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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마라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없는 삼매는 혼침이나 무기공
허공같은 상태를 삼매로 착각 안돼

 

▲나무로 조성된 임제 스님의 상이 모셔져 있는 법유당. 법의 젖, 또는 법이 흐르는 대지라는 의미다.

 

 

上堂 僧問, 如何是劍刃上事오 師云, 禍事禍事로다 僧이 擬議한대 師便打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 위의 일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칼날은 반야, 혹은 지혜를 말합니다. 번뇌와 망상을 베어버리는 지혜의 칼날입니다. 말 그대로 반야(般若)의 검(劍)입니다. 검인상사(劍刃上事), 즉 칼날 위의 일은 사량과 분별이 모두 떨어져 나간 경지를 뜻합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검인상사를 물어오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 절대의 경지는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말로 또 다시 물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는 ‘위험하다’고 일깨우고 있습니다. 말하는 순간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말 밖의 뜻을, 글 밖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량과 분별 속에서 묻고 또 묻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위험하다고 일러주고 있는데도 그 스님은 이해를 못합니다. 이에 임제 스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후려치는 것으로 생각의 실타래를 끊어버립니다. 검인상사를 수행자의 자세로 봐도 좋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칼날 위에 있는 것처럼 치열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수행자의 의식이 흐릿해진다면 수행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問, 祇如石室行者가 踏碓忘却移脚은 向什麽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해석) 어떤 스님이 물었다. “석실행자가 방아를 찧을 적에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니 어디로 향해 갔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깊은 샘 속에 빠져버렸다.”


강의) 석실행자(石室行者)는 청원행사(靑原行思) 스님의 4대손인 석실선도(石室善道) 스님을 말합니다. 석실행자가 살았던 시기는 도교를 신봉했던 당나라 무종이 불교를 박해하고 훼불(毁佛)을 자행하던 불행한 시절이었습니다. 무종은 각 지역의 절들을 다 헐어버리고 스님들을 모두 강제로 환속을 시켜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석실 스님은 가사를 입지 못하고 속복을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석실스님이라 하지 않고 석실행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석실행자는 디딜방아 찧는 일을 했습니다. 디딜방아는 한발로 찧으면 힘이 들기 때문에 오래 찧기 위해서는 양발을 번갈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석실행자는 다리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한 발로 방아를 찧었다고 합니다. 방아삼매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임제 스님은 깊은 샘 속에 빠진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샘 속에 빠진 것처럼 의식이 완전히 탈각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매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혜의 작용이 사라진 삼매는 혼침(昏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 무기공(無記空)이라고도 합니다. 몸과 감각이 다 사라진, 허공과 같은 상태가 삼매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더라도 명징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또렷해져야 합니다. 이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합니다. 그냥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삼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매는 지혜와 함께 발현돼야 합니다.


師乃云, 但有來者하면 不虧欠伊하야 總識伊來處로라 若與麽來하면 恰似失却이요 不與麽來하면 無繩自縛이니 一切時中에 莫亂斟酌하라 會與不會에 都來是錯이라 分明與麽道하야 一任天下人貶剝하노라 久立珍重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이어서 말했다. “나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느 경지를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만약 그와 같이 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새끼줄이 없이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설프게 짐작하고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도 모두 착각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해도 그냥 맡기도록 하겠다. 오래 서 있느라 고생들 했다. 돌아가 쉬어라.”


강의) ‘만약 그와 같이 온다면’으로 해석된 여마(與麽)는 순수하게, 여여(如如)하게 이런 뜻입니다. 석실 행자처럼 무심한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이나 지혜가 없는 그런 상태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실각(失却),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임제 스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또 만약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를 얽어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주관이나 견해가 뚜렷하면, 그 견해에 사로잡혀 스스로에게 멍에를 씌운다는 뜻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무심도 틀렸지만, 견해도 틀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삼매 속에 있되 성성한 지혜가 작용해야 됩니다. 지혜 없이 스승의 말씀만 좇아서도 안 되고, 반야 없이 자기주장만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그럼으로 안다거나 모른다라는 분별이 모두 잘못된 것이며 착각입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전혀 개의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결코 옮은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평가에 흔들리지 말고 오롯하게 자신의 길을 가라는 가르침입니다.


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했다. “한 사람은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있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사거리에 있어 앞뒤 구분이 없다. 어떤 사람이 앞서고 어떤 사람이 뒤쳐진 것인가. 한사람은 유마힐이고, 한사람은 부대사라 말하지 마라. 법문 듣느라 수고했다.


강의) 고봉정상(高峰頂上)은 수행의 궁극적 경지입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습니다. 또 십자가로(十字街路)는 사거리, 저잣거리를 말합니다. 즉 중생이 살고 있는 세속적 차별의 현장입니다. 저잣거리는 사방으로 터져 있기 때문에 앞뒤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원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절대경지에 들어간 사람과 저잣거리에서 대중들과 함께 살면서도 분별에 빠지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훌륭한 경지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유마거사는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석가모니 재세 당시 문수보살에게 침묵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하신 분입니다. 또 부대사(傅大士·497~569)는 중국 양나라 때 사람으로 중생들을 위해 끊임없이 설법을 하신 분입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앞은 유마거사고 뒤는 부대사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마거사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니, 역설적이게 유마거사와 부대사를 닮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모두 고봉정상에 있으면서도 또한 십자가로에 계셨던 분들입니다. 절대경지에 있으면서도 평생을 중생들과 함께 하신 분들입니다. 사람들은 진여와 현상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여와 현상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인 이치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上堂 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되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離家舍호되 不在途中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해석)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길에 있으면서도 자기 집을 떠나지 않고, 또 한 사람은 집을 떠났지만 길에 머물러 있지 않다. 만약 이렇다면 어느 쪽이 인천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이렇게 말하고 법상에서 내려왔다.


강의) 가사(家舍)는 깨달음의 세계, 절대 경지를 말합니다. 도중(途中)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한 사람은 수행하는 과정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절대적인 경지에 들어있고, 또 한 사람은 깨달음의 절대적인 경지를 떠나 있지만 또한 과정에 있지도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약 깨달았다고 한다면 깨닫고 난 다음 무엇이 있을까요. 돈온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돈오점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깨닫고 난 다음에는 완성으로 가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과정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경지에서 떠나지 않고, 깨달음의 경지를 떠나 있지만 또한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다는 생각, 과정에 있다는 인식마저 사라져야 합니다. 또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보자면 개인적인 깨달음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중생교화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임제 스님께서는 이 두 사람 중 누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길이 바로 부처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이 가아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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