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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는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 비우면 번뇌도 사라져

기자명 법보신문

성인 따르고 범부 피하지만
깨달음은 미추를 떠난 자리

 

선지식과 학인의 만남에도
공부 따라 네 가지로 구분

 

입으로는 불교를 말하면서
장사치 넘어선 승려도 많아

 

 

▲맥적산 제4호굴. 북주(557~581)시기 개척이 시작돼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며 보수됐다. 절벽 면에 조성된 이 석굴은 북주 시대의 문학가이자 대도독이었던 이윤신이 개착했다. 4호굴은 일명 칠불각으로 불린다. 일곱개의 석굴에 각각 칠불을 봉안하고 나한상과 보살상을 협시로 조성한 석굴 가운데 하나다. 석굴을 지상으로부터 50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唯有道流의 目前現今聽法底人하야 入火不燒하며 入水不溺하며 入三塗地獄호대 如遊園觀하며 入餓鬼畜生 而不受報하나니 緣何如此오 無嫌底法일새니라 儞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沈浮하리니 煩惱는 由心故有라 無心하면 煩惱何拘리오 不勞分別取相하야 自然得道須臾니라 儞擬傍家波波地學得하면 於三祇劫中에 終歸生死하리니 不如無事하야 向叢林中하야 牀角頭交脚坐니라

 

해석) “오직 도를 배우는 그대들의 눈앞에 법을 듣는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의 지옥에 들어가도 유원지에서 노는 것과 같다. 아귀, 축생의 세계에 들어가도 과보를 받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싫어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서 윤회하게 된다. 마음 때문에 번뇌가 생기는 것이니 텅 빈 마음이 된다면 어찌 번뇌가 사람을 구속하겠는가? 애써 분별하여 모습 취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도를 저절로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옆길에서 분주하게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삼아승지겁을 노력해도 결국 생사윤회하게 될 것이다. 일없이 총림으로 와서 선원의 의자에 앉아 참선을 하는 것만 못하다.”

 

강의) 임제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듯이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입니다.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바로 내 앞에서 법을 듣고 있는 그대들이 부처이며 무위진인이라고. 이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온갖 고통의 세계에 있어도 유원지에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하게 됩니다. 모든 고통이 몽환공화(夢幻空花)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꿈이나 환상과 같고 허공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이런 말이 있지요.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라. 착함도 생각하지 말고 악함도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분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하지만 사랑할 원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난 자리입니다. 차별이나 분별이 사라진 곳입니다. 차별이나 분별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쉬고 진리를 찾는다며 허둥지둥하지만 않으면 번뇌는 절로 사라집니다. 그러니 총림(叢林)에 가서 조용히 앉아 참선을 하는 것만 못합니다. 총림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입니다. 옛말에 草不亂生曰叢(초불난생왈총) 木不亂長曰林(목불난장왈림)이라고 했습니다. 총(叢)은 풀이 어지럽게 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림(林)은 나무가 어지럽게 않게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총림은 질서정연하고 정갈한 수행의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道流야 如諸方有學人來하야 主客이 相見了하고 便有一句子語하야 辨前頭善知識이라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하야 向善知識口角頭過하야 看識不識이어든 若識得是境이면 把得하야 便抛向坑子裏하나니라 學人이 便卽尋常 然後에 便索善知識語하나니 依前奪之하면 學人이 云, 上智哉라 是大善知識이여하리니 卽云, 大不識好惡로다 如善知識이 把出箇境塊子하야 向學人面前弄하면 前人辨得하야 下下作主하야 不受境惑이라 善知識이 便卽現半身에 學人이 便喝한대 善知識이 又入一體差別語路中擺撲하면 學人이 云, 不識好惡로다 老禿奴여하야 善知識이 歎曰眞正道流로다하니라

 

해석) “여러분!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손님이 서로 인사를 하고 나면, 학인이 곧바로 한마디 말을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시험해 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학인이 한 가지 시험하는 말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의 앞에 던져 ‘어디 당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말해보시오’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때 선지식이 시험하는 하나의 경계라는 것을 알면, 그 말을 붙잡아 곧장 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러면 학인은 곧 평상의 자세로 돌아와 선지식의 가르침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모른 척 한다. 그런 경우 학인은 ‘지혜가 높으신 진정한 선지식입니다’ 라고 찬탄한다. 그러면 선지식은 ‘너는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놈이다’ 라고 한다.


만약 선지식이 능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경계의 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학인이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알아차려 경계에 미혹되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깨달은 바의 반을 보여주면 학인이 곧장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또 일체의 차별적인 언어를 던져 우롱하면 학인은 ‘늙은 머리 깎은 중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하고 말한다. 선지식이 감탄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진정한 구도자로구나’한다.”

 

강의) 흔히 이 단락을 사빈주(四賓主)라고 합니다. 주인과 손님의 네 가지 형태라는 말인데 주(主)는 스승, 즉 선지식을 말하고 빈(賓)은 공부하러 온 수행자 혹은 학인을 말합니다. 첫째는 선지식은 뛰어난데 학인이 시원찮은 경우, 둘째는 선지식도 뛰어나고 학인도 훌륭한 경우, 셋째는 학인은 훌륭한데 선지식은 별 볼일 없는 경우, 넷째는 선지식과 학인 모두 시원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선종에는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때리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통해 구석으로 몰기도 합니다.


하루는 남악회양이 육조혜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육조혜능이 묻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회양은 그 질문에 그만 꽉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물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악회양은 그 길로 선원에 들어가 8년을 정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육조혜능에게 왔습니다. 이번에도 육조혜능이 묻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러자 남악회양이 대답합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혜능 스님은 질문이 다시 날아듭니다. “네가 말한 것은 닦아서 증득한 것인가.” 남악회양이 말합니다. “닦아서 증득할 바는 없지 않으나 더럽혀 질수는 없습니다.” 육조혜능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 더럽혀질 수 없는 것만이 바로 부처가 수호하는 바이니, 그대가 그러하고 나 또한 이미 그러하다.” 그러고는 남악회양을 인가합니다. 이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에서 선지식의 임무는 학인을 끊임없이 딜레마의 세계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선지식의 도움이 없으면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학인 가운데 선지식을 시험하려는 맹랑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리저리 화두를 던지지만 뛰어난 선지식이라면 한 눈에 척하고 알고 어쭙잖은 질문을 한방에 제압합니다. 그러면 학인은 숨을 죽이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 학인은 형편없지만 선지식은 뛰어난 경우라고 해야겠지요. 뛰어난 선지식들은 학인 앞에서 다양한 경계를 드러내며 희롱을 합니다. 형편없는 학인이라면 경계에 빠져 허우적거리겠지만 눈 밝은 학인은 한마디 말로 이를 빠져나갑니다. 선지식의 칭찬을 받거나 인가를 받게 되겠지요. 선지식도 훌륭하고 학인도 훌륭한 경우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원의 모습입니다.

 

如諸方善知識은 不辨邪正하야 學人이 來問 菩提 涅槃三身境智하면 老師가 便與他解說타가 被他學人罵著하고 便把棒打他言無禮度하나니 自是善知識無眼이라 不得瞋他로다

 

해석)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인이 찾아와서 보리와 열반과 삼신과 경계와 지혜 등을 묻는다. 눈이 먼 노사는 그에게 해설을 해 주다가 학인으로부터 힐난을 받게 되면 곧바로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놈아 라고 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대들 선지식들이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학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의) 여기서 노사(老師)는 열등한 표현입니다. 나이만 먹은 스님이라는 뜻입니다. 임제 스님 당시에도 무늬만 선지식인 스님도 많았나 봅니다. 불법의 대의에 대해 구구절절 아는 지식을 동원해 설명하다 눈 밝은 학인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면 권위를 이용해서 화를 내고 몽둥이질을 하는 스님들이 선지식이라며 목에 힘을 주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학인은 훌륭한데 선지식이 형편없는 경우입니다.

 

有一般不識好惡禿奴하야 卽指東劃西하며 好晴好雨하며 好燈籠好露柱하나니 看하라 眉毛有幾莖고 這箇具幾緣에 學人이 不會하고 便卽心狂이라 如是之流는 總是野狐精魅이니 被他好學人의 微笑하야 言老禿奴여 惑亂他天下人이로다

 

해석)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머리 깎은 중들이 있어서 동쪽을 가리키다 서쪽을 가리키고 맑은 날을 좋아하다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며, 등롱과 노주를 좋아한다. 그대들은 잘 보아라! 눈썹에 털이 몇 개가 남아있는가? 이 일에는 기연이 갖춰져 있는데 학인들은 알지 못하고 곧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모조리 여우나 귀신 도깨비들이다. 그 좋은 학인들에게 ‘이 눈멀고 머리 깎은 늙은이가 온 천하 사람들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만드는구나’라는 비웃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강의) 독노(禿奴)는 머리 깎은 노예라는 뜻으로 경멸의 표현입니다. 선지식이랍시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온갖 것들을 종교와 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 사람들에게 파는 장사치들을 말합니다. 입으로는 불교를 말하지만 마음은 온갖 물욕과 탐욕이 가득합니다. 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를 공부한다면서도 수행은 않고 온갖 사업구상에 몰두하며 이익을 내기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출가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중국에는 거짓말을 하면 눈썹이 빠진다는 속설이 있나봅니다. 그래서 자칭 선지식들에게 눈썹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살펴보라고 경책하고 있습니다. 아마 임제 스님 당시의 수행 풍토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임제 스님은 이런 경우 선지식과 학인 모두 형편없는 것을 넘어 여우나 도깨비 같은 무리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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