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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회연구소장 법안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모든 존재에게 이로운 삶 사는 것이 불자”

누구나 마음 보는 거울 있어
견성은 자기 업 실체 보는 것

 

 

▲법안 스님

 

 

우리 사회는 불교를 포함해 종교를 가진 사람이 55%나 된다고 합니다. 각각의 종교는 이웃의 고통을 나누고 더불어 함께하는 세상을 위해 봉사와 헌신, 자비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때문에 종교인들이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평화롭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부처님이 말씀하신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 변하지 않는 광명의 세계)로 만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이점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남자들이여 중생이라는 국토야 말로 보살의 불국토이니 보살은 중생의 이익이 증대되는 정도를 가리켜 불국토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국토라는 것은 중생의 올바른 생활에 따라 정해진다. 불국토에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중생이 과연 부처님의 앎에 도달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의 깊이에 따라 불국토에 가고 못가고가 정해진다. 불국토에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사람들이 과연 성자와 동등한 근기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의 깊이에 따라 불국토에 가고 못가고가 정해진다. 그 이유는 보살이 스스로 불국토로 가는 것은 결코 중생의 이익과 무관히 성립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유마경’ 첫 품인 ‘불국품’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느덧 계절은 가을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엄청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또 지난 겨울은 어땠습니까. 세상을 모두 얼려버리려는 듯 동장군의 기세가 매서웠습니다. 제가 산중에 있다보니 계곡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지난 겨울 모든 게 얼어버려 하루 물 한 바가지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화장실 사용은 고사하고 마실 물을 구하기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때 새삼 물 한 바가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매화가 피어나고 동백이 피고, 벚꽃과 개나리, 산수유가 산중에 가득해 졌습니다. 또 지금은 여름날 뜨거운 뙤약볕을 이겨내고 코스모스, 달맞이, 구절초, 수선화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과정은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정열을 바쳐 자기 존재를 유지하면서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열매를 맺고 스스로의 모습을 거둬들입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꽃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볼 때 너무나 편하고 은혜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가을 산을 수놓은 아름다운 단풍은 우리에게 신선함과 평화로움, 행복의 향기를 전해줍니다. 가을에 피는 달맞이꽃은 달빛을 보며 커나갑니다. 그런데 이 달맞이꽃이 피지 않으면 나방이 수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퀴벌레 모두 싫어하시죠. 하지만 이 바퀴벌레가 상하수도관의 슬러지를 먹어치운다고 합니다. 바퀴벌레가 없다면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존재 개개의 삶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미생물이든 모두 존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개의 거울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모를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거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입니다. 종교, 특히 불교에서는 바로 후자를 강조합니다. 동물원의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면 조련사는 아기코끼리의 다리에 쇠사슬을 묶는다고 합니다. 코끼리가 커가면서 조금씩 쇠사슬의 길이를 늘이는데 1년쯤 지나면 코끼리는 자신의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후에 쇠줄을 제거해도 쇠사슬의 길이만큼이 코끼리의 행동반경이 된다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대하고
노력하는 이가 불국토 주인


우리에게도 코끼리 다리의 쇠사슬과 같이 스스로를 옥죄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까르마’ 또는 ‘업’이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과거에 지어온 관성, 습관, 버릇, 성격 등이 바로 그것이며 사람들은 그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면 불안해합니다. 그 프레임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견성은 자신의 업에 대한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법문을 다 아실 겁니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법문은 당나라 청원유신(靑源惟信) 스님의 상당법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노승삼십년전미참선시(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견산시산 견수시수(見山是山 見水是水)

급지후래 친견지식 유개입처(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견산부시산 견수부시수(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이금득개휴헐처(而今得個休歇處)

의전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노승이 삼십년 전 미처 참선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 산을 보면 그냥 산이었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었더니, 나중에 이르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깨친 바가 있은 후에 산을 보면 그것은 산이 아니었고 물을 봐도 그것은 물이 아니더니, 마음 쉴 곳을 얻은 오늘에 이르러 다시 예전의 그 산을 보니 그냥 산이었고 물을 봐도 그냥 물이더라.


업의 상태에서 바라본 산과 물은 자신의 업에 따른 산과 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편견이 사라진 이후에 바라본 산과 물은 예전의 산과 물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편견이 사라진 것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어떤 걸림도 없는 대자유인의 경계에서 보면 그냥 산이었고, 그냥 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산과 물은 다른 것인가요, 같은 것인가요.


‘차마고도’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셨을 겁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쓰촨성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오체투지로 성지순례를 하는 3명의 청년이 나옵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6개월간 오체투지로 순례를 하다보니 옷은 헤지고 손바닥 보호를 위한 나무판자도 수십 개 닳아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자유로움과 평화로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라싸에 도착한 그들은 ‘평화롭게 기도할 수 있는 나에게 고맙다.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하며 살겠다. 나는 이 순간부터 착한 일만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마지막 이 한마디에 모든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수행에는 간경, 기도, 참선, 보살행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자신의 경계를 명료하게 통찰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본 ‘유마경’에서 보살이라는 존재는 깨달은 존재지만 중생에 대한 연민심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존재입니다. 또 보살의 불국토는 고통 받고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중생의 국토가 바로 불국토라 했습니다. 더불어 함께 나누고 행하는 실천적 행위가 이뤄지는 그 자리가 바로 불국토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고통의 현장에 함께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우리들 삶의 거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른 선지식은 우리의 또 다른 거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중생의 현장에 계셨습니다. 설사 그곳이 전쟁터라도 법문을 통해 사람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활동했던 그 공간이 모두 불국토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밖의 사람들을 편견과 선입견, 업연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다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안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데모를 하면 교통부터 걱정하는 게 우리의 일반적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예불하고 정근하며 관세음보살님을, 지장보살님을 찾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기 위함입니다. 부처님께 예를 갖추는 것은 본래 나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자신 밖의 모든 경계의 대상이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 즉 모두가 자신인 것입니다. 천지는 동근(同根)이요 만물은 일체(一體)라 모두가 한 뿌리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듯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내 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은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있습니다. 보리심은 차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연령, 성별,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2500여년 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회가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수행이고, 모두가 기쁘고 즐거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불국토의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불국토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가둔 프레임을 거두어 경계가 없는 자리에서 어떠한 존재도 나의 존재로 만나고 더불어 함께하는 게 부처님의 삶입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하고 있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불국토에 사는 사람도 되고, 고통스러운 곳에 사는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나도 이롭고 주변의 모든 존재도 이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쓰촨성에서 라싸까지 정진한 수행자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 좋은 일만 행하며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사는 그러한 불자가 됐으면 합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10월16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일요초청법회에서 불교사회연구소장 법안 스님이 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법안 스님

원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0년 사미계를, 1982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총무원 총무국장, 기획실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대표를 비롯해 참여연대 운영위원, 국민권익위원, 국가인권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화쟁위원, 불교사회연구소장, 제15대 중앙종회의원, 서울 금선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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