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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과보

기자명 법보신문

과오 고치고 미래 복되게 하는 것이 선행

이번 생에 업을 쌓았으면
다음 생에 받는 게 과보
현재 복락은 과거 선행 탓
악행, 복 갉아먹는 일 명심


화엄경 정행품 네 번째 질문을 보자.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는 몸과 말과 생각의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도리와 도리아님을 아는 지혜의 힘, 과거·미래·현재의 업보를 아는 지혜의 힘, 중생들 근기의 수승과 하열을 아는 지혜의 힘, 중생들의 갖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의 힘, 중생들의 갖가지 견해를 아는 지혜의 힘, 일체 중생이 각각 도달하게 될 처소와 그 방법을 아는 지혜의 힘, 선정·해탈·삼매의 오염과 청정을 아는 지혜의 힘, 과거 생의 삶을 아는 지혜의 힘, 걸림이 없는 천안을 갖는 지혜의 힘, 모든 업의 습기를 끊는 지혜의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청량국사의 해석에는 “외부의 악한 환경들이 파괴할 수 없는 까닭에 부처님의 열 가지 특별한 힘을 얻는다”고 하였다. 환경에는 물질의 환경과 인간관계의 환경이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선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 환경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의 목표와 방향성을 돕기도 하고 장애하기도 한다. 장애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몸과 말과 생각의 행위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도리와 도리아님을 아는 지혜의 힘’이란 ‘도리에 맞아 말이 되는 것’과 ‘도리에 맞지 않아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혜를 갖춤으로써 생기는 힘을 말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선한 행위로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행위로 악한 과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 말이 도리에 맞고 말이 되는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좋은 과보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선한 행위를 하고도 어렵게 살아가는 이가 있다. 악한 행위를 하고 악한 과보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악한 행위를 하고도 좋은 과보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부처님의 말씀이 모두 도리에 맞고 말이 되는 것인가.


‘과거·미래·현재의 업보를 아는 지혜의 힘’이란 일체 중생들이 살아온 과거와 과거의 과거를 알고 그 영향으로 받고 있는 현재 상태와의 관계를 아는 힘이다. 그리고 현재의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받게 될 미래의 과보를 아는 힘이다. ‘업보’라는 말은 ‘업’이 원인이 되어서 ‘보’라고 하는 결과를 만드는 업인과보의 관계를 말한다. 과보는 이번 생에 지어서 이번 생에 받는 것이 아니다. 업을 지으면 과보는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에 나타난다. 적어도 한 생은 건너서 받는 것이 과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이번 생에서 받고 누리는 과보는 언제 지은 것일까. 바로 전생이나 전 전생에 지어 놓았던 것이다.


이번의 생에 좋은 과보를 누리는 사람은 전생에 좋은 업과 복을 많이 지은 이들이다. 이번 생에서도 선업 짓고 복을 짓는다면 그는 세세생생 좋은 과보를 누릴 것이다. 만일 이들이 악한 행위를 반복해서 짓는다면 이들이 전생에 지어놓은 복업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나갈 것이다. 악한 업을 짓고도 아직까지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전생에 지어놓은 복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이 다하면 그는 자기행위의 결과로 악한 과보를 현실적으로 받게 된다.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사는 사람도 힘든 과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행위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지어놓은 악한 업의 결과로 받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현재 선한 행위를 계속 하기 때문에 그의 과거의 악업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간다. 아직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과거의 악업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두 소멸되면 그는 자기행위의 결과로 선한 과보를 현실적으로 받게 된다. 부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서 우리의 업보를 살펴볼 수 있는 지혜의 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선한 행위로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행위로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도리에 맞고 말이 되는 것인가. 당연히 도리에 맞고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아는 힘이 부처님에게 있다. 우리가 부처님을 따르고 배우는 이유가 된다.


선한 행위로 선한 과보가 생기고 악한 행위로 악한 과보가 생겨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타나는 원리 원칙을 이해하면 우리는 안정되고 지혜로워 진다. 우리는 자신 있게 선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를 하는 동안에 힘든 상황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힘든 상황이 우리의 선한 삶을 장애하지 못한다.


▲도암 스님

선한 행위는 나의 과거와 현재의 과오를 고치고 미래를 복되게 하는 올바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한 행위를 피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로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생의 복을 까먹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선하고 청정한 몸과 말과 생각의 행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송광사 강주 도암 스님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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