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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서축암 감원 우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집착하는 마음 버리면 새로운 내가 보인다

 

▲우진 스님

 

 

오늘의 주제는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화엄경’을 펼쳐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모습의 첫 번 째는 ‘이행(二行)이 영원히 멈추었다’입니다. 이행이라는 것은 이분법적 행동입니다. 좋다-나쁘다, 한다-안한다, 좋다-싫다, 예쁘다-추하다 등 모든 두 가지 생각의 패턴, 행동의 패턴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나누어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습들이 없어졌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 째는 ‘달무상법(達無相法)’입니다. 형상이 없는 법을 통달했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상을 따라 움직입니다. 유형의 존재 를 내가 얻었다, 있다고 보는 것이 상법입니다. 반면 무상법은 어떠한 형상도 없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보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욕을 들어도 칭찬을 들어도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에서 ‘깨달음’은 인식 중심입니다. 똑같은 말이 어떤 형태와 상황으로 전개되면 ‘해탈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해탈을 정의하는 말은 아함 불교로부터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현되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불자야,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 모습으로 모든 연기를 본다.’ 연기는 원인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 인식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은 연기로서 존재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연기 속에서 존재하고 이 법당도 연기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정 불변의 실체도 없고,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격이 없고, 목숨도 없는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나 속에 살았는데 나도 없고,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도 아니고, 나는 살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성이 공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성은 스스로의 성격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차별적 개성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성격이 있습니다. 모습, 생각, 이름, 주민번호 등이 자성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법’이라고 합니다. 하나하나의 존재마다 하나하나일 수 있는 성격을 말합니다. 그 법이 공하다는 얘기는 ‘있다, 없다’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라고 하는 생각, 나의 인격이라고 하는 생각, 나의 주관이라고 하는 생각 속에서 구속 되고 속박되어서 어디에서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식전환으로 속박 벗음이 깨달음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좋은 이미지를 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좋은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지요. 그러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고정된 생각, 고정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그 고정된 패턴 속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얼마 전 우연히 넘어져서 목발을 짚게 되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자신이 넘어져서 목발을 짚는다는 사실을 상상한 적도 없습니다. 목발을 짚고 법당에 들어오는 저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모습입니다. 목발을 짚는 것도, 생생하게 두 발로 걷는 것도 하나의 모습입니다. 멀쩡하게 걷다가 절름발이가 되고 절름발이 상태이지만 아마 곧 멀쩡하게 걸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게 됩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인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는 무상하고 오늘의 삶은 오늘로써 끝입니다. 항상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 도전하고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 창의적인 정신을 발휘하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변화되고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로 나 자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잘 보존하고 유지하면 조금 더 쓸 수 있고 유지 보수 관리가 시원찮으면 금방 끝이 납니다.


두 번째, ‘모든 존재하는 갈래의 차별적인 모습들이 소멸되어서 필경에 다 흩어지고 없어진다. 그래서 그 형상 있음이 없는 줄 보면 바로 그 순간에 어떠한 형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탈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지게 된다.’


여러분 어릴 때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자성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하나를 해체해 보니까 그 모든 것들은 사라져 해탈해 있더라, 즉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자유민주주의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상입니다. 과거에는 나만 잘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 살고 보니까 옆이 다 무너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불교인들이 해야 될 역할 중의 하나가 저산소 음식으로 먹거리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50km, 70km안에서 생산된 음식으로 우리의 음식을 해결하자는 것이 저산소 음식 운동입니다.


필리핀에서 바나나가 올 때 까지 수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왔습니다. 미국에서 소고기, 돼지고기가 올 때 수없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왔습니다. 과거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맛있는 음식만 추구하며 살다보면 결국은 공멸한다는 이치를 아는 것이 무상입니다. 이 세상 어떤 모습도 고유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 모습이 사실이 아님을 알 때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인의 두 번째 해탈이 이것입니다. 보이는 현상과 내가 알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때 행복해 집니다.


세 번째를 봅시다. ‘이와 같이 공과 무상에 들어가면 원하고 구하는 것이 없어진다. 그런데 오직 제외되는 것이 있으니 대자비가 나를 이끄는 머리가 되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제외되며 바로 그 때 무원해탈문을 얻게 된다.’


이것은 ‘원하다, 구하다’와는 다릅니다. 원하고 구한다는 것은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돈을 줘야 하고 자식은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되지요. 의존심 때문입니다. ‘수타니파타’에서는 부처님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합니다.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으라는 노래 가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존을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자비라고 합니다. 원하고 의존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영원’ 없기에 도전 계속해야


이 공과 무상과 무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불교를 믿고 수행을 합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오늘의 나의 삶이 아닌 또 다른 내일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절을 하는 이유는 나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찾는 이유는 나라는 집착을 관세음보살을 통해서 풀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아함에서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강조하신 깨달음의 유형입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말을 한 가지 더 언급하겠습니다. ‘경계, 즉 눈앞에 펼쳐진 대상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또한 변화와 같은 줄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만약 모든 보살들이 능히 이와 같이 보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가 되면 모든 경계 가운데 좋다, 나쁘다와 같은 두 가지의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 견해가 생기지 않고 생각이 멈춰지면 일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순간 바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짐을 얻는다.’


인류의 모든 문화는 생각의 문화입니다. 하지만 오직 불교만이 생각을 멈추라고 합니다.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다 보면 생각이 멈춰집니다. 열심히 절하다 보면 생각이 멈춰집니다. 열심히 경전을 읽다 보면 생각이 멈춰집니다. 그 생각의 멈춰짐 속에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길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근본의 마음이 발현되는 바로 그 순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별, 망상이 떨어지니까 우리의 마음이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자비와 지혜와 원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발현되어서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아서 육신으로부터 지혜의 몸으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절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는 모든 목적과 당위성은 바로 이 공, 무상, 무원을 얻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정진을 해 나간다면 반드시 해탈의 문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우진 스님이 3월4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출가 열반절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릴레이 초청법회 다섯 번 째 법석에서 설한 내용입니다.

 


우진 스님

1980년 종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80년 사미계, 91년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98년 종범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통도사 강주를 역임하고 현재 통도사 서축암 감원으로 주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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