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조희룡 등 중인과 차문화
24. 조희룡 등 중인과 차문화
  • 법보신문
  • 승인 2011.09.1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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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원력으로 중인계층까지 차문화 확산

매화도의 명인 조희룡
초의 스님과 깊은 교류

 

늘 유마경 즐겨 읽으며
스스로 佛奴라고 호칭

 

▲조희룡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시첩.

조희룡(1789~1866)은 조선후기의 서화가이다. 그는 시와 그림, 글씨에 능해 시·서·화 삼절이라 칭송되었던 인물로, 근현대에 최고의 감식안을 가졌던 오세창은 그를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하였다. 특히 그의 매화도는 중국화풍을 탈피,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 ‘용매도(龍梅圖)’와 ‘장육대매(丈六大梅)’는 이러한 그의 예술성을 잘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후기 한국 화단을 이끌어 조선인의 정서와 미적 감수성으로 ‘조선문인화’의 세계를 열었으며, 초의선사와 교유하며 차를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의 자는 이견(而見), 운경(雲卿)이며, 호산(壺山), 우봉(又峯), 철적(鐵), 단로(丹老), 매수(梅), 매화두타(梅花頭陀), 불노(佛奴)라는 호(號)를 썼다.


그는 지기 유최진(1791~1858)의 집, 벽오당(碧梧堂)에서 친구 이기복(1791~?)과 후배 전기(1825~1854), 유숙(1827~1873), 나기(1828~?), 유재소(1829~1911) 등과 함께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해 중인들의 시회를 주도했다. 유최진의 문집 ‘병음시초(病吟詩艸)’의 ‘정미집(丁未集)’에는 ‘병 때문에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친구들이 자신의 집에 모였다가, 옛 사람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했던 뜻에 따라 벽오사를 결성하였다’고 하였고, ‘옛 사람들의 진솔한 뜻을 본받아 몇 가지 조약을 정한다’고 한 시사회의 취지와 규약을 밝혀 두었다. 벽오사의 사약(社約)은 다음과 같다.


사철 아름다운 날을 가려 모인다. 밥은 소채를 넘지 않고, 술은 세 순배를 넘기지 않으며, 안주는 세 가지를 넘지 않는다. 차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마음대로 책을 읽고, 흥이 나는대로 시를 읊으며, 한계를 두지 않는다.


이 시사회는 정미(1847)년 4월에 결성되었다고 한다. 벽오사란 시사(詩社)의 명칭도 유최진의 집 우물가에 늙은 오동나무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시사회의 규약 중에 ‘차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한 대목이 눈에 띤다. 이는 조선후기 초의에 의해 중흥된 음다 풍속이 중인계층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이 시사회에서 술과 안주, 음식 등은 검소와 절제를 강조하면서 유독 차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경화사족들이 차를 즐기는 취향성을 모방했던 중인들의 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벽오사의 규약, 특히 차에 대한 내용은 당시 경화사족들이 차를 어떻게 즐기고 인식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 차는 사대부들의 고상한 영역이었고 취미였다. 그들은 차를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했다. 그들은 군자와 같은 덕성을 지닌 차를 자신들의 고상한 삶과 취향에 걸맞은 동반자이며, 담박한 차의 향과 맛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과 일치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음다의 전통적인 이해는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해 소수의 문인들 사이에서 향유되어 양란(兩亂: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거의 민멸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나보다. 19세기 초의에 의해 주도된 차문화 중흥은 경화사족들이 차의 가치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부를 축적한 중인들, 특히 문인들의 문화생활에 동경했던 일부 중인층까지 차를 즐기는 부류가 생겼던 것이다.


초의의 원력으로 복원된 초의차는 경화사족들의 애호를 받았다. 다시 차를 즐기는 계층이 확대된 것이다. 경화사족들은 초의의 이러한 공을 앞 다투어 칭송했다. 이는 당시의 분위기였다. 따라서 경화사족들의 문인적인 취향성을 모방했던 중인들의 차에 대한 애호는 다분히 초의에게서 촉발된 것임이 자명하다. 이 시사회는 구성원들은 대부분 의원과 역관, 산과(算科)와 율과(律科) 등을 통과했던 기술직이나 경아전 서리 출신이었다. 그들은 부를 축적하여 새로운 미술애호층으로 부상했는데 이들은 사행(使行)을 통해 청의 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축척된 부를 바탕으로 값비싼 미술품을 수집하여 경화사족들의 문인적인 취향을 모방하였다.

 

중인들 모임인 벽오사는
시 짓고 차 마시는 모임

 

기술직·서리 출신들 다수
조선의 차문화 부흥 반증


한편 18세기 이후 그들의 거주지였던 인왕산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중인들의 시사회가 결성되어 여항문학이 발달하는 단초를 열었다. 천수경이 만든 송석원(松石園) 시사회를 시작으로, 벽오사(碧梧社), 일섭원시사(日涉園詩社), 직하시사(稷下詩社), 육교시사회(六橋詩社)는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벽오사의 맹주 유최진은 의원 출신이다. 서화와 골동 수집에 취미가 있었고, 벽오시사회의 일원인 전기와 유숙, 이기복의 작품을 수집한 그의 이력을 통해 그가 이 시사회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결성한 시사(詩社)는 송대의 시인이자 정치가, 철학자였던 사마광이 사직한 후 낙양의 덕망 있는 인사들과 결성했던 진솔한 모임 원풍기영회를 닮았다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송대의 문인들이 서화를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겼던 경향성에 영향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시사회가 결성될 무렵,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이 확대일로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들의 시사회에 차가 등장된 것은 절대적으로 경화사족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겨진다. 유숙이 그린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에는 그들의 시회의 정경을 고스란히 그렸는데 대나무 아래에서 차를 다리는 동자의 부채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야외용 토화로 위의 다관, 담담히 시를 짓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이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차를 다리는 동자의 모습에서 고단한 신분 사회의 질곡이 느껴지는 건 너무 감상적인 것인가. 그러나 정동(靜動)이 어우러진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차문화를 꽃피웠던 이들의 정취를 느끼기에 족하다.


조희룡이 초의와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시첩을 소개하려 한다. 이것은 조희룡이 초의에게 보낸 시첩으로, 그의 호가 철죽도인 이외에도 불노(佛奴)라는 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마경’을 즐겨 읽었던 그가 불노나 매화두타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조희룡은 스스로 유마거사를 자처하며, 신분상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치가 그린 관음상을 편지와 함께 보냈기에 시로 사례한다(小癡道人 自海南貽書 兼寄自寫觀音像 以詩謝之)는 부제가 붙은 그의 시는 이렇다.


꽃 그림자 가득한 뜰, 낮인데도 어둑어둑하고(一庭花影晝冥冥)/ 안개에 씻긴 산은 더욱 푸르다(蒙烟橫斜硏山靑)/ 홀연히 구름사이로 떨어진 편지(忽驚尺素雲間墮)/ 붓 기운 아직도 죽통을 뚫을 듯한데(翰墨之氣貫竹)/ 부지런히 편지를 뜯고 보니 도리어 고개가 숙여진다(忙手開緘還稽首)/ 당당하신 관음보살의 모습이여(觀音寶像自亭亭)/ 길상의 단아하고 엄한 모습, 오묘함을 두루 갖췄고(吉祥端嚴妙相具)/ 발아래 청련, 향기가 다시 피어날 듯(足底靑蓮花更馨)/ 도인은 해외의 궁구한 이치 다 갖췄네(道人海外盡理長)/ 흉중에 만상은 이미 무에 머물렀으니(胸中萬象已停)/ 옛적의 오백나한 모습 같아라(昔貌五百阿羅漢)/ (그대의)필력이 결국은 창해를 돌아 온 것이니(筆力終能回滄溟)/ 천리에서 보낸 은혜 어찌 헛된 것이랴(千里寄惠豈徒爾)/ 깊은 정, 나를 위해 신령한 마음으로 빌었지만(高情爲我祝性靈)/ 전도몽상에 빠진 몸, 번뇌가 떠나지 않아(顚倒不離煩惱想)/ 산란하게 노쇠함을 말할 뿐이네(惟以道頹齡)/ 이것을 대하니 두려워져 깊은 반성이 일어나서(對此發深省)/ 천리에서 보낸 법음, 천둥소리 같아라(空外法音如雷霆)

 

▲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고 일컬어지던 조희룡은 스스로 유마거사를 자처했으며, 초의 스님과도 깊은 교유를 나눴다. 그림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이 시는 소치가 보낸 관음상을 보고 지은 시이다. 조희룡의 이 시첩은 1838년 이후에 자신이 지은 시를 모아 첩으로 만들어 초의에게 보낸 것. 시첩 말미에 “초의법사가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지금 나의 거처에 두었다.

 

▲박동춘 소장

마침 해악에서 돌아와 다시 찾아 읽어보니 산을 보는 것도 삼매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草衣法師金剛遊詩 今在余所 時復取讀於海嶽歸來之後 始知爲看山三昧)”고 하였다. 초의의 금강산 유람 시에서 “간산삼매(看山三昧)”를 느꼈다니 그의 시평은 참으로 격이 있고, 아름답다. “간산삼매”, 삼매의 경지로 보는 자연의 맛은 어떨까. 자못 궁금해진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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