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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선원장 수불 스님

심적변화 통한 인식의 전환이 가행정진 원동력

밝음이 어둠 깨트린다.
이건 상식지혜.
밝음 어둠 동시에 보아야 불교지혜.
나는 도인 아닌 도를
공부하는 수좌.
장님이 눈 뜬 후 장님에게 개안 확인하는가.
절박하게 찾아보라.
선지식은 이 땅에 있다.

 

▲수불 스님. 안국선원 제공

 

10월11일 부산 안국선원 법당에 수불 스님의 법문 한 토막이 울렸다.

염관 스님이 하루는 시자를 불러 물었다.
“무소뿔 부채를 가져 오너라.”
“부채가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다오.”
시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벽암록에 나오는 ‘염관의 무소뿔 부채’ 한 대목이다. 일상에서도 제자를 점검해 주려 하는 스승의 애씀이 역력히 보이는 대목이다. 무소뿔 부채 가져오라 하니 부채가 부서졌단다. 한마디로 맥 빠지는 소리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제자의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원래 무소뿔 부채는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부채라도 가져오라 한 게 아니라 그냥 ‘무소뿔 부채’를 가져오라 했으니 “부채는 이미 부서져 있습니다” 말 했을 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집에 고장난 선풍기가 1대 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풍기 가져오라”하면 아들은 “아빠, 선풍기 고장났는데요” 할 것이다. 그러나 선으로 들어오면 그렇지만은 않다. 이미 부서졌다 하니 아예 “무소뿔을 가져오라”하지 않는가.

안국선원 집무실에서 만난 수불 스님도 여기에 기인한 일언을 던졌다.
“종교에도 상식과 지식은 통합니다. 다만 종교는 상식이 아닌 지혜라고 지칭되는 또 다른 차원을 필요로 하지요. ‘밝음이 어둠을 깨트리는 것’을 상식선에서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 차원에서의 ‘지혜’일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밝음과 어둠을 관계하지 않고 동시에 비춰서 함께 밝히는 힘을 말함입니다.”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본다는 것. 명과 암은 분명 다른데 어떻게 동시에 하나로 본단 말인가.
“청정이란 깨끗한 것만을 말합니다. 이건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불교는 다르지요. 불구부정(不垢不淨), 즉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을 ‘청정’이라 합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을 포용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을 말함이라. 연못서 자란 한 송이 연꽃처럼.

안거 때면 2000명 불자 운집

 

▲안거 때가 되면 서울과 부산 선원에 운집하는 수행인은 무려 2000여명에 달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평일에도 500명에서 700명이 선원을 찾아 정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알음알이로만 맛보는 건 진정한 선미가 아니라 했다. 옛 선지식들은 화두를 타파해 깨달아야 그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했다. 그 깨달음의 정도, 경지, 단계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는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몫일뿐이다.

간화선 수행은 어렵다.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라 했으니 분명 쉬운 선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간화선 수행은 쉽다.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고,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 했으니 꼭 어려운 것만도 아닐 듯하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인가?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냥, 해 보면 될 것을….

“앞에 놓인 물, 마셔봐야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만 급해서는 안 됩니다. 덤볐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내 뒤돌아서 버리거든요. 이쯤이면 이건 지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문제입니다. 이것까지 지도자 보고 책임지라 하면…. 억울하지요.”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무엇을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교학을 통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교학을 섭렵해야 하는가. 소·대승을 회통해야만 하는 것인가. 기도를 해야 한다면 며칠, 몇 달, 몇 년을 해야 하는 것일까? 혹, 지견을 여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중도관만 정립하고 이 수행에 들어와도 좋지요. 하지만 초심자 분들에게 이정도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 있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와서 간화선 수행하고 싶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들도 이 수행으로 적극 뛰어들게 해야 합니다.”

간화선 대중화, 세계화의 해결 실마리가 잡히는 듯하다. 화두 주며 “해보라!”는 직설 방편은 출가 수행인에게는 그대로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재가 초심자들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고 “간화선 수행 해보겠다”는데 “아직 그만한 힘이 당신에게는 없다”며 돌려보낼 수만은 없지 않은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조계종은 ‘간화선 대중화, 생활화, 세계화’를 선언했다. 문제는 ‘어떻게’였는데 그에 따른 활로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물론 전국 재가선원에 대중이 운집하는 현상을 짚어보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 평가할 수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떻게 하면 대중이 간화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가?’는 이 시대의 화두다.

안국선원은 조계종이 갖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안거 때가 되면 서울과 부산 선원에 운집하는 수행인이 무려 2000여명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평일에도 500명에서 700명이 선원을 찾아 정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간화선 대중화의 성공사례로 꼽을만하다.

안국선원에서 펼쳐지는 선법이 궁금해 졌다. 놀랍게도 수불 스님은 간화선 입문 초심자들에게 1700 공안 중 하나를 주는 게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를 ‘굽혔다 폈다’ 하며 “무엇이 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느냐”며 물었다.

전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이 백양사에서 ‘무차 법회’를 연 적이 있다. 당시 납자들은 큰 스님에게 중요한 물음 하나를 던졌다.

“화두는 반드시 공안집에 나온 것만을 들어야 합니까?”
당시 서옹 스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심이 크게 들 수 있는 화두를 스승에게 받는다면 그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안집에 나온 화두의 힘은 실로 크다.”
화두는 간절하게 들어야 한다고 한다. 공안집 화두를 간절하게 들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쉽고 간절하게 다가갈 수 있는 화두를 이 시대에 창출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저는 도인이 아니라 도인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수좌일 뿐입니다. 다만 제가 체득해 얻은 것을 타인에게 나눠주고 싶을 뿐입니다.”

수불 스님이 이러한 방편까지 쓰게 된 연유가 있다. 1989년 부산 범어사 내원암에서 정진하던 중 산을 내려 온 스님은 50명 정도의 재가불자를 지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중 수행은 상당한 시일이 지나도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스님은 당시 그 이유를 찾으려 거의 석 달 동안 칩거에 들어갔다.

50명 첫 수행지도 실패

“왜 실패 했을까! 간화선이 문제인가? 분명 그건 아니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미 간화선의 수승함은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 말입니다. 대중이 문제일까?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제게 허물이 있었던 겁니다.”

선원에서 쓴 법을 그대로 적용하니 대중들은 화두를 의심하기는커녕 집중하지도 못했다. ‘화두를 놓치지 말라’하니 다라니 외우듯 하더란다. 스님은 다시 이 문제를 짚어갔다. 그리고 그 해결의 방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선법이 지금 안국선원에 오롯이 펼쳐져 있다.

안국선원 수행의 특징은 심적 변화를 크게 일으킨다는 점이다. 적어도 인식의 대전환은 분명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선원에서 만난 몇몇 불자 분에게 물었다. 수행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느낀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가슴이 탁 트입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 가족, 이웃, 그리고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절감합니다.”
혹, 번뇌망상은 일어나지 않는가?
“일어납니다. 그냥 놔둘 뿐입니다!”
엄청난 변화다. 이를 놓고 깨달았다, 아니다. 증오다, 해오다 하는 판단은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점검하고 판단해야 할 몫이다. 분명 이런 변화가 어떻게 단기간에 일어나는지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학술적, 수행적 논쟁은 차치하고 심적 변화에 주목하고 싶다. 그런 변화 하나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이 수행을 놓지 않겠다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오늘처럼 스님 법문을 듣다 ‘무소뿔 부채’에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화두에 의심이 생겼다면 들어야 합니다. 기존에 거슬러 온 강과는 또 다른 강을 마주한 겁니다. 그에 맞는 뗏목을 챙겨 건너야 합니다.”

안국선원 문 항상 열려있어

안국선원의 수행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확연히 잡힌다. 불교 문외한도 들 수 있는 화두(방편)를 주고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 하나만으로도 부처님 법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면, 살아갈 수 있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누군가 공안 집에 실려 있는 화두에 의심이 든다면 그 화두를 들게 한다. 의심이 걸렸으니 들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단, 선지식을 찾아가야 합니다. 화두 수행 중에 겪는 경계를 혼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장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자신이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당사자가 누구를 찾아 갈지는 그의 몫이다. 수불 스님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눈 밝은 선사를 찾아 갈 수도 있다.
“선지식 없어 물어 볼 데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절박하게 찾아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오만입니다. 선지식은 분명 이 땅에 계십니다.”

수불 스님은 오늘 법당에서 ‘애써’ 부채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법당을 스쳐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청량함을 느꼈는지는 이날 앉아 있던 400여명의 불자 몫이다. 안국선원 불자들은 오늘도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서울, 부산의 안국선원 문을 두드려 보라. 아니,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들어가 보라. 변화를 느낄 것이다. 그 변화가 어쩌면 구경각을 향한 첫 걸음일지 모를 일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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