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령한 돌
5. 신령한 돌
  • 김상현 교수
  • 승인 2012.03.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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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신심 돌에 담으니 부처 아닌 것 없다

신령한 돌 이야기 모아
독립된 항목으로 기록


사찰의 창건 설화부터
법문 듣는 불제자까지


돌은 아무 말이 없다. 밟히고 차여도 말이 없다. 그래도 돌은 굳고 단단하며 변함이 없다. 돌도 의미가 있다. 물론 돌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돌과 관련된 여러 설화가 전한다. 돌 이야기를 하나의 독립된 항목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는데,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座石)조의 경우다.


무심한 돌이라도 그 돌에 불상을 새기면, 그 돌은 부처님으로 변한다. 불상이 새겨진 돌은 이미 돌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귀의와 숭배를 받는 부처님인 것이다. 죽령(竹嶺) 동쪽 백 리 가량 되는 상주에 사불산(四佛山)이 있다. 이 산에 진평왕 9년(587)에 갑자기 큰 돌이 하나 나타났는데 사면이 한 길이나 되었다. 사방에 불상(佛像)이 새겨진 돌이 홍색의 비단에 싸인 채 하늘로부터 그 산꼭대기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긴 왕은 그곳에 행차하여 살펴보고 진심으로 공경하여 예배했다. 그리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다고 한다. 설화를 사실로 확인할 수야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산꼭대기에 솟아 있는 바위, 그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겨 사방불(四方佛)을 조성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불사였겠는가. 산꼭대기에 우뚝 선 사방불,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운석이 성스럽게 여겨졌듯이, 이 돌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설화로 해서 더욱 성스럽게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누가 돌을 보고 무심하다고 하는가? 돌이야 무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돌은 견고하다. 그러기에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함없는 맹서를 단단한 돌에 새긴 경우도 있었다. 진평왕 34년(612)으로 추정되는 임신년 어느 여름날,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두 청년이 그들의 희망과 맹세를 돌에 새겨 남겼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고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서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忠道)를 지켜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맹서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3년 전인) 신미년 7월 22일에 맹서했다. 시경·상서·예기·춘추·좌전 등을 차례로 3년에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


이상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의 맹서다. 젊은이의 맹서가 새겨진 돌은 냇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돌이다. 그러나 젊은 날의 굳은 맹서를 새긴 이 돌은 1400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남아서 신라 젊은이의 빛나는 희망과 맹서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는 신령한 땅이 네 곳에 있었다.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亐知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 등이 네 영지(靈地)였다.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서 모의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을 정도로 신령한 곳이었다. 네 영지 중의 하나였던 남산의 오지암에서 진덕여왕(647~654) 때의 대신들인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 등이 모여서 나라 일을 의논했던 적이 있다. 이처럼 신라의 대신들이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던 오지암은 역사적 명소였던 것이다.


신라 왕성에는 움직일 수 없는 돌 다섯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성중오부동석(城中五不動石)이라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내제석궁(內帝釋宮)의 섬돌이었다. 진평왕은 579년 8월에 왕위에 올랐다.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왕이 내제석궁에 행차하면서 섬돌을 밟았을 때,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은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에게 일렀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에게 보여라.”
이렇게 진평왕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고, 그 힘은 곧 왕권과도 직결되었다. 11척의 신장은 매우 큰 것이었고, 그러기에 돌계단도 부러질 만했으리라. 일연은 이렇게 읊었다.
“우리 임금님 이로부터 몸 무거우니 다음에는 쇠로 섬돌 만들어야 하리라.”

 


무심한 돌멩이라도
의미 담으면 ‘법신’


변함없는 돌의 속성
견고한 신심의 상징

 

진평왕은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무려 53년이나. 안압지 남쪽 논 가운데 천주사의 부동석이라고 하는 큰 바위가 1945년 이전까지는 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압지 주변 정리 때에 없어졌다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신라 왕경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고 전했는데, 그 중의 하나였던 황룡사에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전하고 있어서 더욱 주목되었다. 가섭불은 과거불이다. 그리고 연좌(宴坐)란 좌선을 의미한다. 그 먼 옛날, 현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기도 전에, 가섭불은 이 돌에 앉아서 참선에 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라 땅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불교와 인연을 깊이 했던 불연국토(佛緣國土)라고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은 황룡사를 방문하여 가섭불연좌석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연좌석은 법당 뒤에 있었고, 높이는 5~6자가 되고, 둘레는 세 아름 정도로 우뚝 서 있는데 위는 평평했다고 한다. 진흥왕 14년(553)에 황룡사가 창건된 뒤로 이 절은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이 연좌석에는 갈라진 곳이 있었는데, 여기에 쇠를 붙여 보호하고 있었다. 그 후 몽고 병에 의해 황룡사가 불탈 때, 이 돌도 파묻혀 지면처럼 평평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돌아가자 그 장례는 유언에 따라 화장했고 남은 유해는 가루 내어 동해 푸른 바다에 뿌렸다. 이 사실은 “섶을 쌓아 장사지내고… 분골경진(粉骨鯨津)했다”는 문무왕비명의 구절로 알 수 있다 . 경진(鯨津)은 고래가 사는 큰 바다를 의미한다. 분골은 남은 유해를 가루낸다는 말이다. 아마도 남은 한 줌의 재는 저 동해 푸른 바다에 흩어서 장사지냈다는 뜻인 듯하다. 산골(散骨)의 장례의식은 동해 속의 큰 바위에서 행했는데, 이 인연으로 해서 이 바위는 대왕암(大王岩)이라 불리게 되고, 그곳은 오래 기념할만한 성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고구려에도 신령스러운 돌이 있었다. 동부여왕 부루에게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後嗣)를 구하였는데,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대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했더니 거기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
이에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이렇게 곤연 가에 있던 큰 돌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감추고 있었고, 말은 이 돌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성에는 영석(靈石)이 하나 전해지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했는데, 대개 옛날에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현(朝見)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돌을 타고 상제에게 오고갔다는 신화적 존재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돌은 조천석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에서 초청되어 온 도사(道士)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며 진압할 때, 이 영석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백제에도 전설을 간직한 여러 돌이 있었다. 백제의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 후보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봉해서 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이 바위를 정사암이라고 했던 것이다. 또 사비수 언덕에 바위 하나가 있어 10여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왕이 흥왕사에 가서 부처님에게 예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이 돌에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석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비수 가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고기와 용을 낚았기에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곳이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했다. 훗날 타사암은 백제의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흔히 낙화암(落花巖)으로 불렸다. 승전(勝詮)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현수국사(賢首國師) 법장(法藏, 643~712)의 강석(講席)에서 화엄(華嚴)을 수업했다. 귀국할 때 법장의 여러 저서를 필사하여 법장의 서신과 함께 의상에게 전했다. 대개 의상이 귀국한 20년 후인 692년경이었다. 승전은 갈항사(葛項寺)를 짓고 돌멩이를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을 강의했다. 경북 금릉군 남면 오봉리 금오산 서쪽 기슭에 이 절터가 있다. 그 돌멩이 80여개는 고려후기까지도 전하고 있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이 돌 몇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 돌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했던 예는 중국에도 있었다. 동진의 도생(道生, 355~434)은 평강(平江)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돌을 모아 청중으로 삼고 ‘열반경’을 강설하면서 천제(闡提)도 성불한다고 하자 여러 돌이 머리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도생의 일천재성불론(一闡提成佛論)은 유명하다.


▲김상현 교수
“티끌 하나 모기 한 마리도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원래 한 몸이다.”


의상의 가르침을 계승했던 8세기 중엽의 신림(神琳)의 법문이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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