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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년 즐긴 茶 “참으로 호사였구나”

기자명 김민경
  • 사회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사진설명>찻잎을 따는 것부터 덖고 털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일이 없다.
김민경 기자가 뭉쳐 있는 찻잎을 골고루 털어 펴고 있다.




곡우(穀雨:음력3월19일) 일주일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 만들기를 위해 저 멀리 남도에 내려갔다. 원래 찻잎은 곡우 전부터 수확이 가능하다. 차 관련 상표가운데 ‘雨前’이라고 표기된 것은 곡우 전에 딴, 그러니까 가장 어린 새순으로 만든 上品의 차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하루 걸러 봄비 오시고 기온이 평년보다 낮은 날이 많아서 찻잎의 생육이 더뎠다. 그래서 곡우를 한참이나지나서야 차밭에 내려가게 됐다.


새순 ‘딱 세 잎’만 따라고?

한국선종차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대표가 기자에게 자신의 차밭과 차 만드는 전과정을 공개하는 선의를 베풀었다. 그의 차밭은 남도 땅에서도 아직 원시림이 남아있는 깊은 산 속에 숨어있다. 그는 이 차밭을 19년 전 한 스님의 소개로 만났다. 이후 20년 가까이 차철에만 열흘 정도 머무르며 찻잎을 따고 바로 그 자리에서 차를 만들면서 차밭의 건강한 보존에 힘써왔다. 차밭은 옛 절터 옆 산비탈에 2천평 규모로 조성돼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무성한 야생차밭 가운데엔 굵은 대나무가 듬성 듬성 모양 좋게 자라나 있었다. 현장에는 박 대표로부터 한학과 차문화를 수강하는 제자들과 동춘차후원회원 등 15명 가량의 사람들이 사흘전부터 들어와서 밤을 새워가며 차 만들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주변 경치에 눈도 돌리지 않고 어서 빨리 햇찻잎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 바로 차밭에 들어갔다. 차밭은 몹시 비탈진 대다가 토질이 마치 굵은 모래를 뿌려 놓은 듯했다. 신출내기 일꾼은 찻잎을 따는 것보다 제대로 서있는 요령부터 익혀야 했다. 그래도 얼마나 오래전부터 별러온 차일인가. 십 수년 째 남이 만들어온 차를 마시며 차 만들기의 수고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깨를 움츠려온 입장이라서 찻잎을 따는 바로 그 비탈에서 몇 번을 굴러도 좋겠다고 여길 만큼 이번 차 만들기 체험을 무척 기대해온 터였다.

특상품의 차를 만드는 찻잎을 흔히 ‘1창 2기’라고 한다. 차나무의 가장 어린 새순 딱 세 이파리를 묘사한 말이다. 잎도 안 벌어진 가장 맨 위 삐죽한 새순과 바로 그 아래 작은 손톱만한 두 이파리는 한아름도 넘는 차나무에서 많아야 두 번 정도 채취 할 수 있다. 즉 차나무 두 세 그루에서 채취 할 수 있는 찻잎의 양은 한 주먹거리도 안될 만큼 적다. 게다가 찻잎은 그냥 따는 것이 아니라 잎들을 솥에 덖을 때 잘 덖을 수 있도록 가지를 짧게 끊어가며 따야 했다. 그리고 잎을 내어주는 차나무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나무를 안 다치게 하라니, 어떻게? 나무한테 ‘야, 너 많이 아팠냐?’하며 물어 볼 수도 없고. 살살 뜯으라는 소린가, 내심 고시랑거리며 찻잎을 따기 시작하는데 그 찻잎들이 얼마나 보드랍고 예쁘던지, 내가 마치 작은 애기들을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찻잎를 따게 되자 남이 애써 만든 차를 타박하던 지난 내 자신이 떠올랐다. 한통의 차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차밭을 종일 가로지르며 수고했을까에 생각이 이르자 바로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몸을 묻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찻잎 따기는 해가 기울 때까지 계속됐다. 허리가 몹시 아프고 눈도 침침해졌다. 차밭 여기저기에 흩어져 조용히 차를 따던 일꾼들 가운데 몇 명이 고단함을 잊으려는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새소리만 간간히 들리던 적막한 숲 속에서 듣는 구성진 트로트는 각별한 맛이 있었다. 박 대표는 신참일꾼이 걱정되는지 슬쩍 지나치며 ‘힘들지 않느냐’고 묻고는 “많이 힘들면 잠시 대나무에 귀를 대어 보라”고 말하고 다시 차나무들 속으로 사라졌다.


덖고 비비며 밤샘 작업

그의 말대로 잠시 손을 놓고 대나무 몸통에 귀를 바짝 붙였다. 깊은 바닷속에서나 만날 법한 해저음이 들렸다.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하던지 그때부터 대나무만 만나면 ‘저 대나무 소리는 어떨까’하며 들러붙었다. 대나무에 껌처럼 붙어 있는데 저 아래서 그만 내려오라는 외침이 들렸다. 작업장에 모여서 각자 채취한 잎들을 큰 광주리에 쏟았다. 그래도 그동안 차를 많이 마신 가락이 있어서인지 모양 좋고 깨끗한 찻잎을 따왔다며 고참들이 칭찬해 주었다. ‘이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찻잎을 따 본 사람과, 따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다 일어날 정도로 매우 의기양양해졌다.

찻잎따기를 마친 작업장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한쪽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때어 가마솥을 달구고 한쪽에서는 돗자리를 펴들고 차 비빌 준비를 했다. 박 대표가 아궁이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전체 차일 가운데서 가장 힘든 일이며 중요한 작업인 찻잎덖기를 시작했다. 초벌덖기는 (신참의 눈으로 보기에)숨을 죽이는 정도로만 덖는 것 같았다. 박 대표는 “이 초벌덖기가 차맛의 절반 이상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찻잎이 솥에서 나왔다. 아궁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재빨리 노곤해진 찻잎을 받아들고 찻잎 비빌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찻잎 하나 하나가 또르르 잘 말려지도록 비벼야 한다. 이 작업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30분도 안돼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요령을 아는 고참들도 차 비비기가 몇 시간 째 계속되자 지쳐갔다.

차 비비다가 죽고 싶은 서원까지는 세우고 있지 않은터라 슬쩍 손을 털고 일어나 비벼낸 찻잎을 한지 위에 잘 털어 펴는 작업장으로 발길을 두었다. 찻잎 터는 이를 그들끼리는 ‘털쇠’라고 부르고 있었다. 혼자 분주해 하던 털쇠가 ‘마침 손이 모자랐는데 잘왔다’며 “찻잎이 뭉쳐 있으면 저희들끼리 발효되어 차맛을 버리게 되니 이파리가 안 다치도록, 그러나 낱낱이 잘 털어내야 한다”며 간단한 듯 하지만 많은 부담을 주는 ‘털쇠 행동강령’을 일러주었다. 모든 찻잎을 비벼내고 털기까지 마친 후 어둠이 내리는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경험한 ‘육체노동’ 끝의 밥맛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새벽녘 햇차 한 잔에 ‘행복’

두 시간 여 쉰 후 두 번째 차 덖기가 시작됐다. 같은 양을 덖어도 두 번째 덖기는 훨씬 오래 걸린다. 박 대표는 전날 밤에도 한자리에 앉아서 새벽 5시까지 무려 8시간을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차를 덖었다. 하루 종일 차 작업을 진두지휘하느라 매일 겨우 한 두 시간 가량만 눈을 붙인 그는 다시 그 어려운 고행에 도전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일순간 비장해졌다.

차를 덖는 아궁이 옆에는 불을 때는 화부(불 조절이 매우 중요하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와 차를 한번씩 덖어낼 때마다 가마솥 안을 행주로 훔치는 사람, 덖은 찻잎을 가져 갈 사람, 이어서 덖을 찻잎을 소쿠리에 담아 들고 대기하는 사람, 다 쓴 행주를 깨끗한 약수에 빨아낼 사람, 그리고 기자처럼 생전 처음 차 덖기를 관람하는 사람 등 열명 가까운 사람이 빙 둘러 앉거나 섰다. 나머지 대원들은 방안에 불을 밝히고 다 만들어진 차에서 작은 티들을 골라냈다.

오후 7시경 시작된 마지막 작업은 일곱 시간만인 밤 두시에 끝났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마지막 ‘의식’이 치러졌다. 그날 만든 차를 잘 우려 맛보는 일이다. 깊은 숲 속 옛집의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작은 알전구 빛에 의지해 차를 마셨다. 차 만들기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찻물에 뜬 하얀 백호들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차를 마시며 낮에 차밭에서 생각해낸
문구를 수정했다. ‘이 세상의 차 마시는 사람은 차를 만들어 본 사람과 안 만들어 본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로.

한 잔의 차 속에 깃든 높은 공력을 진실로 깊이 깨우치게 된 하루였다.



김민경 기자 mkki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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