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티베트의 귀족(貴族)세계-상

상위 5% 귀족층이 티베트 경제권 장악

 

▲티베트의 귀족은 사회에서 특수한 신분을 영위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가문의 구성원(아들)을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사원의 라마승으로 출가시켰고 지방정부의 대신으로 진입시켰고 같은 귀족집단과의 혼인을 추진하였으며 막대한 토지와 장원 그리고 그에 속한 농노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유학도 보내졌다.

 

 

외관적으로 보면 1951년까지 티베트(서장, 西藏)는 ‘달라이 라마의 왕국’ 혹은 ‘활불의 나라’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한 이유는 다음의 현상 때문이다. 첫째, 티베트에서 출가한 수행승들은 일반적으로 ‘라마승’이라고 불리는데 출가하면 사원에서 수행승의 신분으로 개인적 스승을 모시고 철저한 수행과 계율에 정진하고 티베트불교와 철학(명상)에 집중한다. 일반적으로 18~20년 동안의 공부를 거쳐 최종시험을 통과하면 ‘게시(格西)’라는 불교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는다. 그리고 평생 동안 수행하여 활불(活佛)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이들 사원 소속의 라마승 집단은 근대이전까지 티베트사회에서 신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존귀하게 대접받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티베트는 정교합일 사회

 

티베트는 ‘정교합일’(政敎合一)이 적용되는 즉 정치와 종교가 한 사람의 통치자에 의해서 유지되는 나라였다. 티베트라는 특수한 지리적 인문적 환경 속에서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은 참혹한 생존환경과 자연재해로부터 엄습하는 공포심과 두려움 때문에 하늘과 통(通)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天子) 혹은 법왕(法王)이 필요했는데 이를 고대에는 법왕이 근대에는 달라이 라마가 대임했다. 따라서 신의 왕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티베트의 역사를 관통해보면 티베트는 달라이라마가 주도하는 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달라이라마는 스스로 환생을 주관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종교적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정(政)의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다 방면에서 영향력과 파워를 행사했던 귀족이 더욱 실세였다. ‘귀족의 왕국’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귀족은 티베트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티베트의 귀족사(史)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티베트의 사회계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세기부터 티베트에서는 봉건농노제(封建農奴制)가 시작되었고 13세기부터는 전 지역에 보편화되었다. 티베트 봉건농노제의 특징은 장원(莊園)의 소유, 즉 귀족이 토지의 장악과 농노의 소유가 그 핵심내용이다. 위 도표의 A(39.8%), B(24.4%), C(36.8%)는 각각 황금귀족(달라이라마의 가문), 세속귀족, 불교사원의 토지점유율을 표시한 것인데 전체 토지의 90%를 넘어가고 있다. 이는 티베트 전체인구 중에서 상위 5%의 기득권층이 대부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1년 이전까지 티베트사회는 관가(官家), 세속귀족(貴族), 불교사원의 라마승(활불 포함)등으로 형성된 3대 영주가 정치, 종교,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티베트 전체 인구의 5%에 밖에 안 되는 소수였지만 티베트의 방대한 토지, 목장, 산림, 산천과 주요 목축을 장악하고 있었다. 티베트의 농노는 크게 ‘차파’(差巴), ‘퇴용’(堆穷), ‘낭생’(朗生)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티베트 전체인구의 90%를 초과하고 있었으며 이중 노예 등급으로 다시 분류되는 낭생은 5%의 인구비율을 보였다. 이들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이 없었으며 인신의 자유와 혼인의 문제 또한 자율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의 이러한 처지와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티베트의 역사 속에서 귀족의 세력은 어느 시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일까? 유관자료에 따르면 중원의 원대(元代)시기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된다. 이 시기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정치제도의 중심을 이루는 시기이며 나아가 귀족의 세력이 한참 흥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귀족은 티베트 사회에서 우월한 집단의식이 팽배했으며 각종 혜택을 부여 받던 특수 계층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신들의 지위와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장 시키려하였다. 1751년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활불의 세속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활불의 정치체제에 있어서 귀족세력은 이상적인 정치 파트너가 되었다. 미국의 티베트 연구자 P. Carrasco는 그의 평론『Land and Polity in Tibet』에서 1951년 전 까지 티베트 사회는 외부세계로부터 격절된 봉건(封建)사회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귀족세력은 황교와 그 종파의 종속적인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귀족의 구성 및 조직, 정치참여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귀족들의 흥망이 매우 변화무쌍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토번왕국(600-841)시대의 명문 귀족인 ‘达扎’(aTag-sgra)과 ‘属户’(Cog-ro) 그리고 ‘淋’(mChims)씨 가문 등은 왕국의 붕괴 후에 그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새로운 귀족으로 대체되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황금 귀족

 

▲티베트사회(~1951)의 계층구조.
티베트의 귀족계층은 서구의 귀족계층과는 구별되는데, 티베트 귀족의 고저구분은 영지(領地)의 대소와 관작(官爵)을 통해 획득한 권력과 부(富)의 정도로 세분화 된다. 이와 같은 요소를 근거로 하여 티베트의 귀족계층은 (1)아계(亞谿 yab-gzhis), (2)제본(第本), (3)제본미찰(第本米), (4)미찰(米扎)과 같이 대·중·소·일반 네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중에서 ‘아계’(亞谿)귀족가문은 매우 특수한 귀족집단이었다. 황금(黃金)귀족으로 분류되어온 아계귀족집단은 티베트 귀족집단 중에서도 최고위층 귀족으로 분류된다. 이는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부모와 형제 친인척 집단으로 형성된 가문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사회에서 귀족세력은 매우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실체였다. 도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세속귀족과 황금귀족의 토지장악력은 전체 토지의 65%에 근접한다. 이러한 안정적 재정을 바탕으로 귀족집단은 거주하는 인근 사원과 대형사원의 시주와 사원건축의 재정지원을 통하여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가문의 아들을 사원에 출가시켜 (활불이 되는)공부를 지원하였다. 또한 티베트의 지방정부인 갈하(噶廈)에도 적지 않은 가문의 구성원들을 진출시켜 티베트 정치전반에 관여할 수 있는 인적네트워크도 구축하였다.


티베트 지방정부의 구조는 엄격하게 관료주의 체계이다. 지방정부의 관료는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가 세속귀족으로 구성된 속관(俗官)이고 두 번째가 황교의 승려들로 구성된 승관(僧官)이다. 모든 속관은 일률적으로 귀족집단으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자격은 귀족들만 가질 수 있다. 즉 귀족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티베트 사회의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고대 티베트의 귀족집단은 대략 200여개의 성씨를 가진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가정당 평균 6명의 호구로 계산할 때 전체적으로 1200명의 귀족집단은 기본적으로 티베트 최고의 통치 집단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이는 일반 평민으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생활환경이었다. 귀족집단이 일반 평민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적지 않은 장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귀족도 토지의 소유와 농노의 보유량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귀족이 보유하고 있는 장원은 영지(領地)와 분지(份地)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는 영주가 직접관리 하는 것이고 후자는 농노가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귀족은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경제적 우세와 득세를 바탕으로 갈하(噶廈)내에서 권위와 권력을 점유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티베트 지방정부’ 혹은 ‘봉건농노제’ ‘농노’와 같은 용어는 현재 중국 정부나 학계의 공식적 입장을 나타낼 수 도 있으나 필자 개인의 견해가 반영된 용어는 아님을 밝혀둔다.)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