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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구니에 사로 잡힌다

기자명 법보신문

도 닦는다고 하면 삿된 경계 다투어 일어나
깨달음도 이름일 뿐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

 

▲소림사 경내 입설정 안에 있는 달마스님상.

 

 

道流야 諸方이 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 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가 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하야 言道호대 理行이 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해석) “여러분! 제방에서 말하기를 닦아야 할 도가 있고 깨우쳐야 할 법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법을 깨치고 무슨 도를 닦아야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어떤 물건이 모자란단 말이며 어떤 것을 닦고 보완해야 한다는 것인가? 후대의 못난이들이 잘 모르고 여우와 도깨비 같은 허망한 이들의 말을 믿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여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흔하다.”

 

강의)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는 궁극의 진리 같은 의미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런데 이를 말로 표현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집착해 그것이 도인줄 알고 찾아 헤매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도는 영영 멀어지게 됩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질은 부처입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입니다. 닦아서 얻거나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양의 광명이 곧 나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태양을 닦아서 밝게 만들거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우치고 닦는다는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는 큰 착각입니다. 진리에서 영영 멀어지게 됩니다. 후대의 못난 선승들이 이를 모르고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잘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본래 닦거나 얻을 것이 없이 청정한데 무엇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음 속 부처의 작용에 부족함이 없는데 무엇을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불교를 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장님이 길을 안내하는 격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이 봄에 자주 내리는 가랑비처럼 아주 많습니다. 임제 스님의 장탄식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古人이 云, 路逢達道人이어든 第一莫向道하라 所以로 言호대 若人이 修道하면 道不行이니 萬般邪境이 競頭生이라 智劍이 出來에 無一物하야 明頭未顯暗頭明이로다 所以로 古人이 云, 平常心이 是道라하니라

 

해석)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도를 닦는다고 하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오히려 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앞을 다투어 일어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한 물건도 없으며,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둔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 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고 한 것이다.”

 

강의) 앞서도 말했듯이 도(道)는 말로서 또는 이해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로 듣고 이해로 도를 구하려고 하면 오히려 번뇌(煩惱)와 장애(障碍)만이 무성하게 일어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서 진리를 설명한 이유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도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를 닦겠다고 인위적으로 노력하면 오히려 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자신에게 갖춰져 있는 불성, 지혜의 칼을 드러나기만 하면 모든 경계가 절로 사라집니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둔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두운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불을 켜고 나면 어둠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그대로 밝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국 어둠과 밝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가 되는 것입니다. 평상의 마음 따로 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의 마음이 도인줄 알면 도는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大德아 覓什麽物고 現今目前聽法無依道人이 歷歷地分明하야 未曾欠少하니 儞若欲得與祖佛不別인댄 但如是見이요 不用疑誤니라 儞心心不異를 名之活祖니 心若有異하면 則性相이 別이요 心不異故로 卽性與相不別이니라

 

해석) “대덕이여!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가?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고 있는 어느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은 너무도 역력하고 분명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만약 그대들이 조사와 부처님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기만 하면 된다. 의심하여 그르치지 마라. 그대들의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을 때 이를 살아있는 조사라고 한다. 마음이 만약 변한다면 성품과 모습에 구별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모습이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강의) 다른 곳에서 부처와 조사를 찾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임제 스님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파도가 잠잠해지면 고요하고 깊은 바다의 본질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틈틈이 파도가 일어나고 해일이 일어나지만 본래 파도와 해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연에 따라 잠시 모습을 달리한 것일 뿐입니다. 파도와 해일의 본질은 바다입니다. 우리 또한 항상 번뇌와 망상에 휩싸여 있지만 본래 바탕은 부처이며 자성청정심입니다. 무의도인입니다. 부처가 되고자한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말아야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말의 뜻은 우리의 마음이 순간순간 번뇌에 물들지 않고 항상 본래의 자리에서 일여(一如)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살아있는 조사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지 못해서 경계에 미혹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본성인 성품과 드러난 현상인 모습이 서로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일상의 삶 그대로 불성의 현현이 될 것입니다. 파도가 일더라도 파도 자체에 물들지 않고 바다의 조화임을 알게 된다면 본체로서의 바다와 현상으로서의 파도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다와 파도를 따로 분리해서 집착하게 되면 도에서 영영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問, 如何是心心不異處오 師云, 儞擬問하면 早異了也니 性相이 各分이로다 道流야 莫錯하라 世出世諸法이 皆無自性하며 亦無生性하고 但有空名하야 名字亦空이어늘 儞祇麽認他閑名爲實하니 大錯了也로다 設有라도 皆是依變之境이라 有箇菩提依와 涅槃依와 解脫依와 三身依와 境智依와 菩薩依와 佛依하니 儞向依變國土中하야 覓什麽物고 乃至三乘十二分敎는 皆是拭不淨故紙며 佛是幻化身이요 祖是老比丘니 儞還是娘生已否아 儞若求佛하면 卽被佛魔攝이요 儞若求祖하면 卽被祖魔縛이니 儞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

 

해석) 물었다. “무엇이 마음과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경계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대들이 물으려 하는 순간 벌써 달라져 성품과 모습이 서로 나눠져 버렸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라.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으며, 또한 태어나는 일도 없다. 다만 헛된 이름만 있을 뿐이고 그 이름 또한 텅 비었다. 그대들은 오로지 저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큰 착각이다. 설사 그러한 것들이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들이다. 이른바 보리의 의지와 열반의 의지와 해탈의 의지와 부처의 삼신이라고 하는 의지와 경계와 지혜의 의지와 보살의 의지와 부처의 의지들이 있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만들어진 가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삼승십이분교라 할지라도 모두가 화장실의 휴지에 불과하다. 부처란 허깨비의 몸이고,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구니에게 사로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구니에게 속박되어 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일없는 무사함만 같지 못하다.”

 

강의) 마음과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경지는 이미 표현의 세계를 떠난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본각(本覺)이다 진여(眞如)다’라고 했지만 이 또한 바른 표현은 아닙니다. 그래서 물어 보는 순간 성품과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이름을 떠 올릴 때 그 사람 자체가 그대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과 함께 우리 기억 속의 담겨있는 그 형상이 떠오르게 됩니다. 본래 그 사람과 모습으로 인식되는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묻는 순간 성품과 모습이 다르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 질문에 미소를 짓거나 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성(自性)이 본래 공(空)입니다.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 또한 부득이하게 붙인 것으로 본질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에 집착해서 그것이 진실인 것으로 변함없는 실체인 것으로 착각들을 합니다. 보리라는 것도, 열반이라는 것도, 부처라는 것도 모두 의지해서 변화한 가상의 것들입니다.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허수아비에 부처라는 옷을 입히고, 보살이라는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를 추구한다면서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짜로 만들어진 이름에 집착하며 밖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성문, 독각, 보살을 위한 가르침과 십이분교로 분류되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모두 화장실의 휴지조각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부처와 조사가 거룩한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밖에서 찾아 헤매지만 않으면 됩니다. 부처와 조사를 우상으로 받들고 구하려고 해봤자 괴로움만이 늘어날 뿐입니다.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본래 구할 것이 없으며 다 갖춰져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저 진리가 드러나도록 불성이 현현하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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