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선덕여왕

기자명 법보신문

불법 권위 의지해 통치했던 신라 최초의 여왕

진평왕 맏딸로 왕위 계승
왕위 반대 모반 등 직면


당태종도 여왕폐위 제안
신라정치에 심각한 영향

 

 

▲대구 부인사 숭모전의 선덕여왕 어진. 선덕여왕이 창건했다는 부인사에서는 지난 1986년부터 매년 음력 3월15일 선덕여왕 숭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부인사 제공

 


진평왕의 맏딸 덕만(德曼)은 632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왕이다. 나라 사람들은 그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하지만, 여왕의 즉위는 처음부터 여러 문제에 부딪혔을 가능성이 많다. 선덕여왕 즉위 1년 전인 631년(진평왕 53)에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일으킨 모반사건을 선덕여왕의 즉위 문제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53년이나 재위한 진평왕은 이미 노쇠했을 것이고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했을 것이며, 칠숙과 석품은 덕만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난은 조기에 진압되고 덕만은 성골 남자가 다하고 없다는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 꽃을 보고 웃으면서 좌우에게 말하였다.


“이 꽃이 요염하고 부귀하여 비록 꽃 중의 왕이라고 하지만, 꽃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황제가 이를 보낸 것은 어찌 짐이 여자로써 왕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미묘한 뜻이 있는 것이다.”


씨를 심어서 꽃이 피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향기가 없었다. 당 태종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부정적으로 본 것 같다. 신라 사회에도 여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선덕여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설화다. 선덕여왕은 미래에 닥칠 일을 예견하는 지혜가 있어서 미리 알아맞힌 일이 세 가지나 된다는 것이다.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것을 그림을 보고 알았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둘째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백제병이 여근곡(女根谷)에 매복해 있음을 알고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 여근곡(女根谷)을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보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의 장군 우소(召)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여왕에게 물었다.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색은 흰데 흰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군사가 여근곡에 매복했던 때는 선덕여왕 5년(636) 5월이라고 했다.


셋째,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을 날짜를 미리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세워질 것도 미리 알았다고 한다. 왕은 아무 병도 없던 어느 날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 수 없어서 물었다.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되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佛經)에서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때야 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았다.


이상 세 가지 이야기가 선덕여왕이 닥쳐올 미래의 일을 미리 예견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幾三事)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다. 지기(知幾)는 일이 변하는 기미를 미리 아는 것이다. 기미를 미리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설화는 여왕이 기미를 예견할 정도로 지혜로웠다는 것이고 결국 선덕여왕은 만기(萬機)를 잘 살필 수 있는 왕이었다는 의미다. 이 설화에는 선덕여왕의 신이하고 특이한 능력을 성지(聖智)로 강조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형성된 것임이 분명하다.


선덕여왕 12년(643) 7월 신라는 백제의 침략으로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기고 8월에 대야성까지 함락 당했다. 신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해 9월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병을 청했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 중에 여왕폐위를 말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이는 임금을 잃고 도적을 맞아들인 격이므로 어느 해나 편안할 리가 없다. 우리가 한 사람의 종친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자신이 혼자서 갈 수는 없을 것이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보호해야 할 것이며, 그대 나라 편안해짐을 기다려 그대들에게 맡겨서 스스로 지키게 할 것이다.”


곧 선덕왕은 여자이기에 폐위시키고, 당나라 왕족으로 왕위에 추대하여 당나라의 군사를 신라에 주둔시키자는 제안이었다. 비록 신라가 안정될 때까지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국왕을 폐위하고 당나라의 후국(侯國)이 되라는 제안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 태종의 여왕 폐위론은 신라 국내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비담의 난도 그 중의 하나다.


자장, 선덕여왕 적극 옹호
신라 왕실혈통 신성 강조


최치원도 ‘제석천녀’ 찬양
만년에 비담·염종 등 반란


여왕 폐위론에 맞서서 선덕여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특히 신라 조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급히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을 적극 옹호했다. 자장은 신라 왕실이 찰리종(刹利種)이라는 설을 내세워 왕실 혈통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자장은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는데, 문수보살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대 나라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인데, 왕이 미리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기에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품이 추하고 패려하여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로는 천신들이 재앙을 내리지만, 그러나 나라에 다문비구(多聞比丘)가 있으므로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민(萬民)이 화평하다.”


부처님이 태어난 석가족은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 즉 찰리종에 속했다. 따라서 신라의 왕이 찰리종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부처님의 가문과 같다는 것이고, 이는 신라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다. 진평왕은 석가모니의 가계에서 이름을 빌려 씀으로서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는데, 백정은 싣달타 태자의 아버지 정반왕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진평왕의 왕비를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두 아우도 정반왕의 두 형제의 이름을 따라서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가족과 석가모니 가족 사이의 동일성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사적 노력이었다. 덕만(德曼)은 진평왕의 맏딸이다. 덕만이라는 이름도 ‘열반경’의 덕만우바이(德曼優婆夷)에서 따 온 것 같다. 경에 의하면, 덕만은 여성의 몸을 받아 무량한 중생을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구하고자 했다.


덕만우바이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선덕(善德)이란 왕호 역시 ‘열반경’에 나오는 선덕우바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의하면,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에 의해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이처럼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가족과 동일하기에 신성하다는 수사적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 찰리종설인 셈이다.


사람들이 사견을 믿기 때문에 때로는 재앙이 있지만, 나라에 다문비구가 있어서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하다고 했던 문수보살의 말에는 현실적으로 닥친 재앙은 사견을 믿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지 선덕여왕의 탓이 아니며, 오히려 찰리종인 선덕여왕은 미리 불기를 받은 특별한 인연이 있기에 화평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중에는 왕이 평소에 도리천에 장사지내 줄 것을 말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여기에는 선덕여왕을 제석천녀(帝釋天女)의 화신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보인다.


일찍이 최치원은 “우리 선덕여왕은 흡사 길상천녀(吉祥天女)의 거룩한 덕화와도 같아서 동방의 임금이 되어서 서방의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고 했다. 선덕여왕이 실재로 여러 불사를 일으키고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서 불법을 크게 보호하고 일으켰던 점에 유의하면, 선덕여왕이 불기(佛記)를 받아 서방의 불교를 우러러 보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647년 선덕여왕 16년 정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했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비담은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지 두 달도 되기 전에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며칠 뒤인 8일에 선덕여왕은 사망하고 이어서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에 머물며 방어했다. 난의 초기에는 반란군이 우세하여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달 17일에 주모자 비담을 주살하고 연루자 30여명을 처형함으로서 난은 진압되었다. 난의 진압에 적극적인 공을 세운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김상현 교수
여왕은 능히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일어난 비담의 난이 진압되기도 전에 왕위에 오른 진덕왕도 여왕이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진평왕의 아우 국반갈문왕의 딸 승만(勝曼)이 왕위계승자로 논의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