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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선덕 함주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고장난 나침반 들고 어디로 달려 가는가

다른 이에 상처주면 줄수록
정작 황폐해진 건 자기 자신

 

갈등은 분별·불만에서 시작
치유 못하면 흉악범죄 늘어

 

 

▲함주 스님은 “부처님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이 되고, 마구니 마음을 가지면 마구니가 된다”고 강조했다.

 

 

속리산(俗離山)이다. ‘산이 세속을 여의였기에’ 속리산일까, 아니면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 있기에’ 속리산일까?


일반적으로 속리산은 ‘세속을 여읜 산’이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문 문법에 따른다면 ‘세속을 여읜 산’은 ‘이속산(離俗山)’이라 해야 함에도 굳이 ‘속리산’으로 지금까지 이름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조선중기의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 시를 인용한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있네.(山非離俗俗離山)’


이 시가 임제의 시라고 알려진 이유는 지봉(芝峰)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임제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中庸)을 800번 읽고서 시 한 귀절을 얻었다’며 위의 시를 언급하고 ‘이는 중용의 말을 끌어다 쓴 것’이라 했다. 중용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하면(人之爲道而遠人) /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


그렇더라도 임제의 순수한 창작시는 아니다. 첫 구는 이미 중용에서 따온 말이고 뒷 구는 임제보다 앞선 세대에 살았던 금계(錦溪) 황준량의 시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옛 지름길엔 인적이 없어 자줏빛 이끼만 얼룩얼룩하니, 산은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닌데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났네.(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


그렇다면 ‘산비이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이란 시구는 백호 이전부터 구전되어 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저런 상념을 털어버리라는 듯 법주사 경내를 휘돌아 나가는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온다. 법주사 총지선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총지선원은 당대 선지식 금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후학들이 세운 선원이다. 16세에 출가해 28세 때 예산 보덕사에서 보월 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았던 당대 선시식 금오 스님. 경허, 만공, 보월 스님의 가풍을 이은 금오 스님은 엄격한 수행정진을 강조해 ‘호랑이 스님’으로 불리었다. ‘참선하지 않는 자는 중이 아니다.’ ‘선리가 없다면 불법의 명맥이 끊기고 만다.’ 참선을 통한 개오를 주창했던 금오 스님의 선풍을 총지선원은 그대로 이으며 지금도 선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소선당(素禪堂)에 주석하고 있는 법주사 선덕 함주 스님은 총지선원을 지켜 온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1960년 대구 동화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함주 스님은 좀처럼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는다. 대중 법문도 가능하면 사양한다. 50여년을 올곧이 수좌로서의 길만을 걸었다. 함주 스님은 차 한 잔을 내며 은사 금오 스님을 회상했다.


“딱, 호랑이 스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참 자비로운 스님이셨습니다.”


자비로운 금오 스님! 귀가 솔깃해졌다. 함주 스님이 금오 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은사 스님의 손톱을 깎아드리는 도중 그만 손끝 살점을 찝게 되었다. 순간, 엄한 꾸중이 날라 올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손톱 하나에도 정신을 집중 못하는데 화두는 어떻게 들겠느냐!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기에 손톱 하나 제대로 못 깎느냐! 이런 호령이 떨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오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스님,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마저 해.’


“방편은 엄하셨으나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한량없었던 은사이셨습니다.”


차를 또 한 번 낸 스님은 ‘말과 실천은 다른 것’이라 전했다. 무슨 뜻일까? 함주 스님은 다시 금오 스님의 일화를 꺼내 들었다.


“금오 스님은 평소 ‘불법을 배우려면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배워야 한다’ 하시면서 ‘군생(群生)의 이목(耳目)을 열어 주는 선지식의 법문을 듣지 않으면 불법의 종자가 가늘고 약해져 말라 죽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오 스님께서 수월 스님을 찾아 만주까지 가신 연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금오 스님은 세납 40이 가까워졌을 무렵 선지식을 참방하고자 먼 행각에 나섰다. 당시 수월 선사는 만주 봉천에서 산 속에 토굴을 지어놓고 머물렀다. 금오 스님은 이 길에서 두 번이나 봉변을 당했다.


한 번은 출국증이 문제 됐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발을 들여 놓자 순시하던 경비병이 증명서를 제출하라 요구했다. 세간사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금오 스님에게 출국증이 있을 리 만무였다. 스님은 바랑을 뒤져 보았다. 안거증이 있었다. 안거증을 처음 보았을 경비병은 ‘무슨 증명’이냐며 호통 쳤다. 이에 굴하지 않았던 금오 스님은 ‘이것이야말로 국가 인정하는 일급 출입증’이라 당당하게 말했다. 금오 스님의 기세에 눌린 경비병은 말없이 통과시켰다.


수월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1년 동안 받은 금오 스님은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봉천역에서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 여자로부터 뜻하지 않은 도둑 누명을 쓰고 말았던 것. 유치장에 갇힌 금오 스님은 지장보살을 염했다. 일주일이 흐르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와서는 ‘왜 속히 나가지 않느냐?’ 호통쳤다. 깨어나 창살을 제끼니 두 개의 창살이 힘없이 뽑혔다. 금오 스님은 곧바로 감옥에서 탈출했다.


“수월 스님의 말씀 한 마디 들으려 그 먼 길을 떠나셨던 겁니다. 그 한 마디가 생사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으니 가셨던 겁니다. 어떤 말이 오고 갔을까요!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당사자에 미치는 영향이 다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같은 말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세속에 찌든 번뇌를 당장이라도 씻겨낼 듯한 법주사 계곡.

 


법을 구하기 위한 ‘간절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선지식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간절 절자 하나면 소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라고.


“좋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아는 게 정말 많아요. 말 한마디 하면 그 진정성과 핵심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옳으니 그르니 합니다. 아는 건 일단 내려놓고 귀를 열어야 고구정녕한 일언이라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 듣기도 전에 저울질부터 하는 세상입니다.”


함주 스님이 언론은 물론이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마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들을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릇이 비워있어야 계곡물을 담을 수 있는데, 다 찼다고 그릇을 내놓지 않으니 물 한 방울도 못 얻는 격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말 잘하는 사람만 많고 실천하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순간, 소선당을 찾는 ‘내 자신’은 얼마나 간절한지 되뇌어 보았다. 딱히 그 정도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솔직하게 함주 스님을 찾은 연유를 밝힐 뿐이다.


사회가 너무 어둡다. 자살, 살인! ‘여의도 칼부림’을 비롯해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피의자들이 모두 소외·빈곤 계층인데, 체포·처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치유법은 무엇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저 마당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 어떻습니까?” 매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매미는 미소당 문을 열기 훨씬 이전부터 울고 있었을 터인데.


“매미가 울고 있는 것처럼 들리십니까? 저는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맞습니까?” 말문이 막힌다. 운다는 것도 확실치 않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은데 누가 맞다고 어찌 답을 낼 수 있는가.


“여기에 맞고 틀리고는 없습니다. 다만, 운다고 느낀 것을 보니 요즘 심상이 좀 탁하신가 봅니다. 저는 산중에만 있어서인지 노래하는 것으로 들리거든요. 업연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업연(業緣)! 스님은 전생의 업보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어지는 업연을 말하고 있음이다. 굳이 풀이하자면 찰나 전의 업연에 따라 찰나 후의 감정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음이다. 하물며 이 자리에 오기 전 폭행살인 사건만 접했으니 매미 소리가 노래하는 것으로 들릴 리가 없다.
“부처님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이 되고, 마구니 마음을 가지면 마구니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부처님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해지려 노력하면 마음은 순수해집니다. 순수해지면 삼라만상을 바로 보고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열리는 겁니다.”


삼라만상을 바로 본다! 또 다른 의문이 일고 만다. 바로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이다.

“반대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일은 다 상대적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보면 ‘옳은 일’인데 ‘타인’ 입장에서 보면 ‘그른 일’인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여기서 타인의 입장을 외면하고 자기 입장만 고수하면 결국 타인의 허물만 보게 됩니다. 분명한 건 그로 인해 타인도 치명타를 입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황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에게 치명타를 입혔놓고 그 ‘만족감’에 도취되어 있으니 정작 황폐해진 자신은 못 봅니다.”

 

은사 ‘호랑이’ 금오 스님
알고 보면 자비로운 선사

 

진실한 마음부터 갖춰야
세상 바로 보는 안목 생겨


최근 일어 난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스님은 일침을 가했다. 자살률이 최고 수준에 오른 우리 사회는 점점 ‘절망 살인’ ‘다중 살인’ 위험에 노출돼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 일어난 ‘불특정다수 살인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부의 양극화, 취업, 복지 등의 요소들이 조화롭게 이뤄지지 않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치를 비롯한 사회경제 분야 전문가 분들이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허나, 정작 더 중요한 건 우리 자신입니다.”


스님은 한 예를 들었다. 일본의 백은 선사 ‘지옥문 극락문’이다. 한 무사가 백은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극락과 지옥이 있습니까?” “넌 누구냐?” “무사입니다.” “백정 같구나.” “나를 능멸하다니!” 화가 난 무사가 목을 베겠다며 칼을 뽑았다. “지옥문이 열렸구나.” 이에 주춤한 무사는 다시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극락문이 열렸구나.”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극락문은 닫히고 지옥문이 열리며, 탐진치가 가라앉을 때 지옥문은 닫히고 극락문은 열린다’는 일면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착한 마음을 내려고 노력한 사람은 극단의 상황에서도 악한 짓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만 내려 한 사람은 극한 상황이 아님에도 악한 짓을 하려 합니다.”


착한 마음을 내고 악한 마음을 내는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스님은 분별에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너는 많고, 나는 적고, 너는 성공했고, 나는 실패했고, 너는 멋진데, 나는 멋지지 않다. 많다면 얼마나 많고, 적다면 얼마나 적습니까. 많으면 행복하고, 적으면 불행하다는 논리가 사회에 그대로 적용됩니까? 아닌 줄 알면서도 휩싸입니다. 자신의 둘레에 자신을 가두는 꼴입니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내 자신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나침반 바늘이 거꾸로 되어있는데도 제자리에 놓을 생각은 않고 그대로 믿고 달려가니 마주하는 건 벼랑 끝인 겁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함주 스님은 다소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옆 사람을 살펴보라고 당부한다.


“삼라만상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생겨 난 겁니다.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또한 다름이 없지요. 선업이든 악업이든 내가 지은 업은 나에게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의 업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야 합니다. 생명존중의 시작이요 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을 보듬지 않는 한 자살, 살인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줄여야 할 책임’이 있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매미가 또 운다. 아니 노래한다. 아니다. 매미는 자신의 소리를 낼 뿐이다.


속리산. 어쩌면 사람이 이 산을 너무 멀리만 하고 있어 속리산이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속리산이 손짓하는 듯하다. 어서 오라고. 여기서나마 불성을 찾아보라고 말이다. 법주사 계곡 물소리에 귀를 씻고 소선당 문을 열어 보라. 바람 소리를 따라 전해 오는 함주 스님의 일언이 가슴을 울릴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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