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불교의 평등사상
28. 불교의 평등사상
  • 법보신문
  • 승인 2011.08.0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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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골품제사회에서 사찰은 신분해방 공간

능력보다 철저히 혈통 중심
가옥크기·옷 색깔도 차별

교단 내에선 평등이념 실현
진골귀족서 노비까지 다양

 

 

▲국왕이 의상 스님에게 공경의 뜻에서 토지와 노비를 영주 부석사에 시납하려 했으나 의상 스님은 “우리들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은 것이 함께 균등하고,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며 국왕의 제의를 거절했다. 사진은 의상 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으로 국보 제19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진평왕 43년(621) 어느 날 신라의 네 젊은이가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뜻을 밝혔다. 설계두(薛頭)가 말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그렇다. 설계두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이는 골품, 즉 개인 혈통의 존비(尊卑)에 따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는 제도였다.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심지어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일상생활의 용기들에 이르기까지 골품이 문제되었다. 다시 그는 말했다.


“나는 중국으로 가서 세상에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러운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 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설계두는 몰래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621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던 645년 설계두는 당군에 참여하여 주필산(駐山) 아래에서 싸우다가 죽었는데, 공이 일등이었다. 신라사람 설계두 평생의 소원을 전해들은 태종은 어의(御衣)를 벗어 덮어주고 대장군의 직을 주고 예로서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 설계두는 죽어서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신라사회는 골품제도로 규제되고 있었지만, 적어도 불교 교단 내에서는 평등의 이념이 실현되고 있었다. 일찍이 인도에서 이미 그랬듯이, 신라에서도 신분이 출가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진골귀족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의 구별도 없이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었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 집에서 고용살이 하던 노파의 아들이었다. 지통(智通)도 원래는 이량공(伊亮公)의 종이었다. 이처럼 노비신분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예가 있었다. 진골신분으로 출가한 경우도 많았다. 안함·연광·자장·의상·국교·의안·명랑·혜통·원측 등은 모두 진골출신이다. 안함은 김씨로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였고, 연광의 세가는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자장은 진골 소판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이었으며, 의상의 출신도 귀족이었다. 국교·의안·명랑은 형제로 사간(沙干) 재량(才良)과 남간(南澗)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남간부인은 자장의 누이동생으로 진골이었다. 혜통은 속명이 존승각간(尊勝角干)이었다. 그리고 원측은 왕족출신이었다. 중간 신분층인 6두품 출신 승려도 있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에는 더 이상 신분이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모두 출가 이전의 성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임을 뜻하는 석씨(釋氏)로 불렀다. 석연광·석혜숙·석혜통·석의상 등의 예에서 보듯이.


비록 낮은 신분 출신일지라도 수행을 쌓아 고승이 되었을 경우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다. 혜공(惠空)과 사복(蛇福)은 훗날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에 봉해질 정도의 고승들이었다. 과부의 아들이었다는 사복의 신분을 귀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원효·의상 평등사상 주창
법 높으면 노비출신도 성인

불사·법회서도 차별 안해
“불법에는 귀천 없다” 실천


의상의 10대 제자들은 모두 성인(聖人)으로 존경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출신이 낮은 경우도 있었다. 즉 지통(智通)은 노비출신이었고, 진정(眞定)의 신분도 귀족은 아니었다. 지통은 이량공의 가노(家奴)였는데, 7세에 영취산의 낭지(朗智)에게 출가했다. 낭지를 찾아가는 길에 7세의 지통은 현신(現身)한 보현보살로부터 계를 받았고, 처음 만난 낭지로부터는 예를 받았다. 이 설화에는 지통의 총명과 구도심이 신비화되고 있는 듯하지만, 신분의 제약도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출가 전의 진정은 군대에 속해 있었고,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에 복역하면서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따라서 그의 신분을 귀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통과 진정은 훗날 의상의 대표적 제자가 되었고 성인으로 존경받기도 했다.


원광이 진평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일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연세 많아서는 지팡이를 짚고 궁중을 출입할 수 있었고, 왕은 손수 공양을 대접했을 정도다. 원효는 무열왕의 사위가 되기도 했고, 김유신에게 군사 자문을 하기도 했었다. 순경(順憬)은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열기(裂起)를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太守)에 임명하도록 부탁했다.


법회나 불사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신도들의 경우, 그 신분이 엄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선덕여왕 때의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조성할 때 온 성안의 남녀가 진흙을 다투어 운반했다. 해마다 2월이면 흥륜사에서 개최되던 복회(福會)에는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참석해서 이 절의 탑을 돌았다. 복회에서 만난 처녀 총각이 사랑을 맺기도 할 만큼 사찰은 대중적인 장소였다. 진평왕 때의 비구니 지혜(智惠)가 개최한 점찰법회(占察法會)에도 남녀가 두루 참여했다. 이처럼 규모가 큰 법회나 불사에는 많은 남녀가 참여했는데, 이때 사원 측에서 신분에 따라 참석자를 구분하거나 제한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선덕여왕이 지귀(志鬼)를 불러 만나보고자 한 곳은 영묘사였다. 활리역(活里驛) 사람이었던 지귀는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린 총각이었다. 효소왕이 친히 공양을 베푸는 망덕사(望德寺) 낙성법회에 초라한 모습의 비구도 함께 참석했다. 승상 김양도(金良圖)는 신심이 독실했는데, 흥륜사의 미륵상 및 좌우보살을 소상(塑像)으로 조성해 봉안하고, 금당에 금색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두 딸을 이 절에 소속시키기도 했다. 흥륜사의 화주승(化主僧)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의 개설을 위해 보시를 구할 때, 부자인 복안(福安)은 베 50필을, 그리고 이 집에서 품팔이하던 김대성(金大城) 모자는 밭을 각각 희사해 함께 불사에 참여했다. 진정의 어머니는 오직 유일한 재산이었던 다리 부러진 솥마저 절 지을 쇠붙이로 시주했던 적이 있다. 이상의 사례를 통해서 신분의 구별 없이 불사에 누구나 참여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홍(安弘)이 신라에 전한 ‘능가경’은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체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경이다. 그리고 여래장사상을 언급하고 있는 초기의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여래장경’과 ‘열반경’이 있다. ‘여래장경’에서는 일체 중생은 모두 여래장이 있다고 했고, 또한 ‘열반경’은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설한 경으로 유명하다. 여래장사상 계통의 여러 경전이 신라에 수용·유포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학승은 여래장사상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광은 ‘열반경’을 접했고, 특히 ‘여래장경’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가 ‘여래장경’에 대한 사기 및 소를 저술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원효는 불교의 평등사상에 대한 많은 관심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여래장, 혹은 불성에 관한 관심은 특히 그의 ‘열반종요’ 및 ‘법화종요’ 등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말했다.


“여래법신(如來法身)과 여래불성(如來佛性)은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소유한 것으로써 능히 일체를 운전하여 함께 본원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일체의 중생이 여래불성을 평등하게 소유했다는 원효의 표현은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법화경’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가운데 “나는 너희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너희들은 모두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구절을 인용하고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의상은 불교의 평등이념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그것도 국왕에게. 국왕은 토지와 노비를 부석사에 시납(施納)하여 의상에게 공경의 뜻을 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상은 국왕의 호의를 사양하면서 말했다.


“우리들의 불법(佛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함께 균등(均等)하고, 귀하고 천한 것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전장(田莊)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로써 집을 삼고 바릿대로 농사지어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이 이를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상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강조하면서 국왕의 제의를 거절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엄격한 골품제사회에 살면서, 국왕의 호의를 마다하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 것은 용기 있는 일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노비 출신인 지통(智通)이나 가난한 평민 출신인 진정(眞定) 같은 제자가 함께 수행할 수 있고, 훗날 이들도 십성(十聖)제자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의 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함께 균등하고, 귀천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등에 관한 의상의 발언이다. 의상은 또 제자들에게 오체불(吾體佛)을 강조했다. 지금 이 오척(五尺) 범부의 몸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기사상(性起思想)에 토대한 것으로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원광·원효·의상 등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 밖의 학승들도 불교의 평등사상을 알고 있었다. 물론 불교의 평등사상이 당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골품제가 시행되고 있던 불평등사회 속에서 평등사상을 접하고 이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상현 교수

더구나 고승들의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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