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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연재 보기 | 조정육의 그림, 불교 가르침에 빠지다
2. 전(傳) 이암, ‘매’“병고로써 양약을 삼나니 지금 이대로가 바로 극락”
조정육  |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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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7  17: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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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

달력이 왔다. 인연 있는 절에서 보낸 새해 달력은 2014년이란 서기(西紀)뿐만 아니라 2558년이란 불기(佛紀)와 4347년이란 단기(檀紀)까지 적혀 있어 일석삼조다. 어디 그뿐인가. 서기로 된 큰 숫자 옆에는 음력을 알려주는 작은 숫자가 적혀 있어 명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잊고 지나치기 쉬운 시어른들 생신 날짜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지장재일이나 관음재일 등의 기도 날짜도 적혀 있어 불자(佛子)라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살림밑천이다. 날짜 밑에는 친절하게 절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박혀 있으니 깜박깜박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전화번호부다. 이 달력을 참고하면 올 한 해도 별 실수 없이 살겠구나, 생각하며 맨 뒷장을 넘겼다. 그런데 거기에 ‘갑오년 조견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매 그림은 삼재를 막는 부적
소원 들어주는 적극적 의미도

사바세계서 고통 피할 수 없어
불교는 부적 대신 마음공부 강조

갑오년이야 2014년이니까 그렇다 쳐도 조견표는 뭐지? 알 수 없어 사전을 찾아봤다. 조견표(早見表)는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든 표’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글이지만 무슨 뜻인지 잘 몰라 갸우뚱하고 있는데 나이별로 총운과 납음이 나온다. 총운은 전체 운이란 뜻 같다. 나의 총운을 보니 동그라미가 이중으로 그려졌다. 대길년(大吉年)이다. 크게 길한 해라는 뜻이니 좋다는 것 같다. 납음은 뭔지 몰라 사전을 찾아봤으나 역시 잘 모르겠다. 전문 용어인 것 같아 그냥 넘어간다. 아랫부분에는 각 띠별로 삼재(三災)에 대해 적어놓았다.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까지 적혀 있는데 세밀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다.

삼재는 흔히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의 세 가지 큰 재난을 뜻한다. 천재(天災), 지재(地災), 인재(人災)에 의한 사고를 뜻하기도 한다. 재난 중에 물, 불, 바람 그리고 하늘, 땅, 사람과 연관되지 않는 재난이 어디 있으랴.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재난을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이니 삼재는 재난의 총체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재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이 아니다. 화산 폭발이나 지진 등의 천재지변과, 불가항력적인 사고를 비롯해 교통사고나 사기 등의 신체적 피해와 물질적 손해가 이에 해당된다. 불치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일 때도 마찬가지다. 그저 애타는 심정으로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잘 나가던 사람이 구설수에 올라 느닷없이 삭탈관직된 것도 재난이다. 이런 불행은 예고가 없다. 강렬하면서도 급작스럽다. 설상가상(雪上加霜)에 병상첨병(病上添病)이니 당하는 사람은 혼이 빠진다. 웬만한 문제라면 어떻게 대처해보겠지만 워낙 큰 문제일 경우에는 맥 놓고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사람은 누군가 초자연적인 대상이나 신에게 무턱대고 빈다. 몸에 뭔가를 지님으로써 위안을 삼는다면 더욱 좋다. 그렇게 등장한 그림이 부적(符籍)이다. 부적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고 악귀를 쫓기 위해 쓰는, 붉은 글씨나 무늬가 그려진 종이를 뜻한다. 궁중에서는 삼재를 막아주는 부적으로 매 그림을 선호했다. 민간에서는 발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매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을 썼다. 이밖에도 부적은 까치호랑이, 등용문부적, 관재부적, 귀신불침부 등 다양하다.

기왕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금상첨화다. 부적은 삼재를 막아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점차 발전해 소원을 들어주는 적극적인 의미까지 담게 된다. 부적을 지닌 사람이 부유하고(富) 오래 살고(壽) 과거에 급제하고(貴) 자식이 많기를(多男子) 바라는 욕망을 반영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수복강령부귀다남자(壽福康寧富貴多男子)’라는 아홉 글자에 압축해 여러 공예품이나 그림에 장식했다. 장롱이나 탁자, 도자기나 나전함에서 상서로운 뜻이 담긴 아홉 글자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알고 보면 우리는 삼재를 막아주고 행운을 불러주는 수많은 글자와 그림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은 삼재를 막아주는 대표적인 부적 그림, 매를 감상해보자.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삼재가 든 사람이 집에 있을 경우 그 액을 면하기 위해 설날에 매 그림을 대문에 붙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무시무시한 눈매를 가진 매가 선택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1499~?)이 그린 ‘응도(鷹圖)’는 그 어떤 사악한 악귀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러워 보인다. 등은 검고 배는 흰 색인 매가 등을 보인 채 고개를 돌리고 횃대 위에 앉아 있다. 매의 두 발은 비단끈으로 횃대 기둥에 묶여 있다. 이렇게 횃대에 앉아 있는 매를 가상응(架上鷹)이라 부른다. 정교하고 꼼꼼한 필치로 그린 가상응은 배경을 전부 생략한 까닭에 더욱 눈에 띄고 두드러진다. 특히 매의 임자를 밝히기 위해 꽁지 털 속에 매어 둔 흰색 시치미는 배의 흰털과 함께 이 매의 영험함을 잘 드러낸다. 시치미는 자기가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알면서 모르는 체할 때 ‘시치미 떼지 마라’고 하던 그 시치미다. 매를 훔친 사람이 시치미를 떼어 내고 자기 매인 것처럼 행세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 전(傳) 이암, ‘응도(鷹圖)’, 비단에 색, 98.1×54.9cm, 보스턴 미술관.

이런 매의 이미지는 어떤 모본이 있었던지 거의 비슷비슷한 자세를 취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 민예관에 소장된 이암의 또 다른 ‘응도’도 거의 흡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조 때 화원을 지낸 정홍래(鄭弘來:1720~?)의 ‘욱일호취(旭日豪鷲)’도 배경이 삽입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암의 ‘응도’와 매의 형태가 똑같다. ‘응도’를 그린 이암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의 증손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이암이 그림을 잘 그려 중종이 승하하셨을 때 어진을 그리는데 뽑혔다고 적혀 있다. 신광한(申光漢:1484-1555)이 쓴 ‘기재별집(企齋別集)’에는 이암이 그린 흰색 매와 검은 색 매 두 마리를 보고 지은 시가 담겨 있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소재로 한 동물화가 대부분인데 ‘응도’는 그가 초상화뿐만 아니라 화조영모도(花鳥翎母圖)에도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예리한 붓끝으로 혼을 불어넣은 이암의 매 앞이라면 그 어떤 사나운 악귀라도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 같다. 들삼재든 눌삼재든 날삼재든 그 어떤 삼재라도 전부 피해갈 것이다. 이제 이 부적을 지닌 사람에게는 아무런 불행도 일어나지 않고 오로지 즐겁고 행복한 일만 거듭해서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행은 나쁜 것일까. 오직 행복한 일만 있고 불행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이 과연 진정한 축복일까. 2년 전 이맘때 필자는 뇌종양 수술을 했다. 수술 후 온 몸에 호스를 주렁주렁 매달고 누워 있을 때는 휠체어라도 좋으니 앉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며칠 후 몸에서 호스를 빼고 휠체어에 앉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또 며칠이 지나자 링거폴대를 잡고 혼자 걸을 수 있었다. 더욱 행복했다. 그 과정을 거쳐 얼마 후에는 온전히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그 때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머리는 여전히 붕대로 칭칭 감은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두 발로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수술 후에 다리가 마비됐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던 보행이었으니 그 기쁨이 더했다. 그때 알았다.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걷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렇게 걷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수술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귀한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잃고 나서야 안다. 곤란을 겪어보기 전에는 우리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일상이 얼마나 가치 있는 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잃은 것 없이 얻기만 한 사람은 자기 손에 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옛 선인들이 너무 일찍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불행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출세하다보니 그 자리의 무게에 맞지 않게 오만방자하게 처신하게 된다. 당연히 손가락질당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재부적을 붙여 삼재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병고를 통해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보왕삼매론에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라고 가르친 뜻이다.

누군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어도 좋으니 제발 좀 고통스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가 사는 이곳은 극락세계가 아니라 사바세계인 것을. 사바세계는 산스크리트어로 ‘인토(忍土)’ 혹은 ‘감인토(堪忍土)’라는 뜻이다. 참고(忍) 견디어(堪) 나가야 하는 세상이다.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다.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고통이나 재난이 피해가는 세계가 아니다.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수시로 찾아드는 세계가 사바세계다. 순경계보다는 역경계가 더 많은 세계에서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는 ‘티베트의 즐거운 지혜’에서 ‘고통의 원인은 사건이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전개될 때 그것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고 가르친다.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공부가 불교 공부다. 불교 공부는 삼재가 들었을 때 매 그림을 붙이는 대신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가르친다. 삼재가 곧 삼복(三福)이고 역경계가 곧 순경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지금 이대로가 그대로 극락이라던 선사들의 말씀은 결코 빈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진실이다. 보왕삼매론의 두 번째 역설은 무엇일까. 워낙 유명한 구절이니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28호 / 2014년 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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