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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주세발(趙州洗鉢)

기자명 법보신문

외부의 노예도 되지 말고 내부의 노예도 되지 말라

생각 끊겠다는 마음 또한 집착
내외부 향한 생각 모두 끊어야


집착이 없이 깨인 마음이라야
당당한 주인공도 될 수 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조주(趙州)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무문관(無門關) 7칙 / 조주세발(趙州洗鉢)

 

 

▲그림=김승연 화백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1988년 출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흔히 바이올린의 여제라고 불리는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년 출생)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바이올리니스트이지요. 무터는 그녀를 “가장 애착이 가는 연주자”라고 부를 정도로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최예은은 저와 집필실을 함께 쓰고 있는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들린 겁니다. 그녀는 통통 튀는 듯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습니다. 제 방에서도 도란도란 인터뷰 소리가 들리더군요. 소파에 편히 누워 책을 보고 있던 저의 귀에는 최예은이 들려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들어왔습니다. 그건 뮌헨 대학 그녀의 스승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최예은이 연주를 하고 있는데, 그의 스승이 말했다고 합니다. “연주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아니니?”

 

갑작스런 스승의 지적으로 그녀는 당혹했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연주된 부분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스승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수긍했다고 합니다. 다시 연주가 진행되자, 스승은 다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예은아, 정말 네 연주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간곡하게 물어보니, 어떻게 제자가 자신의 속내를 계속 스승에게 감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선생님, 사실 저는 잘못 연주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바로 이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떠본 것입니다. 스승은 음악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당당한 태도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스승은 “선생님, 저는 제대로 연주했는데요”라는 대답을 기다렸던 겁니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연주하던 음악에 제대로 직면했다면, 연주자는 그 누구 앞에서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스승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럴 때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한 사람의 당당한 연주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의 시험은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 자신의 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없다면, 그러니까 이제 자신처럼 독립적인 연주자로 성장했다는 판단이 들지 않았다면, 스승은 자신의 제자를 떠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애잔하다는 겁니다. 제자가 성장해서 더 이상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스승은 뿌듯하기도 하고 동시에 서글프기도 할 테니까 말입니다.

 

2. 가면 뒤 얼굴도 맨얼굴 아닌 가면

 

‘무문관’의 일곱 번째 관문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고 조주(趙州, 778~897)를 찾아온 어느 스님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문관’을 보면 그 스님은 조주에게 묻습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조주의 가르침과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조주록(趙州錄)’을 보면 조주에게 던지 스님의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무문관’의 일곱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데 더 분명한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 스님은 조주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기입니까(如何是學人自己)?” 여기서 배우는 사람, 즉 학인(學人)은 무명 스님 자신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스스로 주인에 이른 스승처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기에, 스님은 학인이라고 스스로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무명 스님의 질문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단지 한 걸음만 부족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自己), 그러니까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다면, 그래서 그 맨얼굴에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삶을 영위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부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에는 무명 스님의 치열한 노력이 선연하게 들어옵니다.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스님은 자신의 가면을 하나하나 벗겨갔던 겁니다. 한 장의 껍질을 벗기는 순간, 스님은 기대했을 겁니다. 이제 자신의 맨얼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얼굴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양파껍질 한 장을 벗기자 새로운 양파껍질을 만나는 것처럼, 가면을 벗자마자 맨얼굴이 아니라 또다른 가면에 직면했던 겁니다.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년 출생)의 ‘그 해 가을’이란 시 말미에 나오는 구절과도 같은 절망감이었을 겁니다.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무명 스님이 경험했던 자기의 맨얼굴을 찾으려는 집요한 노력과 반복되는 절망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여러분은 자신을 이 스님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 속에 던져 넣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기입니까?”라는 질문의 절실함이 우리 가슴에 들어올 테니까 말입니다. 조주의 대답이 무명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원의 밧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절실함에서만 가능할 겁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찾으려고 내면을 파고드는 치열한 노력을 비웃듯이, 혹은 우리의 절실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주는 말합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무명 스님을 조주는 한 마디의 말로 바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스님은 맨얼굴을 찾으려는 오래된 집착에서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3.불법에 집착하는 것도 집착이다

 

조주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무명 스님이 본래면목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미 혜능(慧能, 638~713)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마라. 이것은 곧 불법에 속박된 것이다.” 혜능의 에피소드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혜능도 자유를 찾으려는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착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약에 집착하면 약물중독에 빠질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사물이나 사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혜능뿐만 아니라 조주가 품고 있었던 속내였던 겁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라는 조주의 질문으로 무의식적이나마 무명 스님은 맨얼굴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겁니다. 당연하지요.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어떻게 그가 자신의 맨얼굴에 집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의 뇌리에는 조주의 질문과 아침에 먹었던 죽만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직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집착은 그대로이고 단지 집착의 대상만이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무명 스님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마조(馬祖, 709~788)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 그는 조주가 말한 아침 죽에서 마조의 가르침을 연결했을 겁니다. 영민한 조주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지요. 다시 마조의 가르침에 집착하다고 느꼈을 때, 조주는 무명 스님의 새로운 집착마저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럼 발우나 씻게.” 이미 먹었기에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아침 죽이나 혹은 이미 죽은 마조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날려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내면에 몰입하는 것도 막고, 외면에 빠져드는 것도 막으려는 것입니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집착하지 않아야 우리 마음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활발발(活潑潑)’하게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훌륭한 연주자는 관중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연주를 망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당당하게 직면할 뿐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의 스승이 젊은 제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요. 그녀를 스승이나 관중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가르침에 집착해서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나, 아니면 평상심이란 가르침에 집착하여 외부로 치닫는 것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장애만 될 뿐입니다.

 

▲강신주
외부의 노예도 되지 말고 내면의 노예도 되지 말라는 조주의 애정이 최예은의 스승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죽을 먹든 발우를 씻든 프로코피에프를 연주하든 슈베르트를 연주하든, 중요한 것은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무명 스님이든 최예은이든 아니면 우리든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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