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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를 매개로 스스로를 표현했던 현대조각의 선구자

젊은 나이에 일본서 높은 평가
인물상을 스님 모습으로 표현
통도사 수도암서 목불제작도
자살직전에는 불교귀의 꿈꿔

 

▲ 춘엽니(비구니), 1967년, 테라코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2009년 10월 일본 도쿄의 무사시노 미술대학과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는 한국의 조각가 권진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특별전은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개교 80주년을 맞이하여 그 동안 배출했던 수많은 동문들 중 학교를 대표할만한 작가를 선정하고, 그 작가의 생애와 작품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당시 이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한국인 유학생 출신의 조각가가 개교 80주년 기념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은 일제강점기에는 제국미술학교라 불렸는데 유명 서양화가인 이쾌대, 장욱진, 김만형, 이중섭 등 한국인 미술학도가 유학한 학교이다. 이 학교가 오랜 논의 끝에 조각가 권진규의 특별전을 개최한 것이다.

권진규는 1948년 27살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해 다음 해에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당시 조각과에는 프랑스의 거장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가 재직하고 있었는데, 권진규는 그에게서 사실적이고 강건한 형태미를 중시한 작풍을 전수받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일궈냈다. 대학 4학년 때인 1952년에는 일본의 유명한 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돌을 조각한 ‘백주몽(白晝夢)’으로 입선하고, 1953년에는 제38회 이과전에 석조 ‘기사’, ‘마두 A,B’를 출품하여 특대(特大)를 수상하는 등 젊은 나이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59년 귀국하여 테라코타 조각의 개척자로서 모던한 조형감각에 충실한 채색부조와 말, 고양이 등 동물조각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단정한 형태 안에 깊이 있는 정신성을 표현한 테라코타 여성상과 자소상을 통해 자신의 리얼리즘을 수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높이 평가 받는 분야는 인물상이다. 인물상의 모델은 대부분 그 자신과 젊은 여인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인물상들을 비구니나 비구의 모습으로도 표현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권진규는 불보살상도 다수 제작했는데 불상제작은 이미 26세이던 1947년 속리산 법주사 대불 제작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것 같다. 김복진(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졸업)의 유작인 법주사 대불을 윤효중(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졸업)이 이어 받아 계속 진행하게 되면서 권진규도 이 작업에 6개월간 참여하게 된다.

 

▲ 목조보살입상, 1955년, 배나무, 하이트문화재단.

 

1955년(34세)에는 공양상으로서 여인입상을 제작한다. 당시 교제하고 있던 오기노 도모의 아버지로부터 돌아가신 처형(도모 어머니의 언니)을 위한 공양상 제작을 의뢰받는다. 가까이에 있는 배 밭에서 나무를 구해 야마가타의 온천에서 ‘여인입상’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미국 워싱턴(Washington)의 후리어미술관(Freer Gallery of Art)에 소장(所藏)된 ‘석조보살입상’(중국, 7세기)을 모본으로 하고 있지만, 얼굴이나 둥근 어깨는 돌아가신 분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머리의 표현이다. 육계가 표현된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상호의 분위기도 보살보다는 부처에 가깝다. 이렇듯 도상에 구애받지 않고 본인 의지대로 조성하는 불상 작품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1971년 권진규는 2월28일~3월29일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목조불상제작에 전념한다. 3월7일에는 ‘불상’을 거의 완성한다. 이 ‘불상’의 구상과 제작에 있어서 권진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과 원주 출토 철조여래좌상을 참고했다.

삼산형 보관과 얼굴, 상반신의 신체표현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닮았고, 옷주름과 수인, 결가부좌 자세 등은 원주출토 철불좌상을 닮아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 다른 점도 보이는데, 최소한의 표현으로 작가가 원하는 존상을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부채꼴의 옷주름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넓게 표현된 철불의 어깨도 실제 인물처럼 표현했으며 접힌 옷주름의 표현도 거의 하지 않고 사선으로만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표현은 더 간결해지고 신체비례는 현실적인 모습으로 조성됐다.

 

▲ 가사를 걸친 자소상, 테라코타, 고려대학교박물관.

 

아마 권진규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종교적 작품은 승려형 인물상들이다. 1967년에 제작된 ‘곤스케(權助)’라는 자소상과 ‘춘엽니(春葉尼)’는 현재까지 알려진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된 인물상 중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그의 승형 인물상들은 1967년부터 그가 자살하기 바로 전 해인 1972년까지 보인다.

이러한 승형 인물상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그의 인물상에는 정신세계,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듯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숭고함과 종교성, 영원성 등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기름기 하나 흐르지 않는 얼굴 표현과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아니 달관한 듯한 눈의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멎게 한다.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이런 느낌이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그는 인물상에 어떠한 장식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얼굴 아래로 표현되는 부분들이 거의 동일하며 단순하고 간결하다. 결국 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성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요소를 하나씩 감하다 결국 정신성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권진규의 ‘춘엽니’의 모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실제로 ‘춘엽’이라는 법명을 가진 비구니가 모델이라는 것이다. 조계종단에 확인한 결과 이 시기를 전후해 ‘춘엽’이라는 법명을 가진 비구니스님은 없었다. 물론 다른 종단일 수도 있고 등록되지 않은 스님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실제 비구니 스님이 과연 모델을 서 주셨을까. 권진규는 작가와 모델이 하나가 되어 나오는 것이 작품이라고 했으며, 모르는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따라서 모델을 서 줄 정도라면 분명 친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아뜰리에에서 권진규의 모델을 자주 섰던 박영희나 이선자일 가능성이다. 그가 만든 비구니 모습의 작품은 ‘춘엽니’와 ‘비구니’ 두 점이다. 이 들은 여러 점의 테라코타로 제작됐으며, 마지막엔 건칠로 남아있다. 이들의 상호를 자세히 보면, ‘춘엽니’에서는 영희의 얼굴이, ‘비구니’에서는 선자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춘엽’은 어쩌면 권진규 자신이 붙인 법명이었을 것이다. 권진규가 스스로를 모델로 한 작품 중에는 자신을 스님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가사를 걸친 자소상’은 본인을 모델로 한 작품 중 가장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자신을 붉은 가사를 두른 스님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는데, 권진규와 불교의 인연은 어땠을까?

 

▲ 불상, 1971년, 나무, 하이트문화재단.

 

그는 평상시 고찰을 다니며 스케치하고 사진 찍는 것을 즐겼으며, 1971년 2월28일~3월29일 통도사 수도암에서 머물며 목조불상을 만들기도 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이혜상 스님과의 서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고자 했다. ‘나의 마음이 평온할 때는 불상이 미소 짓고 있지만, 나의 마음이 우울할 때는 불상도 울고 있다’라고 여동생 경숙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 종교는 예배나 구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불교 조각, 특히 승형 인물상에서는 경건하고도 절제된 분위기가 느껴지며,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침잠한 듯도 하며, 사색중인 듯도 하다. 또 모든 것에 초월하여 해탈한 듯한 경지도 보인다. 무서울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지며, 맑고 고요한 아름다움도 함께 한다. 그에게 이를 실현시켜 준 것이 불교였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형식적인 도상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에게 불교 조각은 자아성찰의 통로이자 작가관이 응집된 결정체는 아니었을까?

▲임석규 실장
 

그에게 작품은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종교였으며, 결코 죽지 않는 자식이자, 변치 않는 벗이요, 사랑하는 연인이고 자신이었던 것 같다. 즉, 그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유도 그에게 전부였던 것을 잃게 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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