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순례] 4. 중국 선불교의 시원 소림사
[중국불교순례] 4. 중국 선불교의 시원 소림사
  • 법보신문
  • 승인 2010.12.0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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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스님의 푸른 깨달음 중국을 물들이다

 

 

소림사에는 역대 소림사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밭이 있다. 당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간 조성된 탑이 무려 241개에 이른다.

 

 

소림사는 중국 선불교의 시원(始原), 달마 스님의 혼이 서린 곳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지 600여년. 간결하고 담박했던 붓다의 가르침이 중원의 흙과 물을 만나고 긴 세월에 침착되면서 그 빛을 잃어갈 즈음, 혜성처럼 나타나 깨달음의 축복을 내린 선지식. 그가 바로 달마 스님이다.


스님은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달마 스님은 527년 인도를 떠나 해로를 통해 중국 남쪽 광주에 도착했다. 당시 광주 지역을 다스리던 자사 소앙(蕭昻)은 위대한 고승의 역사적인 중국 내방을 황제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에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리던 양무제는 수도 건강(建康· 현재 南京)으로 스님을 초청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이라는 화두를 남긴 역사적인 회견의 시작이었다.
무제는 달마 스님을 보자마자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짐은 왕이 된 이래 수많은 절을 짓고 숱한 경전을 펴냈으며 또한 많은 스님들을 공양했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큰 공덕이 되겠는가?”
그러자 달마 스님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물었던 무제는 놀라 불쾌한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어째서 공덕이 안 된다는 말인가?”


스님이 다시 대답했다.
“그러한 것들은 죄다 자질구레한 속세의 인과응보에 불과할 뿐 진정한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물건의 그림자와 같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공덕이란 말인가?”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인데 이러한 지혜는 본래 말로 담을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이치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는 계속 물었다.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가르침인가?”
“텅 비어 전혀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모릅니다.”


무제의 바람 내친 달마의 직설화법

 

 

소림사 입구를 알리는 패방. 파란 하늘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무제는 직접 ‘금강경’을 강의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질문의 수준은 법거량은 고사하고 무아(無我)와 공(空)이라는 붓다의 기본 교설에도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 무제는 아마 다음 생에는 그동안 쌓은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이라는 덕담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마 스님은 곧장 본체로 직행해 버렸다.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선의 기질 그대로다.


결국 달마 스님은 무제와는 인연이 없음을 알고 미련 없이 양자강을 건넜다. 그리고 북위의 수도인 뤄양을 거쳐 하남성 등대현 숭산에 깃들었다. 그 유명한 소림사(少林寺) 9년 면벽(面壁)의 시작이다.


소림사는 496년 북위 효문제가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던 인도 스님 불타(佛陀) 선사를 위해 창건했다. 일설에 의하면 불타 선사는 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출가했는데 친구들은 모두 성불하고 혼자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타 선사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구도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 끝 중국에 이르러 북위 효문제를 만나 소림사를 세웠다. 그로부터 30년 후, 달마 스님이 이곳에서 중국 선불교의 시원(始原)을 열었으니, 모두 것이 예견된 시절인연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소림사는 청량한 선의 기풍보다 무술로 더 큰 유명세를 타고 있다. 몇 차례 영화로 제작된 무술 영화 ‘소림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중국불교의 세속화에 따른 것이다.


소림사가 무술로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당태종 이세민의 역할이 컸다. 위기에 처한 당태종은 소림사로 숨어들었고 스님들의 보호를 받아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 인해 중국 중원에 소림무술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소림무술은 달마 스님이 9년 면벽을 하면서 약해진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진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소림사가 가까워오자 주변은 온통 각종 무술학교의 간판과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산의 초입부터 시작된 무술 학교는 숙소, 음식점과 어울려 소림사 입구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현재 소림사 인근에만 60~70개의 무술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2만여명이 무술을 배우고 있다고 하니, 중국 무술의 메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입설정 안에는 달마 스님을 포함한 5대 조사상이 봉안돼 있다.

 


소림사는 중국 5대 명산 중 하나인 숭산(嵩山)에 자리 잡아 산세가 아름답고 공기 또한 청량하다. 상업화에 물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달마 스님의 향훈에 흠뻑 취하고픈 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 소림사 입구에 이르자 홍살문 같은 패방이 거대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는다. 파랗게 질린 하늘을 이고 당당히 서 있는 패방의 끝자락에 숭산소림(嵩山少林)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패방을 지나 뜰과 전각이 아름답게 펼쳐진 길을 따라 들어서자 숲에 쌓인 탑림(塔林)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대 소림사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밭이다. 당나라부터 청나라까지 1000여 년간 조성된 탑은 총241개로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일행을 맞는다. 스님들의 수행력과 지위에 따라 홀수의 층으로 탑을 세웠는데 흙먼지를 켜켜이 뒤집어 쓴 모습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탑림을 지나, 세월에 닳아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고졸한 돌사자와 눈맞춤을 하고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중국의 송나라 때 지어졌다는 전각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벗은 측백나무와 붉은 기둥과 문살, 그리고 파란색의 단청. 푸른 허공을 향해 휘어지는 처마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대웅전 앞으로 놓여있는 예외 없는 돌계단. 그러나 일행의 눈을 사로잡은 전각은 대웅전 한참 뒤에 자리 잡은 입설정(立雪亭)이다.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의 아름다운  만남을 기리는 곳이다.


달마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휘몰아치는 눈밭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참으며 서 있었던 혜가 스님, 깨달음에 대한 열망으로 마침내 한쪽 팔을 베어 눈밭에 던져 놓을 때의 그 붉은 마음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당시의 모습을 선어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9년 동안 벽만 바라보는 면벽 수행으로 일관하던 달마 스님 앞에 어느 날 신광(神光)이라는 수행자가 나타났다. 그는 오로지 법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아침저녁 스님의 토굴을 찾았지만 달마 스님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자 신광은 토굴 앞에서 스스로를 질책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옛 사람들은 도를 구하기 위해 혈맥을 잘라 굶주려 죽어가는 이를 구했고 낭떠러지에 몸을 날려 굶주린 호랑이를 살려주었다. 옛날에도 이같이 하였거늘 나는 왜 이렇게 신심이 굳지 못한가?”


그날 밤 하늘에는 하염없이 폭설이 내리고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신광은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날이 새도록 움직일 줄 몰랐다. 보통의 근기가 아님을 눈치 챈 달마 스님은 그때서야 눈 속에 서 있는 신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눈 속에 서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느냐?”
달마 스님의 물음에 신광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감로문을 열어 중생을 제도하소서.”
이에 달마 스님은 신광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모든 부처님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정진하시어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으셨나니, 너는 어찌 작은 덕과 지혜로 최상의 도를 구하려고 하는가.”
이 말을 들은 신광은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자신의 왼팔을 끊어 눈밭에 던졌다. 꽃처럼 빨간 피가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달마 스님이 감탄해 말했다.
“모든 부처님께서 최초에 도를 구할 때에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었는데, 네가 지금 팔을 끊어 앞에 내놓으니 구함이 있으리라.”


짚신 한짝 남기고 인도로 떠난 뜻은

 

 

입설정은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의 치열했던 만남을 기리는 곳이다.

 


입설정은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의 치열했던 만남을 기리는 곳이다. 그리고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지어주며 입문을 허락했다. 그 후 9년 동안을 한마음으로 달마 스님을 시봉하며 뒤를 이으니, 이 스님이 바로 초조(初祖) 달마 스님의 법을 이은 이조(二朝) 혜가 스님이다.


입설정 안으로 들어서자 청나라 강희제의 작품이라는 ‘설인심주(雪印心珠)’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눈 속에 마음의 구슬을 새기다. 한 팔을 잘라 눈밭에 던지며 법을 구했던 혜가 스님의 간절함이 편액 속에서 꿈결처럼 아득하다. 편액 아래에는 달마 스님을 중심으로 혜가, 승찬, 도신, 홍인 등 네분의 조사 입상이 양 옆으로 봉안돼 있다.


달마 스님은 북위의 교단을 장악한 권력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당했다. 그들은 달마 스님을 다투어 비방하고 음식에 독을 넣었다. 그러나 스님은 신통력으로 이를 모두 극복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땅에 온 뒤 여섯 차례의 독살시도를 겪었다. 그러나 이미 법을 전한 이 마당에 남은 한 차례는 그냥 감수토록 하겠다.”


결국 달마 스님은 빛나는 수행력과 투명한 깨달음으로 중국 선불교의 푸른 여명을 연 뒤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열반에 들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위나라의 외교관 송운(宋雲)이 인도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도중, 파미르 고원에서 달마 스님을 만난다. 스님은 한쪽 신발만을 주장자에 걸어 맨 채 인도를 향해 표표히 걷고 있었다. 그러자 송운이 물었다.


“스님,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나는 인도로 돌아간다. 그대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구나.”
송운이 귀국하여 보니 과연 효명제(孝明帝)가 세상을 뜨고 효장제(孝莊帝)가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이 사실을 말하자 곧 달마 스님의 무덤을 열어보게 하였다. 빈 관 속에는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송나라의 선승 오조법연(五朝法連) 스님은 이 사실을 추념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있다.
“조사께서 남기신 신 한쪽이여 천고만고 사람들의 귀를 울리도다. 허공을 어깨에 메고 맨발로 떠나심이여 어느 날 고향 땅을 밟으실 것인지.”


소림사 위쪽, 실제로 달마 스님이 면벽을 했다는 달마굴은 가지 못했다.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마음으로 달마 스님을 친견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시공을 초월해 달마 스님에게로 향하고 있다. 혜가 스님의 비장함이 한 조각 울림이 되어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중국불교의 혼을 불러 깨우고 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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