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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성태용 교수의 유마경 특강 〈3〉

기자명 법보신문

나와 너 차별상 여의고 나부터 변해야 참 불자

유마 거사는 방편으로 중생교화를 위해 술집도 가고 환락가도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수행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럽다고 하는 삶의 무대를 청정하게 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재가불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 몸담고 있으나 푸른 꿈을 잃지 않는 중생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며 삶을 풍요롭고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우리 삶속에 옮겨올 때 행복해지고, 불퇴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며, 차별 없이 나가는 것이 수행의 과정입니다. 진여문에 도달하는 순간 진여와 생멸 자체를 분별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앉을 자리가 없고, 다시 생명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업의세계로 나온 것인데 그 전에 지은 업과 돌아나온 업의 세계는 다릅니다. 그것을 원효 스님은 ‘부사의업(不思議業)’이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좋은 업 지어서 좋은 세상 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업설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따라서 업은 행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부사의업이라는 적극적 업을 짓는 존재여야 합니다. 차별에 매여서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 소유화하려고 할 때 짓는 업을 ‘윤회를 짓는 업’이라고 한다면, 차별 없음을 바탕으로 해서 짓는 업이 ‘진여업’이고 ‘부사의업’입니다.

그러면 그 틀을 우리 삶속에 옮겨올 수 있습니다. 갈등과 차별로 인한 업이 있는데, 가령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하는 기본 한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과 ‘여’에 비유할 때 진여의 자리입니다. 똑같이 사람인데 나는 남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 당신은 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입장에 선다면 진여의 입장에서 생멸을 나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틀을 받아들이면 부사의업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우리 생활 속에 옮겨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업 자체가 달라집니다. 차별상을 바탕으로 집착해서 지을 때의 업과 차별상을 넘어서서 짓는 업은 그만큼 달라지고 변합니다. 그때 개인이 변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변하게 됩니다.

불교 경전은 대부분 스님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재가자에게 적용하면 재가자들은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갈등 구조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내 삶의 현장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전기를 갖지 못하면 내생에 극락세계로 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교유신을 다시 생각하자는 주제로 열린 토론 자리에 참석해, 유신론도 유신해야 할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시절 유신론을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현실을 보면서 그동안 불자들이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뼈아프게 반성해야 합니다. 올바른 종교의 양상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 주체가 변하는 것이 바른 종교이고, 바른 불자가 되려면 ‘부처님은 내가 어떤 불자가 되기를 바라실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유마경』은 당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술 마시고 환락가에 가는 유마를 찬탄하는 경전이 나왔다는 것은 폭탄과 다름없습니다. 유마거사는 방편을 통해 몸의 무상함, 덧없음, 집착할 것 없음을 말했는데, 여러분은 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불교의 업설은 미래지향적

우리가 갖는 욕망의 근원이 바로 몸입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때 부딪치는 첫 번째가 몸입니다. 몸에 좋다고 하면 별별 것을 다 하지요. 또 화장을 할 때도 상당히 공을 들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음을 치장하는 데는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하지 않으면, 몸을 기준으로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마음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법회 때마다 사홍서원을 하면서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해 놓고는 과연 주변인들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하고서는 내가 괴로워하는 일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마찬가지로 불법을 배우는데도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몸에는 참 많은 신경을 쓰고 살아 갑니다. 그러니까 유마거사가 몸에 병을 나타내서 몸의 덧없음을 이야기한 이유는 욕망의 근원인 몸의 부정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면 몸은 그대로 부정되기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되살려져야 합니다. 몸은 그만큼 나에게 가까운 벗, 평생 함께해야 할 벗이자 동지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내 몸과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여러분의 벗입니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몸을 몸으로만 보지 말고,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몸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벗이 잘못을 범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내게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불교는 극단으로 나눠서 ‘좋다’ ‘나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마경』에서도 병을 통해 몸의 덧없음을 보여주지만 학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중도론은 몸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유마경』의 「제자품」으로 들어가면 사리불을 시작으로 목건련, 대가섭, 아나율,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 우바리, 라후라, 아난다 등 십대제자에게 차례로 문병을 가도록 당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십대제자는 깨달은 사람의 설법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의 길로 간다는 성문승 중에서도 대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유마거사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사양을 합니다. 이 문병이 단순한 문병이 아니라 병을 매개로 한 큰 법석이 열릴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법석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유마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응대해야 하는데 거기에 부담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당시 화석화된 불교를 유신시켜야 할 대상으로 승단이 지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해 스님은 유신의 첫걸음을 ‘깨 부시기’라고 했는데 파괴하지 않으면 유신이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당시 승단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부분을 유마가 치고 십대제자가 맞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왜 승단이 두들겨 맞는지 유심히 봐야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견착상(二見着相)’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이견착상은 둘이라는 견해에서 상에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나눠놓고 보는 견해, 거기에 바탕해서 수행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견착상에 빠지면 비불교

“그러자 세존께서는 유마힐의 생각을 아시고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보고 문병하여라.’ 사리불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문병하는 일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저는 큰 숲속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제가 좌선하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불이여 앉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닙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멸진정(滅盡定)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성자의 깨달은 경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범부의 온갖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데도 번뇌가 없고,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유마경』을 읽으면서 어려운 말이 많은데 같은 말을 갖고 내용만 바꿔서 비슷한 방법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렵지 않습니다. 둘이 아니라는 자리에 서서 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사의업이라고 말씀 드렸었는데, 이 틀에서 보면 이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유마거사가 말한 멸진정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나오지 않고도 일상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일상과 멸진정을 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 때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참선은 멸진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일상을 나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행위와 선정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수행을 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유일한 분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교는 불교가 아니게 됩니다. 지금 한국에서 불교행세를 하는 곳들을 보면 부처님이 나올 이유가 없는 불교가 많습니다. 힌두교적 수행을 불교라고 우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불교는 언제나 부처님이 나오신 이유에 있습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겸수(止觀兼修), 즉 고요함과 깨어있음을 함께 닦는 데에 부처님께서 나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수행을 거기에 비춰봐야 합니다. 화두를 들면 모든 잡념들이 사라지고 고요가 있는 것, 그래서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두가 아닙니다. 사경이던 염불이던 정혜쌍수라는 틀 속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끊임없이 계발해 언제나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생활을 유지하는 힘이 강해지면 부처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생활 속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수행력 까먹기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차단하고 들어가 앉아야 하는 참선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무대가 바로 불교수행의 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마거사의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으면 함께 가는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에게 한 이야기는 재가불자는 물론 불교전체에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진여의 자리와 생멸의 자리를 둘로 나눠놓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을 일으켜 나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는 자세가 바로 선입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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