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김복녀(방편행) 보살
39. 김복녀(방편행) 보살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3.10.3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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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원력으로 60년 가사공양…바느질이 곧 닦음의 길

전통가사 손바느질 전수자
치열한 수행으로 가사 조성
단양 영통사서 마지막 불사

“바늘만 쥐면 흐린 눈 밝아져”
평생  흐트러짐 없는 삶 귀감

 

 

▲2009년 무렵의 김복녀 보살. 손에 쥔 가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유작이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늘이 붉은색 가사 조각을 관통했다. 하얀색 명주실이 천 속으로 휘감겨 사라진다. 바늘을 쥔 고령의 노보살 김복녀(방편행, 1929~2012)씨의 눈이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0.5mm 바늘땀 하나가 붉은 가사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바늘땀이 너무 드러나서도, 너무 많이 숨어도 안 된다. 한 번에 세 땀씩 새겨 넣는 상침(上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크기와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바늘이 움직이는 동안 일체의 허튼 생각도 용납되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는 올곧은 정신이야말로 가사를 조성하는 이가 지녀야 할 최우선의 덕목이다.


“제일금강당불 제이아미타불 제삼석가모니불 제사미륵존불 제오아촉불 제육묘색신불 제칠묘음성불….”


바늘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김보살의 입가에 부처님 명호가 맴돈다. 염불은 정신이 흐려지거나 잡념이 스미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바느질 한땀에 부처님 명호 한번. 나지막이 읊조리는 칭명불이 명주실에 담겨 가사를 관통하니, 바늘땀 하나마다 불보살님 한분을 모신 셈이다. 그래서 전통기법으로 지은 가사를 대의(大衣) 혹은 법의(法衣)라 일컫는다.


김 보살의 손 끝에서 바늘은 자유자재로 춤을 춘다. 이번엔 허공침(虛空針)이다. 가사의 조각과 조각을 겹쳐 이어붙이는 대신, 하나의 조각만을 관통하며 바늘땀을 놓는다. 분리된 천 사이에 통로가 생기고, 바느질의 흔적은 겉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허공침이다. 재봉이나 기계로는 불가능한, 오직 전통기법을 지키는 손바느질만이 가능한 기법이다. 허공침이 지난 자리엔 길이 난다. 통문불(通門佛), 부처님이 지나는 통로다. 통문에 넣은 콩 한쪽이 가사 전체를 돌아나와야 바르게 만들어진 전통가사다. 25조 대가사의 경우 332곳의 통문이 존재한다. 통문불이 막힌 가사에는 과보가 따른다. 지은 사람도 입은 사람도 고과(苦果)를 받는다.


그래서 전통을 잇는 이들은 무엇보다 이 통문을 중시한다. 바느질 솜씨에는 차등이 있을지언정 통문 막힌 가사는 가차 없이 폐기해 버리기도 한다. 가사 짓는 이의 정신이 항시 맑게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이렇듯 매서운 기세로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수천번의 바느질과 수천번의 염불이 이어진 후에야 비로소 한 벌의 전통가사가 완성된다. 하나의 가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꼬박 한달이 소요된다. 그 과정은 마치 지난한 수행의 길과 같다. 재단부터 마름질, 바느질까지 무엇 하나 편하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손재주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손재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올곧은 정신, 그리고 굳은 신심이다. 가사 짓는 이의 삶이 끊임없는 정진과 수행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복녀 보살의 삶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국내 몇명 안되는 전통가사 손바느질 전수자다. 스물 다섯, 처음 가사를 지은 순간부터 여든 무렵 마지막 가사 불사를 회향한 순간까지, 한평생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김 보살에게 있어 가사 짓는 일은 삶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수행이었다. 붉은색 가사 조각과 바늘, 그리고 하얀색 무명실과 함께하는 순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치열한 수행자였다.


은사 담화 스님과의 인연으로 젊은 시절부터 그녀를 봐왔다는 단양 영통사 주지 우경 스님은 김 보살을 일컬어 “코끼리 같은 끈기와 불심을 지닌 보살”이라고 전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했어도 사소한 일 하나 남 시키는 법이 없는 원칙주의자셨어요. 한평생 가사 불사의 일환으로 마음을 닦은 덕인지 사안을 보는 나름의 식견이 있어 다른 신도들은 ‘득도한 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철저하게 원칙에 따라 가사를 짓는 것은 물론이고 삶의 방식 있어서도 한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전통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오직 손바느질만으로 완성된 가사는 스님들께 무주상 보시했다. 김 보살은 어떠한 경우라도 가사를 팔거나 이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일이 없었다. 가사는 오로지 순수한 공양물이어야 했다. 신도들의 시주를 받거나 장사를 해 모은 돈으로 원단을 마련했고, 가사 하나를 완성하면 인연이 닿은 스님에게 공양 올렸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꼬박 60년이다.


한평생 무수히 많은 가사를 짓고 또 보시해 온 그 남다른 원력의 이면에는 금강석과 같은 굳은 신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신심은 유난스레 험난했던 삶의 흔적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만큼 힘들었던 삶에서 오직 불교만이 유일한 의지처였으니, 어찌보면 그녀의 남다른 신심은 고통의 결실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복녀 보살은 1929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던 시기였다. 그녀는 14세 어린나이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됐다. 어머니가 두 손 가득 쥐어준 홍시는 일본군 위안부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간절한 모정이었다.


철부지 새댁은 시어머니의 구박에 하루가 멀다하고 눈물바람이었다. 임신이 늦어지자 시집살이 설움도 배가 됐다. 온통 멍이 든 가슴을 기댈 곳은 오직 부처님뿐이었다. 결국 출가의 결심으로 집을 나와 영주 희방사에서 무명초를 깎았다. 그러나 출가 인연은 쉬이 닿지 않았다. 이미 뱃속에 큰딸이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출가를 포기한 채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무렵, 그녀는 새롭게 찾아온 불연을 만난다. 경상도 영천사에서 만난 한 스님의 가사가 계기가 됐다. 전쟁 후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 낡을 대로 낡아 헤진 스님의 가사가 그렇게 눈에 밟힐 수가 없었다.
“손수 가사를 지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어떨까.”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 보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스님도 아닌 재가자가, 그것도 여자가 가사를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길로 양공스님(가사 짓는 소임자)을 찾아갔다.


전통가사 조성법을 배우는 과정은 말 그대로 혹독했다. 그녀는 자막대기로 맞아가면서도 끈덕지게 버텨냈다. 손바느질은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를 통해 불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이후 그녀는 삶이 힘들 때마다 가사를 지었다. 밤낮 없이 바느질에 매달리다보면 어느새 참기 힘든 고통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40대 중반,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고 아들마저 잃었을 때에도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때 김 보살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 혼란스러운 정신을 추스릴 새도 없이 사찰을 찾았다. 집에서 철원 심원사까지 한 시간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기도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큰딸 윤진주씨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운 상태였음에도 매일같이 한 시간 거리를 걸어 사찰을 찾았다”며 “그때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에게 불교가 참으로 각별했음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마지막 가사불사 역시 고난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김복녀 보살은 69세에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두 번의 마비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바늘을 손에 쥐기는커녕 하루하루 나약해져만 가는 기력을 붙잡기도 벅찼다.


마치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로웠던 생의 마지막 순간, 김 보살은 무슨 생각에선지 바늘 대신 ‘금강경’을 들었다. 오래된 도반이 주고 간 사경집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읽고 또 읽었다. 무려 20만 번의 독송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는 두발을 디디고 섰다. 나중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정도까지 회복됐다. 그녀를 아는 몇몇 불자들은 한평생 가사 공양한 공덕이라며 찬탄의 시선을 보냈다.


영주 안양사에서 오백나한을 친견한 것도 딱 그 무렵이었다. 오백나한을 친견하고 돌아온 김 보살은 바늘부터 찾아 쥐었다. 오백나한을 가사에 옮겨 조성키로 마음먹은 것이다. 생애 마지막 불사였다. 전주지 담화 스님과의 오랜 인연으로 몸을 의탁한 단양 영통사가 자연히 마지막 불사도량이 됐다.


“연세가 그렇게 많으셔도 새벽 예불 한번 빠진 적이 없어요. 항상 염불을 하고 경전을 그렇게 탐독하셨지요. 불사를 시작할 당시엔 안경을 끼고도 바늘귀에 실을 못 꿸 정도로 시력이 나쁘셨는데, 바늘 잡은 지 삼일만에 안경을 벗고 바느질을 합디다. 그것이 바로 원력이  아닐까 생각했지요.”(영통사 주지 우경 스님)


“어머니는 항상 몸이 아프셨어요. 그런데 바늘만 쥐면 싹 나으니 그 모든 것이 다 마장이라고 하셨죠. 특히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시력이 나빠져 사람의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셨는데, 마지막으로 가사 불사하실 때 가 뵈니 가느다란 가사 조각의 올 하나까지 다 보인다고 하시대요. 부처님 가피라고 항상 감사해 하셨지요.”(큰딸 윤진주씨)


김복녀 보살은 지난 2009년 생애 마지막 불사를 회향했다. 꼬박 10년이 걸린 불사였다. 완성된 가사는 태고종단과 스님들께 전해졌다. 그리고 그해 김 보살은 암 진단을 받았다. 어딘가 몸이 아픈 것도 아니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불사를 마무리하고 “조금 쉬고 싶다”며 딸네 집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병원 검진을 받고 암이 발견된 것이다. 이미 말기였다. 의사는 2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병원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다고 해서 집으로 모셨어요. 그 후로 3년인가를 더 사셨죠. 기력이 있으실 때는 항시 염주알을 돌리고 그마저도 힘들 땐 가만히 누워 염불을 하셨습니다. 암 투병이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하던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별다른 고통을 내색하진 않으셨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 성품 그대로 이부자리와 머리맡이 깔끔한 지 살필 정도로 정신도 맑으셨지요.”


윤씨는 “가사 조성에 따르는 공덕이 그렇게 크다고 하니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의 고통이 적었던 것도 혹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전했다.

 

 

▲김복녀 보살이 손수 지은 25조 대가사. 큰딸 윤진주 씨가 소장하고 있다. 

 


김 보살은 지난 2012년 여든 셋의 나이로 세연을 접었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가사 두 점은 큰딸 윤진주(60)씨가 소장하고 있다. 둘 다 25조 대가사로, 하나에는 오백나한이, 다른 하나엔 천불명호가 수놓아져 있다. 윤 씨는 “어머니의 마지막 작품을 기증할 곳을 찾고 있지만 좋은 인연처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한평생 이어진 철저한 수행과 정진의 결과물인 만큼 아무 곳에나 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의 유작이기도 하지만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기법의 손바느질로 조성한 가사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김복녀 보살의 가사에는 그녀의 평생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가지런한 바늘땀에서 그녀의 철저함과 끈기, 정신력이 묻어났다. 가사를 지을 당시 이미 팔순에 가까웠음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는 바늘땀은 그녀가 한평생 지켜온 원력과 신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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