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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심명은

기자명 혜국 스님

“성철 스님은 신심명을 중도총론이라 설하셨지요”

신심명(信心銘)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선종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 ?~606년) 선사께서 지은 선어록입니다. 100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 이처럼 아름다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구라는 별에 오셔서 평생을 가르치신 내용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평생을 길에서 사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중생을 위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 불교인재원이 2009년 9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봉행한 ‘혜국 스님의 신심명 대강좌’.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연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명쾌하게 설하셨는지
지금까지도 경이롭고 놀랄일
신심명 중도 가장 잘 설명해 

그 가르침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중도 즉, 중도연기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신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어떻게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으셨는지 놀랍다. 중도에 대해 신심명 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성철 스님은 신심명을 한마디로 ‘중도총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신심명은 그 자체로 귀한 어록입니다. 신심명은 넉자씩 해서 146구절에 불과합니다. 여덟 자씩 해서 73구절밖에 안됩니다. 물론 누락되었다는 한 구절까지 더하면 74구절이겠지요. 그런데 이 짧은 글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모든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내용을 제가 모두 말씀드린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設)이고요, 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정성을 다하여 승찬 선사와 신심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절에 처음 들어온 때가 반세기 전 일입니다. 그 당시 절에서 글을 배울 때는 어떤 경전이든지 먼저 소리를 내어 수없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귀로도 듣고, 입으로도 보고, 눈으로도 듣고 이렇게 해서 전체 글을 내 뼛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신심명’ 내용을 같이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하나니 / 욕득현전(欲得現前) 이어든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니 /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로다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뿐이니 /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 터럭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지나니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 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투게 됨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되나니 /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여섯구절을 읽었습니다.

신심명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서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젊은시절 해인사에서 연비할 때 가장 원했던 일이 몇 생을 다시 태어나도 오직 스님의 길을 가겠다는 발원이었습니다. 신심명이나 육조단경과 같은 진리의 가르침에서 벗어남이 없는 길, 깨달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스님의 길을 가겠노라고 간절히 발원했습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 길을 갈 것이니 부처님께서 지켜봐주시라는 서원이었습니다. 이발원을 증명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연비를 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본 철학이나 습득한 지식이 얼마되지 않지만, 내가 배운 지식은 모두 우리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보면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지 참나를 모르기 때문에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내 자신의 습관을 익혀놓고 그 습관에 중독되어 업이 되면 그 업이 나를 끌고 다니게 됩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주인과 종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하여 스님의 길을 가겠다고 발원을 했던 겁니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금강경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사구게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세계, 내 감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계가 모두 부처의 자리에서 나오고 있다는데, 과연 부처란 어떤 경지인지 그게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눈 과 귀, 코 와 입, 그리고 몸과 의식 이라는 6근(六根)과 그 대상인 6진(六塵), 그 사이 분별식인 6식(六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6근이 주관이라면 6진은 객관입니다. 6근과 6진이 만나면 6식이라는 이 세계가 생기는데 이를 18계(十八界)라고 합니다. 이러한 18계, 즉 이 세계가 창조되는 제법무아의 원리, 그게 바로 부처라는 겁니다. 그 내용이 금강경에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한겁니다. 모든 형상 속에서 형상 없는 본질을 보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나라는 독립된 존재가 없고 모두가 연기 공성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고민 끝에 부처님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가르침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여기서도 연기법을 모르는 거예요. 연기법이란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네가 있고 네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봅시다. 이것 안에 이것저것이 서로 나뉘어 있고, 이것이라는 생각 안으로 들어가 보면 팔만사천 번뇌가 이것저것으로 서로 나뉘어 이것이라고 할 게 따로 없는 겁니다. 이것 안에 이것과 저것이 수천만으로, 수십조로 나누어지니까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연기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인가하는 막막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부처님 경전을 배우려면 좋으나 싫으나 그냥 쭉 읽어야 했습니다. 당시 학인들은 강의를 듣기 전에 일단 외워야 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신심명을 배우고 싶거들랑 자다가 일어나서도 그냥 경구가 나올 정도로 일단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금강경 사구게(金剛經四句偈)도 모른 채로, 원각경을 보게 되었지요.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무한한 허공이 나의 깨달음에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또 모르겠어요. 다시 열반경으로 가봤더니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 爲樂)’이라고 나옵니다. 풀이하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음이 없나니 일체가 생멸법이라 나고 죽는 법이니 생멸 그 자체가 사라지면 영원한 열반락이라는 의미인데 이것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반면에 그때까지 제가 배운 학문은 지동설 아니면 천동설이었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천동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난 다음에 갈릴레이란 학자가 이를 다시 주장하니, 지금은 지동설을 모두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지동설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동설도 아니고 천동설도 아닙니다. 전체 전(全)자 전동설(全動設)입니다. 우주전체가 유기적으로 돌아간다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모두 다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일체가 다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여러분들과 나는 동그란 축구공 같은데 앉아서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그런 와중에서도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고, 우리는 축구공 같은 동그란 곳에 거꾸로 매달려 천야만야(千耶萬耶)한 허공 속을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구는 우리를 태우고 태양계를 돌고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지동설이니 천동설이니 매우 국한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불교야말로, 제행무상이야 말로 절에서만 배울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든 학문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동설을 배워야 앞으로 우주과학이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도 생각일 뿐 변해가는 존재원리 근본자리로 돌아가면 “영원한 평화”라는 중도연기는 여전히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법화경을 보니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이라 즉,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가 눈으로 봐서 그렇지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대로가 부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모두가 진리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화엄경(華嚴經)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일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 만큼 일체 우주만물이 마음의 그림자일 뿐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 이런 뜻인데, 이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결국 신심명에서 강조하는 중도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 즉 마음의 눈을 떠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들이 전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중도법이며 연기법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어느 가르침하나 중도연기 아닌 게 없더군요. 그 가운데서 연기 중도를 명료하게 정리해 주신 내용이 신심명에 잘 압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중도총론 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신심명으로 중도연기를 배워 봅시다. 이렇게 서론을 말씀드리고 신심명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혜국 스님은
1948년 제주 출생으로, 1962년 해인사로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0년 22세에 ‘성불’(成佛)을 발원하며 오른손 손가락 3개를 연비했다.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 동안 생식 및 장좌불와를 하며 매서운 정진에 몰입했다. 경봉, 성철, 구산 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하면서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제주 남국선원 무문관을 개원하고 2004년 빈터만 남은 충주 폐사지에 석종사를 창건했다. 현재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행납자와 재가수행자들을 정진의 길로 이끌고 있다.
 
 

 

 [1227호 / 2014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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