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장대보화 보살
37. 장대보화 보살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3.10.0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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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사건 계기로 세상에 알려진 자비의 연꽃
상도선원 전신 백운암 창건
어음사기 주동자 장영자에
불법 전파하며 수양딸 삼아


1930년 초 선학원서 발심
장학회·불사에 재산 희사
조계종정 서옹 스님도 찬사

 

 

▲장대보화 보살이 희사한 옛 백운암 대웅전에서 서옹 스님이 법문하는 모습.

 

 

1982년 봄,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라 칭해지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유례없는 희대의 사기사건이자 권력형 금융사기로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시작은 단순한 외환관리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어음을 악용한 막대한 사기행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 사건의 여파로 어음을 막지 못한 기업들은 연쇄부도를 맞았고, 금융거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면서 나라 경제도 급격히 위축됐다. 이 사건은 향후 금융실명제 도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들 부부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사기극을 펼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그들의 남다른 배경에 있었다. 이철희는 전직 국회의원이자 중앙정보부 차장이었고 장영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의 처제로 불교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온 인사였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정부기관 출신, 그리고 대통령의 친족이자 종교인이라는 두 사람의 후광은 그 자체로 은행과 기업에겐 더 볼 것도 없는 보증수표였던 셈이다.


사건의 전말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당시 38세에 불과했던  장영자는 순식간에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사채업계 큰손 장영자’, ‘장영자, 그녀는 누구인가’, ‘장 여인의 배후’ 등을 제목으로 한 연재기사는 물론, 크고 작은 개인사를 담은 기사들이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장영자의 개인사는 불교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계종 전 종정이었던 서옹 스님을 각별히 따르며 인연을 맺어왔을 뿐 아니라 법명 또한 스님이 직접 지어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 언론들이 불교계 큰 어른인 서옹 스님을 인터뷰하겠다며 나설 정도였다. 장영자의 불교인연이 불교의 대사회적 이미지에 타격을 미치는 수준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 신도의 철없는 행동에 때 아닌 망신을 당하고 있는 불교계가 그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장영자의 불심은 순수한 신앙이라기보다 정치·경제적 목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불자임을 가장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사찰에 불사금을 시주한 대가로 불전함 수입을 불려주겠다며 가져가거나, 불사금을 약속해 놓고 실제로 주지 않는 등 공수표만 남발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물론 당시 장영자의 불심이 진실했는지 여부는 지금에 와서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다만 장영자가 이 사건으로 보여준 일련의 행보들이, 그녀에게 순수한 불심을 전했던 또 다른 불자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결과로 이어졌다는 안타까움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장영자에게 처음으로 불연을 맺어준 인물이자, 인간적·종교적·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장봉옥(1904~1981, 장대보화) 보살에 대한 내용이다. 그녀는 장영자를 각별히 아껴 수양딸로 삼았으며, 불교를 전파해 불자로 인도했을 뿐 아니라 서옹 스님과의 인연을 주선하고 불교계 지원을 독려했다고 전한다. 사건이 터진 당시 장대보화 보살은 이미 고인이었음에도, 일부 언론들은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의 부부인연을 맺어준 인물로 그녀를 기사화하여 세간의 입방아에 올렸다. 언론들은 그녀를 일컬어 ‘베일에 싸인 불교계 큰손’이라고 칭했다.

동아일보도 1982년 5월31일자 신문에서 장영자와 장대보화 보살의 인연을 대서특필했다. ‘이철희·장영자 부부 처음 소개한 장본인은 불교계 큰손 장대보화 보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장영자는 1979년 초 무렵 장대보화 보살을 만나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불교라는 종교적 교감으로 급속히 가까워 졌고, 금세 모녀 지간처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장영자는 장대보화 보살을 통해 불교계의 정상에 손쉽게 접근, 서옹 스님을 ‘아버님’이라 불렀으며 장 보살의 도움으로 불교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는 불사도 하나의 처세술로 행사해 온 것 같다”고 비판했다.


설사 장영자가 장 보살의 불심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언정, 장대보화 보살은 자신을 통해 불교에 귀의한 그녀를 각별히 아끼고 챙겼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 보살은 장영자와 알게된 지 1~2년에 불과했지만, 불교계 안팎의 다양한 인맥과 스님들을 소개해 주며 다방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철희 중앙정보부 차장 역시 “같은 불자니 서로 도움받을 일이 있을 것”이라며 소개했고,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다. 결국 순수한 의도로 맺어준 두 사람이 결국 희대의 사기극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불교의 이미지마저 실추시킨 것이다. 장 보살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심정이었을 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대보화 보살은 이 사건이 터지기 1년 전인 1981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수양딸의 다른 이면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는 점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평생 불심으로 살아온 그 삶의 여적이 세상을 떠난 후 수양딸로 인해 훼손되는 결과로 빚어졌으니 아쉬운 대목이다.


장영자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한 재력가로 왜곡되긴 했지만, 사실 장대보화 보살은 그야말로 불교계 안팎으로 이름난 신심 깊은 불자였다. 그녀는 1930년대 초부터 불교신도였던 어머니를 따라 서울 종로구의 선학원에 다니며 일찍이 불교 수행을 접했다고 전한다.


당시 만공 스님이 기거했던 선학원은 그야말로 재가불교의 산실이었다. 부인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도심선방에서는 여성 불자들이 안거에 동참하는 등 치열한 수행 열풍이 이어졌다. 장대보화 보살은 어머니와 함께 꾸준히 선학원을 다니며 선지식들의 법문을 듣고 수행 정진하며 남다른 불심을 다졌던 것이다. 특히 1950년대에는 마야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불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대보화 보살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 건립 불사에 나선다. 이를 위해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2만평 부지를 매입했으며, 1961년 현 상도선원의 모태인 백운암이 문을 열었다. 백운암은 서옹 스님이 주석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백운암 건립을 위한 막대한 재정은 젊은 시절 한 정치인의 소실로 있으면서 모은 재산으로 충당했다.

 

 

▲장영자 사기사건 직후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장대보화 보살.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받은 재산을 특유의 사업수완과 인간관계로 활용해 큰 돈을 벌었으며, 당시 서울 무교동 일대 땅을 전부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이 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불교계 안팎으로 각종 불사를 전개해 이미 불교계에서는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장대보화 보살의 불심은 재력을 사회적으로 회향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그녀는 백운암 건립시 인근에 ‘나라사랑반’이란 명칭으로 160여채 규모의 연립주택을 지어 전몰군경 유가족 및 갈 곳 없는 이들에게 제공했으며, 부설기관으로 노인대학을 만들어 복지와 사회봉사를 이끌며 사회의 귀감이 됐다. 백운암을 창건한 3년 뒤인 1964년 무렵에는 상조장학회를 조직해 청소년과 청년 및 지역 곳곳의 소외 이웃에게 자비 손길을 전하며 여성 불자들의 보살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에는 서울시경으로부터 청소년 선도 유공자 표창장을, 1979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 장대보화 보살이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지사들을 남몰래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광복군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는 신문 기록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녀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하는 정치인의 아내로 재산을 축적하고, 안으로는 그 재산을 이용해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니 스스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백강 조경한(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생이 ‘나라사랑반’ 주민들을 대표해 장대보화 보살의 ‘영모비’를 쓴 것도 그 관계를 내심 짐작케 한다. 백강 선생은 영모비에서 “나라사랑반 주민들이 장 여사의 시은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니 이 땅에 보은의 씨앗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비문을 쓴다”고 남겼다. 만일 장대보화 보살이 알려진 바와 같이 친일계 정치인의 소실에 그쳤다면 백강 선생은 그녀의 비문을 짓지 않았으리라.


장대보화 보살은 이처럼 한평생 재산을 희사해 음으로 양으로 보살행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스님들을 각별히 모시며 불법을 배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노스님과 수행자들을 존경하고 극진히 모셨던 까닭에, 서옹 스님도 종정 퇴임 이후에는 서울을 찾을 때마다 백운암에 머물러 법을 전했다. 장대보화 보살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일컬어 ‘살아있는 보살’이라 부를 정도였다. 서옹 스님도 그녀의 이 같은 면모를 높이 평가했다. 1974년 조계종 종정 시절 스님이 직접 쓴 장대보화 보살의 송덕비가 전해진다.


“장하고 훌륭하다. 장대보화 보살은 지극정성으로 백운암을 창건하고 정사를 지어 중생을 위해 덕을 베풀고 정성을 다해 도우며 인재를 육성하니 모두가 그 선행을 칭송한다. 언제나 스님들에게 청정한 재산을 보시해 왔으며 쉼없이 행하며 부처님 땅을 장엄했으니 여러 대에 걸친 그 불사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장대보화 보살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의 글귀, 그리고 장영자 사건 당시 남겨진 신문기록을 제외하고 그녀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전무하다. 어찌보면 세간을 들썩이게 한 불미스러운 사기 사건이, 그동안 백운암 창건주로만 알려졌던 장 보살의 불심과 원력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단편적인 기록과 일부 왜곡된 시각에도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바로 그녀가 부처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대보살이었다는 점이다. 가진 것을 나누어 타인을 돕고 불사에 동참한 일련의 행보에 그녀의 순수한 자비 정신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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