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각화사 주지 혜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자비가 바로 부처 믿음은 용기와 결단이다

 

▲혜담 스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비롯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큰 일이 많았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스님들까지 무기를 잡고 민족을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국난은 단순한 나라의 위기가 아닌 민중들의 고통과 역경이었습니다. 이런 역경과 시련이 가득한 상황을 당해 우리 조상들은 과연 어떻게 했던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우리 민족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했습니다. 3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불사를 했습니다. 혹자는 외세가 밀려와서 어려울 때 칼을 만들고 화살을 만들어야지 왜 대장경을 만들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주변에 생기는 어려움, 역경, 시련은 누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밖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너희들은 전쟁을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업입니다.


모든 고난과 시련은 공업 결과


물론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의 허물이 있고, 같은 민족이면서 6·25라는 동족상잔을 부른 당사자의 허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민족, 당시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업력이 그런 상황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자세가 그런 어려움을 불러온 것이고, 이것은 사실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이 당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업을 불러왔다 할 수 있습니다.이 어려움이 내가 불러들인 것이라면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 중생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중생심을 없앤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없고 모두가 성취돼 있는 상태이니 부처님과 같은 그 상태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몽골 침입 당시 화살도 만들고 칼들 만들어 싸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2500년 전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부처라고 가르친 그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속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다고 했을 때 그 부처님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자비와 지혜는 부처님을 떠받치는 두 기둥입니다. 자비가 곧 지혜이고 지혜가 곧 부처님입니다. 위신력 그 자체입니다. 인격적인 대상이 아닌 지혜와 자비, 그리고 위신력 그대로 곧 부처님입니다. 감각과 인식, 지식과 생각으로 알아지는 인격적인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유로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자비로서의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각, 인식을 벗어나 있는 부처님은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마치 허공처럼 생긴 지혜와 자비를 부처님이라 느끼고 믿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을 믿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용기와 결단.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조성할 때 우리 조상들은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 본래 지혜인 부처님, 본래 역경과 시련이 없는 그 부처님을 믿고 온 국민들이 일심으로 단합해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것입니다. 그 말씀을 새기며 국난을 극복한 것입니다.


만물이 부처로 보일 때 참 행복


이렇게 용기와 결단을 내어 부처님을 믿기로 했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첫째는 대립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대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삼라만상에는 대립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시기하고 질투하며 대립합니다. 꽃이 다른 꽃을, 나무가 다른 나무를, 짐승이 다른 짐승을, 낙동강이 한강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이웃과 대립하고, 부모와 형제와 대립하고 부모와 자식 간이 대립하고 다툽니다. 이 모든 대립심이 사라진 마음속에서 믿음은 싹트기 시작합니다.그 다음으로는 베푸는 마음이 우선돼야 합니다. 부처님 자체가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줍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한강이 편안히 흘러감으로써 나에게 넉넉함을 주고 바람이 불어서 시원함을 줍니다. 자연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주고 있습니다. 꽃은 피어서 꿀을 벌이나 나비에게 주고, 성장하고, 죽으면 거름이 됩니다. 모든 생명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살리고 있습니다. 내 몸, 또는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한없이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입니다. 기쁨의 마음, 자비심입니다. 자연이 주는 이 자비를 느끼고 온 천지에 자비가 가득함을 느끼게 될 때, 스스로가 또한 그렇게 돼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불교를 아무리 믿어도 부처님의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을 믿어야겠다고 했으면 이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님에게 가까워지는 최초의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열정과 성의입니다. 어려움 극복을 위해 부처님을 찾는다면, 부처님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열정과 성의가 있어야 합니다. 법회 때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염송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활화됐을 때 역경과 시련이 사라집니다. 시간이 없습니까.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됩니다. 그 시간이 염불하는 시간입니다. 잠을 줄이겠다는 열정과 성의가 바로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바라는 모든 소망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철두철미한 믿음입니다. 단 내 소망은 착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다른 존재를 해코지 하는 소망이 아닌 모든 존재를 살리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이건 안 될꺼야’라는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상식과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존재입니다. 반드시 이뤄진다는 굳센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주변은 점점 변해갑니다. 역경이 순경으로 서서히 바뀝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좋아집니다. 탐욕심을 제거하고 부처님의 생각에 부합했을 때, 모든 것이 이뤄지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극락이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망상,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이라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나는 범부 중생’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곧 망상이며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에 붙어있는 혹과 같아 떼어버리면 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내가 지금 망상에 싸여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욕심을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째는 내 몸이 본래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부정관을 통해 탐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비관, 부처님 자체인 자비심을 갖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존재들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음을 아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분별지관으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있는 것은 부처님뿐이며 부처의 모습이 잠시 지금 보이는 세상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수식관, 숫자를 헤아리는 방법입니다. 수행을 할 때 망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숨을 쉴 때마다 숫자를 놓치지 않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형된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가 염불입니다. 염송을 함으로써 망상이 들지 않도록 하고 망상이 들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일종의 수식관입니다.


열정과 성의 있어야 수행도 가능


이렇게 했을 때 우리 앞에 부처님이 나타납니다. 자비, 위신력, 지혜 자체가 부처님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부처님을 느끼게 됩니다. 삼라만상이 온통 부처로 꽉 차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세상에 잘 태어났다, 날 낳아준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나에게 부처의 품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고, 신록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돈, 권력, 명예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빼앗겼을 때 기쁨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삼라만상에서 기쁨을 느꼈을 때 그것이 참 기쁨이고 세상은 살아갈 만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이고 우리가 부처님 전에 앉아 있는 의미가 됩니다. 아무쪼록 이런 마음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서 모두가 행복하고 기쁜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6월6일 서울 불광사에서 봉행된 호법법회에서 경기도 광주 각화사 주지 혜담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혜담 스님


1969년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군승 10기로 임관, 1980년 해군 대위로 전역했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각화사 주지이며 조계종 재심호계위원이다. ‘대품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번역했으며 ‘반야불교 신행론’, ‘신 반야심경 강의’,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행복을 창조하는 기도’ 등을 출간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