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주여성 김만덕
26. 제주여성 김만덕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3.04.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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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주어진 시대적 굴레마저 자비로 뛰어넘은 선각자

기생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
극심한 흉년땐 천금 희사해
제주민 1000여명 구휼 나서


정조, 이타행 전해듣고 탄복
조정 대신들 칭송도 이어져
불교성지 금강산 유람 이례적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만덕은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배를 향해 내딛는 걸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육지로 향하는 순간이다. 한 평생 간절히 바랐지만 불가능하리라 믿어왔던 일이었다. 만덕에게 바다는 반평생 의지해 온 삶의 터전인 동시에,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굴레였다.


당시만 해도 제주 여성은 관의 허가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제주도의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제약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태어난 여성은 평생 제주에서 살다 죽어야 했다. 때문에 만덕의 출항은 제주 역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여성으로는 이례적인 육지행인데다 그 허가의 주체가 무려 조선의 왕, 정조였기 때문이다.


정조 20년(1796). 만덕은 왕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향하는 뱃길에 올랐다. 천민에 가까운 일개 상인이자 여성인 그녀가 왕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제주여성에게 주어진 정책적 제약마저 걷어내고, 정조가 만덕을 직접 서울로 불러올린 까닭은 무엇일까. 또한 만덕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듯 이례적 대우를 받았던 것일까.


김만덕(1737~1812). 그녀는 제주에서 수완 좋기로 이름난 상인이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객주는 늘 무역상들로 붐볐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역상들에게 의식주 를 제공할 뿐 아니라 중개와 직접 수매까지 도맡았다. 제주 여성들을 위한 옷감과 장신구, 화장품을 들여왔고 제주 특산품을 선별해 내보냈다.


실력을 인정받은 후에는 관의 물품거래까지 도맡았다. 비록 여성이었지만 뛰어난 장사수완과 정확한 일처리로 제주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거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객주를 운영하는 동안  육지에서 온 물건들을 누구보다 먼저 만났고,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하는 물건은 가장 마지막에 배웅했다. 수많은 물건과 돈, 사람이 그녀를 거쳐 뱃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정책에 발목이 잡혀 바다를 건널 수는 없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연유로 왕의 부름을 받게 됐을까. 우선 당시 3년간 제주 전역을 뒤흔든 극심한 흉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94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당시의 상황이 소상히 전한다.


“굶어 죽은 사람의 수가 6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 얼핏 보아도 극히 놀랍습니다. 봄과 여름 사이 섬 전체에 전염병이 크게 성했고 거듭 흉년이 들어 병든 사람은 굶어 죽고 굶은 사람도 병들어 죽는 상황에 방도가 없습니다.”
“며칠새 동풍이 강하게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이 날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바다의 짠물에 마치 김치를 담근 것 같이 절여졌습니다. 이 같은 큰 흉년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 쌀로 쳐서 2만여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제주목사 심낙수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제주는 3년째 이어진 흉년에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마저 창궐해 사망자가 날로 늘어 막막하기가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조가  곡식 1만1000석을 배 5척에 실어 제주로 보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를 향하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 제주민들의 굶주림을 해소해야 할 곡식들이 모조리 바다에 잠겨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제주 백성들은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힘든 순간 만덕은 더없는 자비심을 냈다. 반평생 객주 운영으로 모아둔 재산으로 사람들을 육지로 내보내 가능한 최대한 많은 쌀과 곡식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곡식을 사기 위해 쓴 돈이 무려 천금에 달했다. 만덕은 모인 곡식의 10분의 1은 친족을 위해 남은 곡식들은 모두 진휼미로 사용할 수 있도록 관청에 실어 보냈다. 만덕의 통 큰 보시로 부황으로 죽어가던 수천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만덕을 향한 칭송의 목소리가 제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만덕이 우리를 살렸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같은 만덕의 공은 그해 조정에 보고되지 못했다. 전 현감 고한록과 장교 홍삼필 등이 300석, 100석 가량을 진휼에 보탠 기록만 있을 뿐이다.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천민 여성의 이름이 임금에게 올려지는 것은 아무리 큰 공을 세웠을 지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덮어두기엔 만덕을 향한 제주백성들의 감사함이 너무도 컸다. 만덕은 이미 제주를 살린 자비의 화신과도 다름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796년, 천금의 재산을 희사해 백성을 살린 만덕의 이야기는 정조에 귀에까지 가 닿았다.


왕은 크게 탄복했다. 일개 천민 여성이 자신의 평생 모은 재산을 보시해 백성들을 먹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큰 상을 내리고자 제주 목사를 통해 만덕이 원하는 것을 물었다.


“상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바라옵건데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십시오.”


정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에 제주 여성에게 주어진 활동의 제약을 풀어주고 만덕이 서울까지 오는 데 필요한 모든 이동 수단과 의식주 등 제반사항을 일체 책임지도록 명했다.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왕을 배알할 수 있도록 의녀반수의 직함도 내렸다.


한순간 신분이 급상승한 만덕의 출항길엔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조정 관리들이 비단옷을 갖춰 입은 만덕을 안내했으며, 수많은 제주 백성들이 배앞에 모여들어 환한 미소로 만덕을 배웅했다. 바다를 건너면 한평생 꿈속에서 그려온 육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벅찬 희열 속에 결코 순탄치 않았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을 벗어내려 부단히 노력했던 지난날이었다.


만덕은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었다. 가난하고 부모없는 만덕은 11살 어린 나이에 기적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박복한 운명이었다. 기생으로 살던 만덕은 성장해 관아에 기녀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거듭 청원했다. 부득이 기녀가 됐지만 다시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면 집안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끈질긴 청원으로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기녀 명단에서 이름을 없앨 수 있었다.


기생신분에서 벗어났지만 평범한 아녀자의 삶에는 뜻이 없었다. 가정을 꾸리기보다는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장사에 뛰어들었다. 여성의 한계가 뚜렷했던 당시 통념으로, 여성이 거친 뱃사람을 대하고 무역상들과 흥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기생 출신 여성으로 만덕이 일궈낸 성공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쩌면 기생 출신이라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고자 했던 그녀의 굳은 의지가 성공의 배경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만덕은 성공할수록 고개를 숙였다. 항시 검소하고 겸손한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가진 것을 베풀었다. 굶어 죽어가던 수천명의 생명을 살린 통 큰 보시도 한순간의 결정이 아닌, 매순간 자비를 실천해 온 지난 삶의 연장선상이었던 셈이다. 그랬기에 만덕을 향한 제주민들의 존경심도 남다른 측면이 있었으리라.


만덕을 향한 존경과 관심은 제주뿐 아니라 조정에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만덕이 궁궐에 도착했을때 이미 지위고하 막론하고 신하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것. 3정승을 두루 거친 체제공은 그녀의 공덕을 주제로 한 ‘만덕전’을 지어 전달했으며, 박제가와 이가환 등 조정 중신들은 그녀의 공덕을 찬하는 시를 남겼다. 다산 정약용마저도 ‘다산시문집’에서 그녀를 소개하며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칭송했을 정도니 당시 만덕은 그야말로 조선의 유명인사였던 셈이다.


왕을 알현한 만덕은 곧이어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국토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금강산 일만이천봉까지 다녀간 조선시대 여성은 모르긴 몰라도 만덕이 유일했으리라. 추측컨데 그녀는 객주를 찾는 무역상들을 통해 금강산의 매력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금강산의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일만이천봉의 아름다움이거나 혹은 불교 성지를 향한 순례원력일지도 모른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에도 금강산에는 왕실의 비호로 주요사찰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제공이 지은 ‘만덕전’에 따르면 만덕은 금강산 유람 중에 처음 불교를 접했다고 한다. “당시 탐라에는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만덕은 금강산에서 불교에 귀의. 사찰을 참배하고 금불상에 절을 올리며 정성을 다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만덕은 과연 체제공의 판단처럼 금강산에서 불교를 처음 접했을까. 확신하긴 어렵지만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제주불교가 쇠퇴한 것은 사실이나 불교가 없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묘련사와 보문사, 법화사, 수정사 등 사찰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까지 법화사와 수정사에는 일꾼들이 있을 정도로 세가 강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법화사는 17세기 후반, 수정사는 숙종 20년(1694), 원당사는 숙종 28년(1702)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제주도에는 불교가 존재하긴 했으나, 만덕이 살던 시기엔 사찰이 없는 불교 쇠락기였던 셈이다.


만덕의 객주에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던 무역상들도 적잖이 드나들었다는 점을 살펴보면 그녀가 이미 불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조금 더 커진다. 당시 일본과 중국은 불교가 널리 신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덕은 무역상들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를 접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경전 등을 통해 남몰래 신앙생활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당시 금강산은 조선시대 불교 성지였던 까닭에, 당시 중국과 일본 사신들은 하나같이 금강산 유람을 몹시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녀가 모든 상과 재물을 마다하고 금강산 유람만을 청한 까닭도 여기 있지 않았을까.


남다른 자비행으로 시대적 한계마저 뛰어넘은 김만덕. 그녀는 제주 여성, 상인, 기생출신이라는 각종 꼬리표에 따른 제약과 굴레를 모두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 어려운 이들의 돌본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의 여적은 그 자체로 보살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면모를 대변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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