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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수기 받으면 무정도 함께 성불한다

기자명 법보신문

범부는 보통 사람들을 말하고
가르침 듣고 깨달은 이는 성문
연각은 십이인연 얻은 사람이요
보살은 밝은 지혜·자비 수행자

 

 

▲녹색타라(모사). 13~14세기. 둔황연구원.

 


70. 모든 지위에는 차별이 없다


不思議佛境界經 云. 爾時須菩提 又問言 大士 汝決定住於何地 爲住聲聞地 爲住辟支佛地 爲住佛地耶. 文殊師利菩薩言 大德 汝應知 我決定住於一切諸地. 須菩提言 大士 汝可亦決定住凡夫地耶. 答曰 如是. 何以故 一切諸法及以衆生 其性卽是決定正位 我常住此正位. 是故 我言 決定住於凡夫地也. 須菩提 又問言 若一切法及以衆生 卽是決定正位者 云何建立諸地 差別而言 此是凡夫地 此是辟支佛地 此是佛地耶. 文殊師利菩薩言 大德 譬如世間以言說故 於虛空中 建立十方 所謂 此是東方 此是南方 乃至 此是上方 此是下方. 雖虛空無差別 而諸方有如是如是種種差別 此亦如是. 如來 於一切法決定正位中 以善方便 立於諸地 所謂 此是凡夫地 此是聲聞地 此是辟支佛地 此是菩薩地 此是佛地. 雖正位無差別 而諸地有別耳.


‘부사의불경계경’에서 말하였다.
수보리 : 문수보살이여,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성문입니까? 벽지불입니까? 아니면 부처님입니까?
문수 : 수보리여, 그대는 반드시 내가 모든 위치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수보리 : 문수보살이여, 그대를 ‘범부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문수 :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법과 중생의 성품 그대로가 반드시 ‘바른 위치’이니 나는 언제나 ‘바른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반드시 범부의 위치에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수보리 : 만약 온갖 법과 중생 그대로가 반드시 ‘바른 위치’라면, 무엇 때문에 온갖 지위를 만들어 범부나 벽지불 또는 부처님이라고 차별해 말씀하십니까?
문수 : 수보리여, 비유하면 이는 세간에서 말로 허공 가운데 열 가지 방향을 정해 동쪽, 남쪽, 위쪽, 아래쪽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차별 없는 허공’이더라도 여러 방향으로 온갖 차별이 있으니, 온갖 지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온갖 법이 반드시 ‘바른 위치’에 있는 가운데서 여래께서 방편을 잘 활용하여 온갖 지위를 두니, 이른바 범부, 성문, 벽지불, 보살,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차별 없는 바른 위치’라도 온갖 지위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所以 天台云 四敎如空中四點 四點雖歷然 不壞虛空性. 然此地位 至究竟位中 若理若行 方可窮盡.


그러므로 ‘천태교’에서 “네 가지 가르침은 허공에 찍는 네 개의 점과 같다. 네 개의 점이 분명하더라도 이 점이 허공의 성품을 부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렇듯 ‘바른 위치’는 범부에서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기까지 이치이든 수행이든 바야흐로 그 도리를 다할 수 있다.


강설) 범부는 보통 사람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성문’이라 하며, 홀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연각’ 또는 ‘벽지불’이라 한다. 보살은 밝은 지혜로 부처님의 세상을 추구하고 따뜻한 자비로 온갖 중생을 애틋하게 여기는 수행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 차별된 온갖 지위의 실상은 이 단락에서 ‘바른 위치’라 표현하고 있는 ‘공성(空性)’이다. 이 ‘공성’에서 중생들의 인연에 따라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의 온갖 지위를 설하고 있는 것은 ‘묘유妙有’로서 중생을 위한 임시방편인 줄 알아야 한다. 천태사교(天台四敎)는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을 말한다.


71. 유정에게 수기하면 무정도


若卽心是佛者 則一切含生 皆有此心 盡得成佛 敎中 云何不見 授劫國名號之記. 劫國名號 乃是出世化門之中 現前別記. 欲知眞記者 淨名經云 一切衆生亦如也 一切法亦如也 華嚴經頌云 顯佛自在力 如說圓滿經 無量諸衆生 悉受菩提記. 又 頌云 一一心念中 普觀一切法 安住眞如地 了達諸法海. 又頌云 一一微塵中 能證一切法 如是無所礙 周行十方國.


문 : 만약 마음 자체가 부처님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있으니 다 성불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무정물에게는 뒷날 가질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劫]’을 일러주어 수기하는 가르침을 볼 수 없습니까?


답 :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교화하며 바로 그 사람 앞에서 개별적으로 주는 수기이다. ‘참다운 수기’에 대해서는 ‘정명경’에서 “모든 중생도 여여하고, 온갖 법도 여여하다.” 하였고, ‘화엄경’ 게송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이 자재한 힘 나타냄으로
오롯하게 온갖 법을 설해 마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
남김없이 깨달음의 수기를 받네.


하나하나 일으키는 마음속에서
온갖 법의 실제 모습 두루 본다면
진여 법성 부처님 땅 살게 되는 것
모든 법의 진리 바다 통달하리라.
하나하나 드러나는 티끌 속에서
온갖 법을 환히 알아 증득하리니
이와 같이 걸림 없는 법의 이치로
시방국토 빠짐없이 나아간다네.


斯則 人法心境 悉記成佛 以一念具足 一塵不虧. 念念證眞 塵塵合體 同居常寂光土 俱號毘盧遮那. 終無異土別身聖强凡劣 與三世佛 一時成道 前後情消 共十類生 同日涅槃. 始終見絶 免起有情無情之妄解 不生心內心外之邪思. 可謂 上無所求 下無可化 冥眞履實 得本歸宗. 俱登一際解脫之門 盡受平等菩提之記.


이렇다면 ‘나’와 ‘대상’, ‘마음’과 ‘경계’가 모두 다 수기를 받아 부처님이 되니, 한 생각에 부처님의 공덕을 다 갖추어 한 티끌경계도 어그러지지 않는다. 생각마다 진여를 증득하고 티끌경계마다 진여의 바탕과 하나가 되니, ‘항상 고요하고 빛나는 나라’에 똑같이 있으면서 다함께 ‘비로자나 부처님’이라 부른다. 끝내는 각기 다른 국토에서 저마다 다른 몸으로 성스런 사람은 우수하고 범부는 하열하다는 구별이 없이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과 동시에 도를 이루니, 앞뒤로 일어나는 망정이 사라지며 온갖 중생과 함께 같은 날 열반을 증득한다.


처음과 끝이라는 견해도 끊어지고 유정이나 무정이라는 허망한 견해도 일으키지 않으니, 마음 안팎에서 삿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구할 깨달음도 없고 교화할만한 중생도 없다고 할 만하니, 자연스럽게 진실과 하나 되어 근본을 얻고 종지로 돌아간다. 다 함께 하나인 해탈문에 올라 모두가 다 평등한 깨달음의 수기를 받는다.

 

又 古德云 旣色心不二 修性一如 何不見 木石受菩提記耶.


또 옛 스님은 물었다.
문 : 이미 마음과 티끌경계가 다르지 않아 닦는 성품이 똑같은데, 어찌 나무나 돌이 깨달음의 수기를 받는 것을 볼 수 없습니까?


一一諸色 但唯心故 心外無法 豈唯心滅 而色猶存. 佛但記有情 攝無情也. 譬如 幻事要藉幻心 心在幻中 能持幻事. 若其心滅 幻事同無. 故但滅心 不復滅事. 衆生色心 亦復如是 皆如幻相. 一切外境 從幻心生 豈猶滅心 而存幻色. 此卽有情得記 無情亦然 是故 無情不須別記. 夫立劫國名號授記作佛者 爲引未發心者 令嚮慕耳.


답 : 하나하나 모든 티끌경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기에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마음만 멸하고 티끌경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단지 유정(有情)에게 수기하는 것만으로 무정(無情)도 거두어들인다.

 

이를 비유하면 ‘허깨비 같은 일’은 ‘허깨비 같은 마음’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처럼, ‘허깨비 같은 마음’에서 ‘허깨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이 멸한다면 ‘허깨비 같은 일’도 동시에 없어진다. 그러므로 단지 ‘허깨비 같은 마음’만 없앨 일이지 다시 ‘허깨비 같은 일’을 없앨 것이 아니다. 중생의 마음이나 티끌경계도 이와 같아 모두 ‘허깨비와 같은 모습’이다. 온갖 바깥 경계가 ‘허깨비 같은 마음’에서 생기니, ‘허깨비 같은 마음’을 멸했는데 어찌 ‘허깨비와 같은 바깥 경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곧 유정이 수기를 받으면 무정도 함께 받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정에게 반드시 따로 수기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을 일러주며 부처님이 되리라 수기하는 것은 아직 발심(發心)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원순 스님
강설) 중생이 보는 온갖 바깥 경계가 ‘허깨비 같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니, 이 마음이 사라지면 그 경계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는 유정(有情)이 수기를 받아 성불하면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도 저절로 함께 성불한다는 뜻이다. 중생들에게 수기를 주어 뒷날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가르침은 방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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