화북진도」 등과 함께 그의 화풍을 비교 관찰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덕휘의 백운동 구허는 그가 살던 집을 복원해 옛 자취를 기리게 했는데 어디를 가나 복원된 건물의 고증이 문제로 남아 있어 보인다. 옛 자취 복원하는 일은 그들의 삶 속에 묻어 난 고상한 격조를 보고 느끼고자함인데 맑고 고상한 고인의 기절(奇絶), 어디에서 찾을까. 격조가 사라진 건물은 생명성을 잃은 것. 푸근한 감회를 느낄 수 없다. 산하야 옛 모습 지니고 있으니 안목이 있는 눈 밝은 이는 어느 때가 되어야 올까. 유난히 비가 잦았던 기후 탓도 있지만 눈이 시원해지는 경계는 열리기 어려운 것인가.

 
다산이 머물던 산림처사 이덕휘의 집 뒤편에서 바라본 월출산 백운동. 사진=도서출판 동아시아

초의가 첫 서울 길에 오른 것은 1815년경이라 짐작된다. 그가 무슨 이유로 상경했는지는 자세하지 않았다. 아마 유산 정학연의 권유로 서울 길에 오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상경 길에 전주에 있는 한벽당에 올라 승경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읊었다.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물가의 정자에 다다르니(田衣當水榭)/ 이곳은 옛날 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지(云是故王州)/ 고요한 계곡 새소리 은근하고(谷靜禽聲遠)/ 맑은 계곡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그윽하기도 하여라(溪澄樹影幽)/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遞商催晩日)/ 쫙쫙 내린 비에 씻긴 산뜻한 기운(積雨洗新秋)/ 정말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信美皆吾土)/ 누각에 올랐으나 어찌 노래하랴(登臨寧賦樓)

필자가 한벽당을 찾아 나선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이른 아침, 전주문화원으로 김진곤 선생을 찾아 갔다. 이산만과 김기종에 관련된 자료를 얻을 요량으로 몇 주 전부터 연락을 해 둔 터. 여러 가지 필요한 자료들을 챙겨 주었다. 이곳은 향토 사학자들의 활동이 활발한 듯,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비석, 탑 등을 조사하고 비문을 탁본하는 등 향토 사료를 체계 있게 수집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 출신 이산만과 김기종은 초의 스님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라 관심이 갔다.

이산만은 초서에 능했던 명필가로 초의 스님과 몇 차례 시회를 열 정도로 마음을 터놓던 인물이고, 초의가 『진묵대사유적고』를 편집한 것은 김기종의 영향이다. 김기종은 이 지역의 문벌가로 효자 집안으로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다. 추사와 이 집안의 교유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듯. 추사는 김기종과 그의 아버지의 정여비(旌閭碑)를 썼다. 아마도 초의가 김기종을 만나게 된 것은 추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짐작된다.

초의 스님은 김기종에게 진묵대사의 내력을 듣고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아 『진묵대사유적고』를 편찬했다. 초의가 편찬한 책을 김기정이 교정하였고 서문과 후기도 이들이 썼다. 이 책의 편찬에서 보인 김기종의 역할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의 간행은 김기종의 경제 후원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세세한 답사는 후일로 미루고 한벽당을 찾아 나섰다.

한벽당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한다. 이 누각은 조선 초 문신인 최담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요월대(邀月臺)와 함께 예나 지금이나 풍류객이 모이는 곳이다. 전주의 8경 중 하나인 이 누각은 슬치에서 발원한 전주천이 북으로 내려와 한벽당 아래 바위와 부딪쳐 서쪽으로 급히 돌아 흐른다. 한벽청연(寒碧晴煙)은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서 바위에 부딪쳐 생긴 포말을 이리 표현한 것이다. 달을 맞이하는 곳이란 요월대는 한벽당과 나란히 서 있다. 초의 스님이 「등한벽당(登寒碧堂)」에서 ‘이곳은 옛날 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지’라는 말은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라는 뜻에서 이리 말한 것이다.

첫 상경 길, 한벽당에 오른 초의가 자신을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물가의 정자에 다다르니’라고 한 것은 소박한 자신을 이리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한양의 새로운 풍물이 낯설까 두려워 이리 말한 것일까. 한벽당을 휘감아 돌아드는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박동춘 소장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