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무등산 증심사 [끝]
43. 무등산 증심사 [끝]
  • 법보신문
  • 승인 2013.12.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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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생 지킨 공덕 흙으로 빚어 올려 생사의 경계 벗다

855~868년 철감선사 창건
한국전쟁 때 오백전만 남아
광주 젖줄 경양방죽 축조한
광주목사 김방이 나한 불사
오백나한 모두 흙으로 조성

 

 

▲오백나한님 모두 흙이 빚었다. 아니, 부처님 가피로 목숨 구한 광주목사 김방의 절절한 신심이 빚었다. 부처님 모시고 옆으로 아난과 가섭 존자, 16제자들이 자리했다. 화려한 닫집이 없어 담백했다. 자리가 비좁아 대들보에도 오백나한님들이 앉았다. 좁은 곳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리한 오백나한들 표정도 제각각이다.

 

 

도량이 숨을 죽인다. 쓸데없는 소리가 없다. 풍경조차 입을 닫았다. 하늘만 시끄럽게 운다. 마음도 번뇌로 잡음이 인다. 2년간 기도도량 40여곳을 순례했다. 무엇을 찾아 헤맸나. 도량이 빗소리에 잠긴다. 빗물은 군말 없이 전각 처마 따라 흐르고, 무등산은 조용히 물안개만 피워 올린다.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국립공원 자락에 증심사(주지 연광 스님)는 12월에 내리는 비로 겨울에 흠뻑 젖고 있었다.


도량이 내어줄 품을 찾았다. 그리고 하늘이 허락한 틈을 기다렸다. 비 그치고 물안개가 가라앉았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대웅전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밟았다. 지장전 오른쪽에 두고 정면을 응시하니, 처연한 탑 2기가 객 마음처럼 섰다. 하나는 머리를 잃어 키가 작았다. 나란히 섰어도 둘은 달랐다. 이름도 딱히 없다. 이끼 입고 깨지고도 말 한 마디 없다. 기도의 의미를 찾고자 나선 순례, 일이라는 성가심이 서로 들쭉날쭉했던 그 마음 같다. 절름발이 마음으로 걸었던 순례처럼.

 

 

▲지장전 오른쪽으로 탑 2기가 처연하게 비를 맞는다.

 


조계종 제21교구본사 송광사 말사인 증심사의 창건은 855년과 86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감 선사가 산문 열었고, 고려 때인 1094년 혜조 국사가 중창했다. 일제강점기 땐 한국불교 정통도량을 자부하기도 했다. 내선일치 정책에 따라 우리나라와 일본불교가 같다는 공동원류설이 나돌 때였다. 만해 스님은 염불종, 조동종이 주류를 이루는 일본과 임제종 중심인 선종 주류의 우리나라는 그 뿌리가 다름을 일갈했다. 이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곳이 증심사였다고. 유서 깊은 역사는 증심사 도량 전체를 광주문화재 자료 1호라는 얼굴을 갖게 했다.


증심사(證心寺), 역사보다 그 이름에 마음이 쓰였다. ‘마음을 증득하는 절’이란 뜻이다. ‘마음 맑히는 절’이라는 징심사(澄心寺)라고도 불렸다. 1574년 고경명이 쓴 ‘유서석록’엔 증심사라고 적고 있다. 1926년 최남선의 ‘심춘순례’엔 증심사가 징심사로 불렸던 흔적이 있다.


“증심(證心)은 본지 징심(澄心)이라 하여 예로부터 저명한 절이요,…증심문으로 취백루로 하여 대웅전을 마주보면 회승당과 설선당의 두 당우가 좌우에 벌여 있고, 오백나한전이 그 뒤에 있어….”


1925년 ‘광주읍지’엔 ‘징심사’로 기록돼 있다. ‘심춘순례’와 ‘광주읍지’는 정유재란(1579)과 한국전쟁(1950) 사이에 쓰였다. 전쟁은 파괴를 부른다. 화마를 피하기 어렵다. 해서 증심사를 징심사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순천 선암사는 불이 빈번해 건물 벽에 ‘바다 해(海)’자를 써놓고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증(證)’의 ‘말씀 언(言)’ 부수를 ‘물 수(水)’로 바꿨다는 설명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경험을 잊지 않았던 것이리라. 해서 한국전쟁 때 오백전만 화마를 피했던 게 아닐까. 마음을 증득한다거나 맑힌다는 뜻의 이름 유래를 들으니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예서 기도의 의미라는 신심의 심장을 찾기로 했다.

 

 

▲겨울비에 젖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1951년 4월22일 밤 9시 한국전쟁 때 불탔다. 하나 오백전만은 주민들 도움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백전 앞에 섰다. 세종대왕 재위 시절 광주의 생명젖줄 경양방죽을 축조한 광주목사 김방이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1443년 불사한 게 오백전이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돼 1609년 다시 지었다. 왜 그렇게 주민들은 오백전을 지켰을까. 왜 김방은 관세음보살 현몽을 꿨을까.


광주는 가뭄이 잦았다. 흉년으로 먹을 게 부족해 민초들 가슴도 물기 없는 땅처럼 메말라갔다. 김방은 3년에 걸쳐 경양방죽을 쌓았다. 3년에 걸쳐 53만명을 동원해 마무리했던 큰일이었다. 일꾼들 식량이 걱정이었다. 개미를 살렸던 김방의 작은 공덕이 큰 과로 돌아올 줄이야. 김방은 우연찮게 공사현장에서 발견한 개미집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 뒤 개미들이 물어다 준 곡식으로 식량을 해결했다. 첩첩산중이었다. 가까스로 경양방죽을 만들었으나 계속된 가뭄은 민초들 삶을 피폐하게 했다. 김방은 어떻게든 목마른 땅에, 메마른 민초들 가슴에 단비를 내리고 싶었다. 간절함은 관세음보살님에게 닿았다. ‘가뭄을 막기 위해선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전을 지어 그곳에 오백나한을 모셔라.’ 김방은 증심사 중창과 함께 오백전을 불사했다. 그러나 날로 쇠약해지는 몸은 ‘날마다 닭똥집 20개를 먹어야 낫는다’는 처방을 받았다. 민초들이 바친 닭으로 김방은 건강을 찾았지만 살생의 업은 두터웠다. 세종대왕 꿈에 수백 마리 닭들이 찾아와 김방의 사형을 청했고, 세종은 금부도사에게 이 일을 맡겼다. 얼마 뒤 세종대왕은 꿈에 나타난 사미스님 수백명에게 “김방이 살생을 했으나 경양방죽과 증심사 오백전을 지어 민초들 생활을 편안케 했으니 벌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어찌하랴. 세종대왕은 명을 거뒀고 이 일로 김방의 불심은 더 깊어졌다.


여기쯤인가 싶었다. 기도의 의미를, 간절한 마음을, 심장을 찾고 싶었다. 전각 중앙, 석가모니 부처님이 자리했고 양옆으로 아난과 가섭 존자에 이어 16명의 제자들과 함께였다. 오백나한님 모두 흙이 빚었다. 아니, 부처님 가피로 목숨 구한 광주목사 김방의 절절한 신심이 빚었다. 화려한 닫집이 없어 담백했다. 자리가 비좁아 대들보에도 오백나한님들이 앉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 나한을 모시다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좁은 곳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리한 오백나한들 표정도 제각각이다. 피식, 웃음으로 찰나의 번뇌만 사라질 뿐이었다. 절절한 마음은 찾을 길이 없었다. 김방이 남긴 간절함의 온기는 아직이었다.

 

 

▲한국전쟁 화마를 피한 오백전과 3층 석탑 그리고 비로전.

 


오백전 오른쪽 비로전은 문이 열려 있었다. 법당을 청소하는 보살 2명이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궂은 날씨에 도량을 찾은 객이 참배할 수 있도록 길을 비켜섰다.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낯빛이 흙빛이었다. 착각이었다. 불살생계 지킨 공덕을 흙으로 빚어 올려 생사의 갈림길서 벗어났던 김방 때문이다. 철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131호)이었다. 무거운 마음이 부처님 따라 웃었다. 녹을 막기 위해 들기름 발라 놓은 탓에 거칠던 부처님 미소가 부드럽게 살아났던 게다. 흙빛 아니라 살빛 생기가 돌았다. 3배로 참배한 뒤 비로전을 나서자 보살들이 귤 2알을 건넸다. 허기진 속까지 온기가 스몄다.

 

 

▲철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131호).

 


번잡한 마음 살피러 대웅전 뒤쪽을 걸으니 석조관음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이 원통전을 지붕 삼아 다시 내리는 비를 피하고 있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담양군 남면 서봉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왔단다. 원통형 높은 보관을 쓰고 있어 국보 제124호 한송사석조보살좌상과 보물 제139호 월정사석조보살좌상과 닮았다고 한다.


대웅전 처마에 숨어 겨울비를 피했다. 무등산에 피었다 지는 물안개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애초부터 얻을 것도 얻은 것도 얻어야 할 것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모든 기도도량은 저마다의 사연 속에 수많은 기도객들 신심이 아로 새겨졌을 터. 모두들 자신들의 간절한 마음만큼 선한 인연을 만들어왔다.


기도는 절절한 갈망이다.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 젖을 찾고 중병 앓는 이가 의사를 찾고 닭이 알을 품는 그 간절함이 배어야 한다. 그런 간절한 기도는 내면을 바꾸고 그 공덕은 세상을 바꾼다. 참회로 업장 소멸하고 정진으로 내면 바꾸면 선하게 바뀌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가피이자 기도가 아닐까.


통도사의 김현중(84, 보덕화) 노보살이 한 얘기가 맴돈다. “(기도는)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인 게지.”


광주의 진산 무등산에 내리던 겨울비가 멎었다. 062)226-0108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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