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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즉심시불(卽心是佛)

기자명 법보신문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라

자아에 집착하는 관념이

고통과 불만족의 원인

 

집착 끊어진 진여 마음을

‘무반성적 의식’이라 불러

 

자아 집착 중에서 최악은

종교적 자아에 대한 집착

 

‘나’에 갇혀있는 마음이

세계로 향하면 곧 해탈

 

대매(大梅)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馬祖)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다”라고 말했다.

무문관(無門關) 30칙 / 즉심시불(卽心是佛)

 

 

▲ 그림=김승연 화백

 

 

1. 마음이 지어내는 유령 ‘자아’

 

무아(無我, anātman)! 아마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 무아라는 두 글자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불만족의 기원이니까 말입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늙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면 누구나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텅 비어 있는 통장 잔고를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울해집니다. 그득했을 때의 통장 잔고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그러니까 가장 행복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대한 현자들이 인간을 허영덩어리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행하고 우울할 때의 모습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을 테니까요.

 

허영이든 무엇이든 진정한 자기 모습이 있다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항상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고통과 불만족은 외부의 불청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불러내는 유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도 바로 이런 우리 마음의 메커니즘을 폭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과는 무관하게 우리 마음이 지어내는 가장 큰 유령은 바로 ‘자아’, 혹은 ‘나’라는 관념입니다. 문제는 이 ‘나’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강한 자의식이야말로 우리에게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불만족을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를 가르치면서 자의식이란 불꽃을 가라앉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탈이란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닌가요. 해탈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해묵은 자의식을 버려서 마침내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상태니까 말입니다.

 

무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anātman)이란 글자를 들여다보세요. 이 글자에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안(an), 그리고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트만을 단순한 자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자아, 나아가 이 세상을 떠나 육신이 썩어 없어져도 소멸하지 않는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살았던 당시 인도 브라만 사상가들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영혼과 비슷한 것이 바로 아트만인 셈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중 최고의 집착이 바로 이런 종교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기보다는 부정하기 급급할 테니까,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변하는 자아나 그것을 만들었다는 신에 몰입하느라, 친구와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애정도 주지 않는 광신도를 생각해보세요.

 

2. 사르트르, ‘진여마음’을 말하다

 

자아를 만들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고, 동시에 집착을 끊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우리 마음에는 생멸(生滅)의 측면과 아울러 진여(眞如)의 측면도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마음이 희노애락(喜怒哀樂)으로 널뛰기하는 것이 생멸의 마음이라면, 집착을 끊어서 마음이 고요한 물처럼 안정된 것이 바로 진여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결국 생멸의 마음이 자의식이 지배하는 마음이라면, 진여의 마음은 자의식을 극복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문관(無門關)’의 30번째 관문에서 대매(大梅, 752~839) 스님과 마조(馬祖, 709?~788) 스님 사이의 선문답도 바로 마음의 이런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매 스님이 부처, 그러니까 진여의 마음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마조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卽心是佛)”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잠깐 사족 하나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즉심시불(卽心是佛)’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번역됩니다. ‘즉(卽)’이란 글자를 ‘곧’이나 ‘바로’를 의미하는 부사로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즉심시불’이 아니라 ‘심즉시불(心卽是佛)’이 되어야 합니다. 부사는 술어 앞에 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문법적으로 ‘즉심(卽心)’이란 구절을 술어와 목적어의 관계로 독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겁니다. 즉위(卽位)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즉위는 군주의 자리[位]에 ‘이른다’, 혹은 ‘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즉위’처럼 ‘즉심’도 ‘마음에 이른다’나 ‘마음에 오른다’는 의미로 독해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다면 ‘즉심시불’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이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이르면 부처이다’라고 번역하면, 30번째 관문의 취지가 더 명료해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통과 불만족을 낳는 자의식의 이면에는 그것을 극복한 깨달은 자의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교만의 통찰이 아닙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도 자의식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의식, 그러니까 자의식보다는 더 심층적인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반성적인 의식(conscience non réflexive)’이라고 부릅니다. 무반성적이라고 해서 멍청한 정신 상태나 흐리멍텅한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의식이 없는 마음, 그러니까 ‘나’라는 집착이 없는 마음, 그래서 모든 것에 열려 있고 깨어 있는 마음이 바로 무반성적인 마음이니까요. 흥미로운 일 아닌가요. 사르트르라는 철학자가 고요하고 잔잔하기에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호수와 같은 마음, 즉 진여의 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3. 할과 방은 자의식 부수는 수단

 

사르트르의 이야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그의 책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ence de l’Ego)’을 조금 넘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반성적인 의식에는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내가 시내전차를 잡으려고 따라갈 때, 내가 시간을 볼 때, 내가 그림을 응시하는 데 몰두할 때,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림을 응시할 때, 우리 마음은 깨어있습니다. 이럴 때 만일 자의식이 있다면, 다시 말해 자신과 관련된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그것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그림에 마음을 둘 수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나’라는 의식, 즉 자의식이 작동한다면, 무반성적인 의식은 은폐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제 무반성적인 의식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 의식은 결코 흐리멍텅한 의식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무반성적 의식은 삶의 세계에 열려서 활발발(活潑潑)하게 작동하고 있는 마음을 가리키니까 말입니다.

 

사르트르의 도움으로 우리는 자의식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반성적 의식이 자신을 의식하는 반성적인 의식이 될 때, 바로 이 순간이 ‘나’라는 관념이 출현하게 됩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자의식의 지배를 받는 순간, 우리에게 무반성적 의식은 은폐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여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비의 마음이 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마음이 타인을 품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자기만 아끼는 사람이 타인을 돌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덕산방(德山棒)’이니 ‘임제할(臨濟喝)’과 같은 충격 요법이 있었던 겁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덕산(德山, 782~865) 스님이 ‘몽둥이[棒]’를, 그리고 임제(臨濟, ?~867) 스님이 ‘고함소리[喝]’를 사용했던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덕산과 임제는 이런 파격을 행했던 것일까요. 제자가 자의식이 강할 때,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면에 빠져 있을 때, 두 스님은 갑자기 몽둥이를 내려치거나 아니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마음을 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갑작스런 외부의 충격은 일순간이나마 자의식의 활동을 완화시키거나 중지시키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무반성적인 의식, 그러니까 활발발한 마음이 다시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무반성적인 의식 상태에서 자의식은 사라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무아’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해탈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자의식을 떠나서 마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나 자신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세계에 열려 있는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라!’ 이것이 바로 무아와 해탈을 꿈꾸는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적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신주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이것이야말로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정신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실존(existence)라는 말 자체가 ‘밖으로(ex)’ 향하는 ‘존재(istence)’라는 의미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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