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사회와 더불어 사는 삶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완성

 

▲심산 스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세상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내가 부처’라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부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바람직한 신행의 첫 번째로 믿음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의 믿음은 제각기 다릅니다. 상근기의 믿음은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중근기는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근기는 어떤 믿음을 가질까요? 하근기는 좋다면 부처님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다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원력 키우고 실천해야


우리의 신행은 하근기로 시작해 상근기를 추구합니다.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신행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원력도 다 달라요.


상근기의 원력은 내가 불국토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을 불국토로 만든다. 왜 그렇죠? 나는 곧 부처님이니까. 그러면 중근기의 원력은 뭐겠습니까? 부처님을 믿고 극락세계를 간다는 것이죠. 극락을 발원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극락을 만들 때, 내가 곧 부처라는 것이죠. 하근기의 원력은 무엇일까요? 극락이고 지옥이고 간에 다 필요 없고, 지금 여기서 좀 좋은 것이 삶의 목표라면 하근기입니다.


이 원력도 키워야 합니다. 시작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선 어려운 문제 있으면 부처님께 다 이야기하세요.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세상사가 기복 불교라고 무시했지만, 그것 없는 종교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지 이를 성취하면서 머물지 않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서 마침내 극락세계를 스스로 완성해가는 불자. 이것이 하근기로부터 시작해서 중근기, 그리고 마침내 상근기의 원력가로 발전해가는 신행의 경로입니다.


행(行)도 근기에 따라 달라요. 상근기는 어떤 실천을 할까요? 상근기는 참선, 염불, 기도,수행하고 또 보현행을 합니다. 상근기 실천의 핵심은 무주상(無住相)입니다. 참선을 하되 나 참선하는 사람이야. 염불을 하되 나 염불하는 사람이야. 내지는 조금 착한 일 했다고 해서 나는 착한 사람이야. 이런 소리를 안 한다는 거죠. 그것이 공덕이 될 만한 것이라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이 사람도 역시 중근기입니다. 하근기는 좋다면 다 합니다. 자기의 욕심에 따라서 좌우가 되는 것이지요. 이게 상근기와 중근기, 하근기의 실천의 단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포교의 방향은 기복으로 시작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의 참진리를 알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행은 자기의 일상적인 문제로부터 출발을 하되, 내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내가 부처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주 수행자를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제가 있던 통도사 강원 강당에 액자가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봉생마리 불부자직(蓬生麻裏 不扶自直). 삼베 밭 속에서 크는 쑥은 부추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다는 말입니다. 쑥은 그냥 혼자서 크게 되면 서지를 못합니다. 그냥 옆으로 눕죠. 그런데 삼베 밭 속에서는 서라 마라 하지 않았는데 바르게 큰다는 것이죠. 대중의 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 자주 절에 가서 스님을 만나고, 이런 법회에 참석 해야할까요? 대중의 힘, 함께하는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째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믿음이 있는 사람 가운데도 자주 스님을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자주 스님을 찾아가는 사람 가운데 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수행자를 존경하는 사람과 존경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 중에는 존경심을 갖는 사람이 물론 더 낫겠죠. 여러분은 주지 스님을 얼마만큼 존경하십니까?


주지 스님을 존경하는데 이유와 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마치 여러분이 자녀에게 밥을 먹여주고, 공부를 시켜주니까 존경합니까? 아니지요. 이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귀의승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는 믿음을 가져야 되고, 둘째는 자주 찾아가서 봬야 되고, 자주 가서 찾아뵙는 것이 다가 아니라 존경해야 됩니다.


사회 향한 열린 마음이 중요


존경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어요. 한 종류는 경(經)을 묻는 사람과 묻지 않는 사람입니다. 경을 묻는다는 것은 청법(請法)입니다.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는 것이 경을 묻는 사람입니다. 경을 묻는 사람이 있고, 인생을 묻는 사람이 있는데 인생을 묻는 사람 보다는 경을 묻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경을 묻는 사람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심(一心)으로 듣는 사람이 있고, 일심으로 듣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법문을 청했으면 일심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데 일심으로 듣는 사람 가운데 또 두 종류가 있어요. 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을 듣고 나서 들은대로 지키는 사람이 있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육방예경(六方禮經)’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침에 강에 목욕을 하러 나가셨는데 선생이라고 하는 한 장자가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이유를 묻자 이 장자가 “나는 깊은 뜻을 모르지만, 저희 선친께서 매일 아침 목욕을 한 후에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을 향해서 절을 하면 공덕이 된다고 해서 저는 합니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각 방향에 대해 절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내용입니다.


“좋은 일이니까 한다” 이러면 여섯 방향을 향해 무작정 절을 하는 이 선생과 같은 것이죠. 왜 하는지를 다시 돌이켜보는 것은 그 가르침의 깊은 뜻을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법문을 듣고, 마음에 새겨서 지금 내 삶 속에서 일구어 내고자 한다면,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정리하면, 믿음이 있고 수행자를 자주 찾아가며 또 존경하는 사람, 수행자에게 경을 물으며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 깊은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바람직한 신행을 하고 있다는 거지요.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무리 신심이 있고 수행자를 존경하고 자주 찾아가 법을 묻고, 또 일심으로 듣고 실천하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한 가지가 없으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입니다.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하면서도 자신과 이웃, 사회와 인류를 생각하고 기여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의 사회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신행생활은 절 안에서 머물렀습니다. 내가 깨치고 실천하면 되고 절 안에만 머무르는 신행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곧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기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의 공부를 다시 묶어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서 회향하는 이 마음이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회향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사회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로 살때 불국토도 성취


상근기의 믿음과 상근기의 원력과 상근기의 실천이라는 신앙체계의 수승함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그 속에 녹아져 있는 사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 열림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불교의 사회화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적 역할이 없는 불교는 사회로부터 도태돼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신행을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청원태(請援態)라는 신행입니다. 둘째는 희구태(希求態), 셋째는 체주태(諦住態)입니다.


청원태는 기복신앙입니다. 아이가 어른에게 매달리듯 “해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해준다고 하면 염불하든, 참선하든 뭘 하든 다 합니다. 희구태는 신행을 착실히 하면서 내가 행한 것에 대한 만큼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수준의 신행입니다. 마지막 체주태는 진리에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진리에 머무르는 상태라는 것은 더 이상 미움도, 갈등도, 서로에 대한 오해도 다 접어버리고 깨끗한 상태, 이것이 체주태라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첫 출발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근기의 신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희구태로 가야됩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힘쓰는 것만큼 결과를 가져오는 성숙된 신행으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마지막 완성은 결국 이 사회와 더불어서 함께하는 삶이 될 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을 성취하는 겁니다. 그것이 곧 불국토를 내가 만드는, 내가 부처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바람직한 신행을 완성하시길 바랍니다.
 

정리=광주·전남지사 조영훈 지사장

 



이 법문은 12월9일 무등산 증심사에서 ‘무등에서 길을 묻다’를 주제로 열린 명사초청법회에서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이 한 설법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심산 스님

동국대 선학과와 불교문화대학원을 졸업했다. 대성사, 통도사 부산포교원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한나래문화재단 이사장과 불심홍법원 이사, 동련 이사장 등 소임을 맡아 포교 활성화를 이끌고 있다. 조계종 포교원 제10회 포교대상 원력상, 2002년 불이상, 2008년 행정안전부장관 표장 등을 수여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