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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요술 같아 허깨비로 모든 색 만든다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 인연 따라 많은 법 설했지만
실상은 그 자리서 움직인 바 없어
성품을 알더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필자미상. 나한도. 대전 자광사 현수 스님 소장.

20. ‘공(空)에 집착하는 병’ 또한 ‘공(空)’이다


天台淨名疏 釋不觀色不觀色如不觀色性者. 不觀色者 心如幻師 幻作種種色. 若知幻師是誑 則不得所幻之色 今色從心 幻師幻出 尙不得此心 何處見有此色 故不應觀色. 不觀如者 若見色與如異 是則泯色入如 今不見色如之別 故不觀如. 不觀性者 卽不觀佛性 不觀色是空俗 不觀如是空眞 不觀佛性是空中道.


천태의 ‘정명소’에서 ‘유마경 아축불품’에 나오는 “색(色)을 보지 않고 색여(色如)도 보지 않으며 색성(色性)도 보지 않는다.”라고 한 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색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은 요술사와 같아서 허깨비로 온갖 색을 만들어낸다. 만약 요술사가 거짓인 줄 안다면 허깨비로 만들어진 색은 얻을 수 없다. 지금 요술사와 같은 거짓 마음에서 색이 나오니, 실로 이 마음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디에서 이 마음이 만들어낸 색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색을 보는 것이 아니다.


‘색여(色如)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색(色)’을 ‘진여(眞如)’와 다르다고 보면 이는 ‘색’을 버리고 ‘진여’에 들어간다. 지금 ‘색’과 ‘진여’를 다르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진여’를 보지 않는다. ‘색성(色性)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불성(佛性)’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속제(俗諦)가 공(空)이고, ‘색여(色如)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진제(眞諦)가 공(空)이며, ‘불성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중도(中道)가 공(空)이다.


以其計中道有佛性 而起順道愛生 是爲頂墮. 故經云 我及涅槃 是二皆空 唯有空病 空病亦空. 今不觀性 是無順道愛故. 夫受世間差別果報 皆爲一念心異分別情生 取衆生相爲凡 執諸佛境爲聖. 如經所說 觀衆生 如幻師見幻 觀如來 則三際體空. 二見於是雙消 情量爲之俱泯則 可以成諸佛之喜 除菩薩之憂. 信此一心 能入宗鏡.


중도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중도를 따르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이 일어나니 이것은 집착으로 마무리 공부에서 추락한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 “나와 열반 두 가지가 모두 ‘공(空)’이라고 주장하니 여기에는 오직 ‘공’에 집착하는 병만 있을 뿐이다. ‘공에 집착하는 병’ 또한 ‘공’이다”고 하였다.


지금 ‘불성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중도를 따르고자 하는 애착이 없다. 대개 세간에서 차별된 여러 가지 과보를 받는 것은 모두 한 생각 달라진 알음알이에서 생기니, 중생의 모습을 취하면 범부가 되고 부처님의 경계를 가지면 성인이 된다.


경에서 설한 것처럼, 중생 보는 것을 요술사가 허깨비 보듯 해야 하고, 여래를 본다면 과거·현재·미래의 그 바탕이 공이다. 대립되는 온갖 견해가 모두 사라지고 알음알이가 다 없어진다면 모든 부처님이 기뻐할 수 있기에 보살의 걱정이 제거된다. 이 한마음을 믿어야 종경에 들어갈 수 있다.


강설) ‘색(色)’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는 현상세계이니 세간의 진리로서 속제(俗諦)라고 한다. ‘색여(色如)’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는 현상세계[色]’에서도 그 바탕이 변하지 않고 ‘참으로 여여[如]’하게 있는 ‘출세간의 진리[空]’로서 진제(眞諦)를 말한다. ‘색성(色性)’은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를 벗어난 중도(中道)를 말한다. 세간을 부정하고 출세간을 부정하며 중도조차 부정하여 모든 집착이 끊어진 자리 그 한마음을 믿어야 부처님의 마음자리 종경(宗鏡)에 들어갈 수 있다.


정타(頂墮)는 수행을 잘하여 공부를 마칠 수 있는 정상 가까이까지 갔다가 그 경계에 집착하여 공부에서 추락하는 것을 말한다. 이견(二見)은 시비하고 분별하여 나누어진 상대적 견해이니 대립되는 온갖 견해를 모두 말한다.


21. ‘아(阿)자’에 한량없는 불법을 거두지만


於一心實相中 不見有世間過患障礙之法則 何所捨. 亦不見有出世殊勝尊妙之法 則何所取. 得自己法身之髓 到一心智海之源 初阿已攝無邊 過茶無字可說.


‘한마음이라는 실상(實相)’에서 세간의 허물과 장애되는 법을 보지 못한다면 무슨 버릴 것이 있겠으며, 또한 출세간의 수승하고 존귀한 오묘한 법을 보지 못한다면 무슨 취할 것이 있겠는가. 자기 법신의 골수에서 ‘한마음으로 드러나는 바다처럼 많은 지혜의 근원’에 도달하니, 범어의 처음 시작되는 ‘아(阿)’라는 글자에서 이미 한량없이 많은 불법을 거두지만, 범어의 마지막인 ‘다(茶)’라는 글자까지 지나쳐도 설할 만한 글자가 한 글자도 없다.


강설) 모든 집착을 버리니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이 마음이 한마음이며 법신의 실상이다. ‘아(阿)’와 ‘다(茶)’자는 범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아(阿)’자에서 이미 한량없이 많은 불법을 거둔다는 것은 어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온갖 이치를 알았다는 뜻이다. ‘다(茶)’자까지 지나쳤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는 뜻이다. ‘설할 만한 글자가 한 글자도 없다’는 것은 중생의 인연 따라 부처님께서 많은 법을 설했지만 실상(實相) 그 자리는 조금도 움직인 바가 없다는 뜻이다.


22. 본디부터 내 마음엔 망념이 없네


淨名經云 佛說 婬怒癡性 卽是解脫 又云 不斷婬怒癡 亦不與俱. 故云 得之者隱 傍之者現. 若於婬怒癡 情生味著 得其事者 則道隱 若傍善觀之 了其性者 則道現. 雖了而不著 故云 亦不與俱. 若非久行根熟菩薩 不能理事無礙 如先德偈云 久種善根深 逢塵塵不侵 不是塵不侵 自是我無心.


부처님은 ‘정명경’에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본디 성품이 곧 해탈이다.”라고 하고, 또 “음욕이나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내지 않고 또한 그것과 같이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어떤 견해를 지니면 도가 숨고 온갖 견해를 놓아 버리면 도가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만약 음욕이나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알음알이로 집착하여 그 일을 취한다면 도가 숨지만, 이를 잘 관찰하여 그 성품을 제대로 알면 도가 드러난다.


그 성품을 제대로 알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음욕이나 성냄과 어리석음과 같이하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오랜 수행을 통하여 근기가 성숙한 보살이라야 이(理)와 사(事)에 서로 걸림이 없으니, 이는 옛 스님께서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오랜 세월 좋은 뿌리 깊이 심으니
온갖 번뇌 부딪쳐도 물들지 않고
물만 들지 않는 것이 아닐 뿐더러
본디부터 내 마음엔 망념이 없네.


淸涼疏問 法性身土 爲別不別. 別則 不名法性 性無二故 不別則無能依所依. 答 經論異說 統收法身 略有十種. 一依佛地論 唯以淸淨法界而爲法身 亦以法性而爲其土. 性雖一味 隨身土相 而分二別. 智論云 在有情數中 名爲佛性 在非情數中 名爲法性 假說能所而實無差. 唯識論云 雖此身土體無差別 而屬佛法 性相異故.


청량 ‘화엄소’에서 물었다.
문 : 법성신과 법성토는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같은 것입니까. 다르다면 법성이라 못하니 법성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같다면 법성신과 법성토가 나누어질 게 없기 때문입니다.


답 : 경론에서 다르게 말한 내용을 통틀어 법신에 거두어 보면 간략히 열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 ‘불지론’에 의하면 오직 ‘맑고 깨끗한 법계’로 ‘법신’을 삼고 또한 ‘법성’으로 ‘국토’를 삼으니, 성품이 비록 한 맛이더라도 몸과 국토의 모습을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지론’에서는 “유정에 있으면 불성이라 하고 무정에 있으면 법성이라 하니, 임시 능(能)과 소(所)로 나누어 말하더라도 실로 차별이 없다.”라고 하였다. ‘유식론’에서는 “법성신과 법성토 그 바탕에 차별이 없더라도 ‘불(佛)’에 속하고 ‘법(法)’에 속하는 것은 ‘성(性)’과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謂法性屬佛 爲法性身 法性屬法 爲法性土. 性隨相異 故云爾也. 今言如虛空者 唯識論云 此之身土 俱非色攝 雖不可說形量大小 然隨事相 其量無邊 譬如虛空遍一切處故. 如虛空言 通喩身土.


이는 법성이 ‘불(佛)’에 속하면 법성신이 되고 ‘법(法)’에 속하면 법성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법성이 ‘상(相)’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렇게 말한다. 지금 ‘법성이 허공 같다’고 말한 것을 ‘유식론’에서는 “이 법성신과 법성토 모두 드러나는 모습으로 거둘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모습과 부피의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없더라도 그 드러난 모습을 따라가면 그 부피가 끝이 없다. 비유하면 허공이 모든 곳에 두루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성이 허공 같다’고 말한 것은 법성신과 법성토에 다 통通하는 비유이다.


▲원순 스님
강설) 법성신과 법성토 그 바탕은 법성으로서 똑같지만, 성(性)과 상(相)으로써 드러나는 모습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임시방편으로 붙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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