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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조건만 채우는 삶엔 참행복 깃들지 못해

 

▲지환 스님

 

 

인간은 누구나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고자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는 서양의 사상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행복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행복은 절대적인 참 행복과 상대적인 거짓행복, 이렇게 두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참다운 행복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참다운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참마음의 속성이 참다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표층의식인 겉마음이 참마음 그 자체와 완전히 하나로 통할 때만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말로 말해봤자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주 맛있는 어떤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채 그 음식 맛에 대해 말로 설명을 들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나 맑고 순수한 청정함이며 항상 밝고 밝은 대 지혜, 참 사랑,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 자유와 절대평화, 언제나 고요한 대 삼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참 마음 상태입니다. 이러한 참마음의 상태가 참다운 행복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참마음의 상태가 참다운 행복세계라고 알 수 있는 힌트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마음이 맑고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 행복하지요!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행복하지요! 순수하게 사랑할 때 행복하지요!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울 때 행복하고, 평화로울 때 행복하며 맑고 고요할 때 행복하고, 밝고 지혜로울 때 행복하며, 자비심으로 사랑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이상의 몇 가지 힌트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마음의 상태에 가까울수록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힌트에서 알아차린다면 참다운 행복이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행복은 바로 참마음의 상태, 참마음의 내용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참마음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참다운 행복은 ‘지금·여기’에 항상하다는 사실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분일초 일찰라라도 공성의 참마음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인 거짓행복은 무엇일까요? 거짓행복이란 내가 원하는 어떤 조건이 충족될 때,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만족감입니다. 그렇게 바라는 것이 충족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불만족 즉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얽매임 없이 자유로울 때 행복


자기가 원하는 것이 또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만족감 즉 거짓행복을 느끼지만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또다시 뭔가를 원하는 욕망의 마음과 안 맞을 때는 싫어하는 진심(嗔心)의 마음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의 마음과 진심의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참다운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참마음의 내용인 참다운 행복의 흐름이 삶의 본래 모습이라고 말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잠깐 말한 바 있습니다만 이제 좀 더 자세히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기특하고도 기특하구나.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덕상을 다 갖추고 있건만 분별망상으로 인하여 증득치 못함이로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부처님의 삶, 완전한 행복의 삶인데 분별망상 즉 번뇌 때문에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분별망상 즉 번뇌 때문입니다. 탐욕, 애착, 집착 등의 탐심작용과 짜증, 스트레스, 싫어함, 미움, 원망, 분노 등의 진심작용이 참다운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이런 탐심작용과 진심작용의 번뇌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똘똘 뭉쳐 한마디로 말하자면 결국 이 ‘나’ 때문이에요. ‘참 나’를 모르고 내가 알고 있는 이 몸 이 마음을 ‘나’라 여기는, ‘이 놈’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수 없는 탐심작용의 번뇌와 수 없는 진심작용의 번뇌가 일어나 참다운 행복을 방해하고 있어서 우리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무명과 무명의 자손인 탐심의 번뇌작용과 진심의 번뇌작용 때문인데 무명이란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공 한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의 속성도 공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성인 참마음의 참다운 행복의 흐름 속에서 번뇌에게 속고 번뇌에게 빼앗기고 있을 뿐 번뇌가 공 한 줄 알고 알아차리면 지금 여기서 참다운 행복의 흐름을 보게 되고 참다운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부적인 조건충족만으로는 참다운 행복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아까 말한 거짓행복 즉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만족감, 행복감은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고 더 좋은 조건,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원합니다. 결국 거짓행복에 속으며 행복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부처님, 깨달은 모든 분들이 한결같이 다 말씀하셨지요. 서양의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위와 같은 거짓행복에 속는 삶의 방식을 소유양식의 삶이라고 말하면서 소유양식의 삶으로는 인간은 결코 참다운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단언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충족에서 찾는 거짓행복에 속아 끝없이 갈망하며 만족을 모르고 거짓행복을 추구하는 소유양식의 삶으로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가치관이 확실하게 서야 합니다.


둘째, 참다운 행복이 참마음의 내용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는데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참 행복은 곧 참 마음의 내용이란 것을 알았으면 참 마음의 속성인 참 행복이 나의 삶속에서 꽃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삶속에서 행복의 꽃이 필 수 있는, 참 행복이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참 마음속에 있는 참 행복의 ‘인(因)’이 나의 노력의 ‘연(緣)’을 만나 행복한 삶이란 ‘과(果)’가 실현되도록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을 마음의 닦음, 수행이라고 말하는데 이 마음 닦음, 수행을 꾸준하게 열심히 하면 한만큼 참 행복은 나타납니다.


그러면 나의 삶 속에서 참 행복이 꽃필 수 있도록 어떠한 마음 닦음이 필요한지, 어떻게 수행해야 되는가에 대해 요약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 참 마음의 참 행복은 번뇌가 쉰 상태 즉 번뇌의 뿌리인 에고가 없는 상태이므로 에고가 없는 상태, 번뇌가 쉰 상태가 되도록 일념으로 ‘기도’ 또는 ‘참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일념으로 기도할 때 그 때 행복한 순간을 만나지요! 아침저녁 30분씩이라도 집중해서 일념이 되도록 ‘기도’ 또는 ‘참선’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우며 살아야 번뇌 뿌리 잘려


또 하나는 내 마음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비우고 살자는 것입니다. 번뇌의 뿌리인 ‘무명’이 실체가 없고 ‘공’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번뇌는 실은 ‘공’한 것이니까 그 번뇌가 공한 줄 알면 그 순간은 참 행복을 방해한 번뇌가 사라지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의 삶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착, 집착, 미움, 원망, 시기 등 번뇌의 보따리를 부처님께 몽땅 갖다 바쳐 비워 버리고 놓아버리라는 것입니다. 놓아버리면 놓아버린 만큼 행복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마음의 긍정적인 요소를 발현하여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마음은 절대긍정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참마음은 대지혜, 참사랑, 대자유, 절대평화, 한없는 덕성, 큰 능력이 본래 갖추어진 그런 절대긍정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절대긍정인 참마음의 내용대로 긍정적인 삶을 살면 긍정적인 면이 절대긍정의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참 마음의 내용인 참 행복이 나타나 행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참마음의 긍정적인 내용인 감사한 마음, 평화스런 마음, 사랑의 마음, 밝은 마음으로 살자 이것입니다.


마음도 항상 그렇게 갖고 표정도 항상 그렇게 짓고 말도 긍정의 언어 따뜻하고 사랑스런 애어 이런 말을 하고 행동도 그렇게 감사, 사랑, 자비행을 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체험해 본 사람이면 다 느낍니다.


헤르만 헷세는 ‘행복해진다는 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다른 아무것도 없다네/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지…”

그런데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행복하라는 의무뿐 아니라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 순간순간 행복의 원리에 맞춰 그냥 행복하게 살자.”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광주·전남지사 조영훈 지사장

 

이 법문은 3월7일 봉행된 증심사 명사초청법회에서 지환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지환 스님

1967년 해인사서 출가, 1969년 광덕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백양사, 운문암, 범어사, 쌍계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지리산 쌍계사 금당선원장을 맡았으며 현재 조계종 기본선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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