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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화공주

고통받는 중생 구제할 미륵불 하생의 상징

신라 진평왕 미모의 셋째 딸
‘서동요’확산에 궁궐서 쫓겨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고개를 떨군 선화공주에게 부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귀족들이 추천한 배필감을 잇따라 퇴짜 놓고 결혼할 사람을 직접 고르겠다고 큰소리쳤던 것이 이런 화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사실이 아님을 아무리 강변해도 공주에 대한 부왕의 오해는 풀어질 기미 없이 분노만 더할 뿐이다. 왕은 결국 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리기에 이른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뛰어난 미색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번 사태는 어이없게도 궁궐 밖 아이들이 부르고 놀던 짧은 동요 하나에서 불거졌다. 그 내용이 바로 공주에 관한 추문이었던 것.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맛둥(薯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가 남몰래 정을 통한 사내가 있어 밤마다 그를 찾는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서동요’라는 이름을 달고 신라 전역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조신해야 할 왕실의 여인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고 있다니, 청천벽력 같은 내용을 접한 왕이 분노한 것도 당연했다.


처음엔 금지옥엽으로 길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딸이 추문의 주인공이 된데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급속도로 확산되는 소문과 함께 어느 순간 ‘아니땐 굴뚤에 연기 나랴’식의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결국 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선화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쫓기에 이른다. 공주 입장에서는 노래 한곡으로 오해를 사 궁궐을 떠나게 됐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동요의 출처는 ‘서동’이라는 한 사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스님의 행색을 하고 마을에 나타났다. 그리고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직접 캔 마를 나눠주며 호감을 사더니 짧은 노래하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로 선화공주의 귀양에 결정적 계기가 된 ‘서동요’였다. 모든 것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한 서동의 치밀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선화공주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범벅된 채 홀로 궁궐밖을 나섰다. 어머니가 몰래 챙겨준 금덩이 하나가 든 보따리를 품에 안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생 궁궐 안에서만 살았던 공주에게 세상은 두렵고 생소하기만 했다.


그때 서동이 나섰다. 그는 선화공주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를 보필하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선화공주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 궁궐 밖 길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선화공주에겐 그의 존재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듬직하고 신뢰가 갔다. 공주는 그가 바로 ‘서동요’를 지어 유포한 당사자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기쁜 마음으로 그의 청을 수락했다. 신뢰를 얻은 그는 계획대로 국경을 넘어 백제로 공주를 인도했다. 험난한 여정 속에서 핑크빛 사랑이 싹튼 것은 당연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서동의 집에는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밭 한켠에 켜켜히 쌓인 황금이 선화공주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깜짝 놀란 선화공주는 황금의 가치를 서동에게 알리고 고승의 신통력을 빌려 신라의 아버지에게 황금을 보낸다. 이에 진평왕도 마음을 열고 서동을 사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후에 서동은 백제왕으로 즉위해 무왕이 된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 수록된 서동요 설화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이 설화는 사실 역사적인 기록과는 괴리감이 크다.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6~7세기 상황에서 신라 진평왕의 딸이 백제왕비가 된다는 설정 자체가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럼에도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합을 담은 설화는 당시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선 두 남녀의 로맨스는 곧 두 나라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 올 것이란 희망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종식과 안정된 삶은 당시 사람들에게 더없이 강한 열망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고통 받던 민초들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에 작은 미소를 나눴으리라.


더욱이 이 설화가 “무왕이 된 서동과 선화공주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옛날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익산 미륵사가 창건됨에 따라 이야기는 사찰 창건 설화로 이어진다.


미륵사는 지금 터만 남은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백제사찰 가운데 최대규모로 과거 융성했던 백제불교의 흔적을 되짚을 수 있는 유적지다. 때문에 미륵사 창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설화에 투영됨에 따라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미륵사 창건 발원자로 기록
봉안기 발굴 후 허구 논란도


‘삼국유사’ 서동요 설화에 나타난 미륵사 창건설화는 다음과 같다.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왕 부부는 수레를 멈추고 존경의 예를 갖췄고, 이어 왕비가 무왕에게 “이 곳에 큰 사찰을 창건해 미륵 부처님의 뜻을 널리 홍포하고자 발원하니 이를 허락해달라”고 청을 올렸다고 한다. 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땅이 아닌 못이라 이를 메울 일이 걱정이었다. 이때 사자사 지명 스님이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어 사찰터를 다졌고, 미륵 삼상과 회전(會殿),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운 뒤 미륵사라 했다고 한다.”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함은 곧 미륵불, 즉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 부처님의 화현을 의미한다.


미륵사 창건을 발원하고 연못을 메워 미륵삼상(彌勒三象)과 회전,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운 것은 ‘용화삼회 설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용화삼회 설법이란 미륵보살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뒤 뭇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행하는 3회의 설법이다.


즉 미륵사의 창건은 그 자체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미륵부처님의 하생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설화적 인물인 선화공주가 정말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주체일까?


미륵사 창건과 관련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사실여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반박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대체로 설화적 요소는 있지만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발원자임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이해됐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에서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 새로운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4년 전,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193자로 이뤄진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굴됐다. 이에 따라 역사학계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봉안기에 미륵사 창건 발원자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선화공주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봉안기에는 창건발원자가 ‘좌평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돼 있었다. 봉안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상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인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무왕 40년, 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미륵사 창건발원자인 무왕의 아내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진 것이다.


새로운 인물 사택적덕의 딸이 등장하면서 선화공주와 서동요 설화는 전반적인 허구성 논란에 부딪히게 됐다. 무왕의 아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면 후에 백제 무왕이 될 서동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의 로맨스가 허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선화공주의 실체와 서동요 설화의 허구성 논란이 재점화 됐다.


 설화에 나타난 선화공주는 과연 누구인가. 선화공주는 봉안기의 기록에 따라 사택적덕의 딸일 수도 있고, 설화에 나타난 대로 진평왕의 셋째 딸이거나 아니면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선화공주가 사택적덕의 딸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출신성분의 차이부터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이고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로 출신국가와 신분이 모두 다르다.


물론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녀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면 선덕여왕의 여동생이 되므로 두 국가간 사이를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설화 속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선화공주는 전쟁의 종식과 미륵부처님의 화현을 꿈꾸는 민중들의 간절한 희망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일 지도 모른다.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때로는 진실보다 설화가 전해주는 픽션이 더욱 절절한 법이기 때문이다.


미륵불은 57억년 이후 말법시대에 출현할 미래불이라고 한다. 미륵 부처님은 말법 세상을 정법으로 구현하며 어려운 가운데 희망이 도래함을 상징한다. 특히 백제는 660년 신라에 편입되면서 망국의 비애까지 더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희망을 향한 백제민들의 발원을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에게 미륵사가 전하는 상징적 의미는 결코 적지 않았다. 미륵부처님의 화현으로 창건됐다는 미륵사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의지처였을 것임은 쉽게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미륵사를 바라보며 미륵불이 다시 하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을 법도 하다.


“원하옵건대. 왕후께서 마음은 수경 같아서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를 영원토록 다함께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발원문에는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과 기대가 듬뿍 담겼다. 어쩌면 백제민들은 자애롭고 덕높은 무왕의 왕비를 깊이 존경하여, 선화공주라는 설화적 인물로 재창조한 것이 아닐까. 실존인물인 왕비를 가깝고도 먼나라인 신라의 공주로 설정해 한층 더 재미를 살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첨가했을 지도 모른다.


서동요 설화가 7세기 통일직후가 아니라, 세월이 흐른 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지역간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설화 속 선화공주는 신라에서 서동을 따라 적대국이었던 백제로 넘어와 전쟁을 종식시킨 보살이자, 미륵사 창건을 발원해 미륵부처님의 화현을 이끌어낸 선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라에 대한 과거 백제민들의 가슴에 남은 앙금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로맨스에 기대어 일종의 동질감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미륵사의 창건발원자가 사택적덕의 딸이든 선화공주이든, 분명한 점은 이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보살이었다는 사실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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