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동물적 무지와 성욕구를 특징으로 하는 축생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축생의 마인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선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축생계의 주된 특징을 성욕구로 본 마크 엡스타인의 견해를 살펴보자. 프로이드는 인간이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를 극복하고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형시켜 나아가는 것을 ‘승화’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성욕과 같은 괘락적인 감각은 결코 충족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으로도 인간의 동물적 속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욕망은 강제로 억압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져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엡스타인은 불교와 정신분석이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이해하고 다루는 일에 근본적으로 그 견해를 같이 한다고 보았다. 즉 인간이 자신의 성적 욕망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병이 되지만 그렇다고 필요이상으로 억압하고 죄악시하는 것 또한 병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성욕구를 금기시하는 종교적 전통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인들이 성욕구를 억지로 무리하게 억압해야만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동물성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게 되어 영적성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그 예로서 들었다.
사실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성행위의 유무만을 근거로 공연히 존경할 것도 손가락질 할 것도 아니다. 성에 대한 욕구는 누구나 일정기간은 겪어야만 되고 또 어떤 형태로든지 극복해가야만 되는 생의 과제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개인의 성장경험과 인격에 따라서 좀 더 현명하게, 또는 그 반대로 겪어간다. 그런데 독신생활을 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동물적 속성을 좀 더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극복해 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신의 종교지도자 또한 자신과 똑같은 성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축생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성욕구는 누구든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다지 병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우리들의 다른 욕망들-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좌절감과 스트레스가 성욕구를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순수하게 성욕구 자체가 일차적 욕망으로 작용하지 않고 다른 욕망들과 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욕구와 관련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정말로 중요한 과제는 그것이 우리의 인간관계, 특히 사랑의 관계,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지고 왜곡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나친 성욕구나 억압은 아동기의 애정결핍이나 좌절감, 스트레스, 또는 분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분별한 성욕구의 표출이나, 무조건 무시하거나 억압함으로서 회피하거나, 정면으로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물론 수용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욕구충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한다는 의미는 순간순간 우리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성욕구에 대해 정서적으로 열려 있고, 있는 그대로의 감각, 감정, 사고를 알아차림으로서 의식적인 선택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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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교수 seogwang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