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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비구니, 비구 못지않은 역량 보유”

  • 교계
  • 입력 2013.03.11 10:43
  • 수정 2013.03.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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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비구니, 어떤 활동 했나?

기록상 최초 신라 법흥왕비
임진왜란 때 의승군도 조직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됐던 삼국시대에서 불교가 융성한 고려까지 비구니의 활동과 위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 속 비구니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서야 시작됐으며 그 수 또한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려사’, ‘조계진각국사어록’과 일본의 ‘일본서기’, ‘원흥사연기’ 등을 통해 많은 비구니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공식적인 여성출가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비구니 스님들을 총 관리하는 ‘도유나랑’이라는 직제가 있었고 비구니 ‘아니’가 이 직제를 맡았다고 한다. 실제 기록상 최초의 비구니는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비다. 법명은 묘법(妙法)이었고 왕도에 법흥사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구니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서기’ 등에는 일본의 첫 출가자인 동시에 최초의 일본 비구니 선신(善信), 선장(禪藏), 혜선(惠善)에게 불법을 가르친 사람은 고구려의 노비구니 법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선신 등이 백제에서 수계법을 배울 수 있도록 청원하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비구니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활동내용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인물은 고려시대 김변의 처 허씨다. 충숙왕 2년, 61세의 나이에 출가해 ‘성효(性曉)’라는 법명으로 불렸던 허씨는 통도사에서 사리를 얻고 계림을 둘러본 후 장남의 집 옆 남산 초당에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그녀를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진혜대사(眞慧大師)로 추증했다.


특히 고려말에는 비구니의 구도열기가 뜨거웠다고 알려졌다. 지공, 나옹 등 선사들의 비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비구니가 비구와 함께 기록돼 있어 당시 비구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후기 비구니들은 비구 못지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딸이 최초로 출가한다. 태조 7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비 강씨의 소생인 경순 공주에게 청룡사로 출가할 것을 권한다. 이에 경순 공주는 무학대사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한다. 당시 청룡사는 ‘정업원’으로 불렸으며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비구니의 맥이 끊이지 않고 내려오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임진왜란 시 비구니들의 의승군 활동도 눈에 띈다. 삼혜 스님은 여수 흥국사를 중심으로 전투에 참가해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석천사를 짓고 이순신 장군 추모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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