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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처분’의 생명정치학

기자명 법보신문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간에는 삼중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어이없는 정치를 가리기 위해 두 정부가 벌이는 아귀 안 맞는 전쟁게임, 나라의 정치를 건설회사 운영하는 것과 구별할 줄 모르는 대통령께서 건설회사들을 위해 전국의 강에서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생명의 살육, 그리고 수출에 장애가 되리라는 잔계산에 백신조차 제때 쓰지 않아 전국으로 확대된 구제역 바이러스를 쫓아다니며 약간의 감염 가능성만 있어도 싸그리 생매장해버리는 대대적인 학살이 그것이다. 이미 50만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처참하게 ‘살처분’되었다.

 

죽이기 전에 마지막 여물을 정성껏 끓여주는 농부나, 죽음의 예감 앞에 그것마저 먹지 못하는 소들의 커다란 눈을, 사진조차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산채로 생매장의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는 돼지들의 발버둥은, 죽어서 늘어진 그 옆의 시체들보다 더 참혹하다. 아우슈비츠 등에서 인간의 시체들이 처분되는 장면과 다른 게 있다면, 쓰러진 시체의 ‘종’만 약간 다르다는 것뿐이다.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것이야 지들끼리 싸우느라 그런 것이니 자신의 업보라고 한다지만, 인간들에게 자신의 살을 대주기 위해 감옥보다 끔찍한 농장에서 그저 살아오던 동물들이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쑤셔 넣어 병이 발생하기 쉽게 만들고 면역능력을 저하시킨 것도, 갇힌 동물들 사이에 병원체를 옮기고 다닌 것도 인간 아닌가?


인간 자신들의 업보를 애꿎은 동물들에게 전가시키는 이 끔찍한 살육을 무슨 과학적인 조치인 것처럼 표현하는 ‘살처분’이란 말처럼 위선적인 것도 없다. ‘보건당국’의 행정적 조치를 표시하는 ‘처분’이란 말을 고수하겠다면, 그 처분이 뜻하는 것에 눈감지 않도록 고쳐 써야 한다. ‘학살처분’이라고, 대대적인 학살처분이라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처참한 학살처분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병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접어두자. 그러나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된 동물 근처의 모든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자연적인 전염으로 죽는 동물들의 수보다 더 많은 동물들을 죽이는 건 아닌지 의문을 던져봐야 하는 게 아닐까?


더구나 전염병이 한 번 돌고 끝나는 게 아니라면, 다른 방역조치들을 취하면서 직접적 감염체만으로 ‘처분’을 제한한다면, 전염을 막지 못하더라도 죽어가는 과정에서 면역력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고, 그 경우 처음엔 심지어 더 많은 동물들이 죽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로 인해 죽는 동물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살처분이야말로 빈대 잡겠다고 집에 불을 지르는 그런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이진경 교수
동물들은 보여도 그들의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들의 고기뿐이다. 가축들의 목숨은 있어도 세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는 것은 그 고기를 팔아 얻을 인간의 득실뿐이다. 그렇기에 ‘방역’이란 병으로부터 목숨을 지키는 것이지만,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말의 감염 가능성만으로도 방역을 위해 목숨을 빼앗는 턱없는 아이러니가 아무런 의문도 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명을 보지 못하는 한, 그들의 목숨을 세지 못하는 한, 우리도 ‘학살처분’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그들과 공범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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