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 대구 동화사 비로암 민애대왕 사리호

불보살 의지해 원한의 쳇바퀴 멈추려던 간절한 염원 담겨

윤회만 돌고 도는 줄 알았는데 원한과 복수, 권력에 대한 욕심도 끝없이 돌고 도는 것 같다. 그게 미망(迷妄)인줄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욕심을 떨치지 못하니 그게 중생이다. 아비가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자식이 복수로 갚으려 들고, 복수를 당한 쪽은 또 그들대로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품은 채 복수를 위해 칼을 간다. 그렇게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돌고 도는 원한과 복수 그리고 배신의 쳇바퀴를 멈출 수는 없을까? 중생의 지독한 욕심은 중생 스스로는 못 풀고 불보살의 자비심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대구 팔공산 동화사의 산내암자 중에 비로암(毘盧庵)이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터에 법당과 선방, 삼층석탑이 제대로 들어선 곳이다. 삼층석탑 앞에 서면 팔공산 연봉들이 아득히 먼 곳까지 이어진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아주 장관이다.

▲ 비로암 전경. 왼쪽 하단에 보이는 탑에서 민애대왕 사리호가 발견됐다.

지금부터 얘기할 민애대왕(敏哀大王) 사리호(舍利壺)는 바로 이 삼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 1966년에 비로암 삼층석탑이 도굴되자 이듬해에 도굴 때문에 흐트러진 부재를 수리하기 위해 해체했는데 이 때 사리를 담았던 곱돌로 만든 항아리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항아리 겉면에 새겨진 이백 스물 넉 자에는 비로암 삼층석탑을 신라 제48대 경문왕(?~875)이 제44대 민애왕(817~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 863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글은 여느 사리조성기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신라사의 이면을 알고서 이 글을 보면 당시 왕권 획득을 위해 벌어졌던 유례없이 참혹했던 골육상쟁이 배경처럼 떠오름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지긋지긋하게 되풀이 되는 원한을 풀고자 하는 열망이 글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먼저 사리호에 새겨진 원문을 살펴본다.

“국왕(경문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福業)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기록한다. 대체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익 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비록 팔만사천법문(法門)이 있다지만 그중에 마침내 업장(業障, 말·행동·마음 등으로 지은 악업에 의한 장애)을 소멸하고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은 탑을 세워 예배하고 참회하며 도를 닦는 것보다 더 넘치는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해 보니 민애대왕 김명은 선강대왕의 맏아들이고 금상(今上, 당시의 왕인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 경문왕은 민애왕의 작은 매형인 희강왕의 손자)이다. 839년 정월 23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춘추 23세였다. 장례 치른 후 24년이 지나서…(이하 파손)…복업을 추숭하려고 동화사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새로 세운다. 863년 9월 10일에 썼다.”

(國王奉爲 閔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 若夫聖敎所設利益多端雖有八萬四千門 其中聿銷業障廣利物者 無越於崇建佛禮懺行道伏 以閔哀大王諱 宣康大王之長子 今上之舅 以開成己未之年太簇之月下旬有三日 奄弃蒼生春秋二十三 葬□□霜二紀 □□□□□亠 惠□□□□□至欲崇蓮坮之業於□桐藪願堂之前 創立石塔冀効童子 聚沙之義 伏願□□ 此功德□□五濁之緣 常□□□之上爰及□□□中跋行蠢□□識之類 咸賴□□生生 此無朽時 咸通四年歲在癸未無射之月十日 記)

현왕이 죽은 선대왕을 위해 사리탑을 세워주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다. 더군다나 20여 년 전에는 현왕인 경문왕 가문과 민애왕 가문은 복수와 복수의 실타래가 얽히고설켰던 적대 가문이었음에랴. 그런데 왜 경문왕은 그런 민애왕을 위해 귀한 사리를 얻어 그의 극락왕생을 추모하기 위해 석탑을 세운 것일까?

1966년 삼층석탑 도굴 때
사리 담았던 항아리 발견
겉면에 224자 새겨 있어

왕위 놓고 참혹한 골육상쟁
2년간 왕이 3명이나 교체

질긴 악연 사슬 끊기 위해
신라 경문왕이 863년 조성
원수였던 민애왕 명복 빌어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내전(內戰) 수준의 궁중 내 암투를 알아야 한다. 838년과 839년의 두 해 동안 2명의 왕이 죽고 3명의 왕이 즉위하는 등 신라가 건국한 이래 천 년 동안 유례가 없던 사상 초유의 험악한 정변이었다. 핏줄로 이어진 왕족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골육상쟁의 참상이라 차마 그대로 얘기하기 어렵고, 그냥 무대에서 3막으로 된 비극을 관람한다고 여기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

제목-왕권 쟁탈을 향한 궁중의 암투
시대 배경-통일신라 9세기
공간 배경-궁중
주연-제43대 희강왕(김제륭), 제44대 민애왕(김명), 제45대 신무왕(김우징)
조연-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 청해진 대사 장보고

▲ 1966년 대구 비로암 삼층석탑 내에서 발견된 신라 민애대왕 사리호. 여기에는 왕권 획득을 위해 벌어졌던 유례 없이 참혹했던 사건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첫 막은 사리호의 주인공 민애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왕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김명(金明)으로 나이는 갓 약관을 벗어났지만 시중(侍中)벼슬을 맡고 있었다. 신라의 왕족은 성골이 자연도태 되자 그 아래 진골에서 왕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신라 하대에 갈수록 후사 없이 승하하는 왕이 많아 국법대로 적자(嫡子) 상속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 야심만만한 신하라면 왕권이 그다지 먼 곳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김명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그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된 발단은 자신도 왕족의 핏줄인데다가, 현왕인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이 후사를 못 두고 갑자기 죽은 데서 비롯한다. 왕위 계승의 가장 유력 후보는 흥덕왕의 사촌동생 김균정(金均貞, ?~836)과 조카 김제륭(金悌隆, ?~838)이었다.

이 둘은 숙질 사이건만 서로 왕이 되겠다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 때 시중 김명은 냉정히 정세를 살핀 뒤 김제륭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김균정 측은 이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두 세력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국 무력을 동원해 피를 보고야 만다. 서라벌 한복판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결국 김균정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 김우징은 부상당한 채 간신히 목숨만 구하고 도망쳐 나왔다. 갈 곳은 당시 중앙 권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 ?~846) 진영밖에 없었다. 장보고는 비록 왕권투쟁에서 밀렸다곤 해도 왕족인 김우징이 자기를 찾아온 데 감격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김우징은 여기서 다친 몸을 추스르며 마음 속 깊이 원한을 품은 채 복수의 날만 기다렸다.

두 번째 막이 오른다. 승리한 김제륭은 왕좌에 오르며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그가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다. 논공행상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 주었던 시중 김명을 최고 공신인 상대등으로 임명해 두터운 신임을 나타내며 축제의 건배를 외친다. 하지만 김명은 그 정도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서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그는 신하가 아니라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 마음도 모른 채 희강왕은 왕권의 달콤함에 취해 김명에게 정사를 맡기고 쾌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명은 남몰래 사병(私兵)을 양성하는 등 쿠데타를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그러기를 2년, 김명은 기어이 주군인 희강왕을 배신하고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빼앗으려 했다. 희강왕은 놀랐다. 자신이 신임하던 김명이 자기에게 칼끝을 들이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들의 인심도 어느새 이미 자신을 떠나고 김명한테 가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 본 희강왕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않았다. 절망이 가득한 얼굴 한편의 입가엔 자책의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3년 전 왕위가 탐나서 삼촌을 살해하고 등극했던 것 아닌가? 그 업보가 지금 자기에게 돌아온 것인데 이제 와 뭘 후회하랴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결의 길로써 결자해지하려 하였다. 김명은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왕에 추대되었으니 그가 곧 제44대 민애왕이다. 오늘의 테마인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장엄에 그 이름을 올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희강왕의 자결로 모든 일은 끝났을까? 아니다. 아직 마지막 3막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퇴해 장보고의 그늘 아래 숨어 지내던 김우징이 3막의 주인공이다. 가족을 잃은 원한만을 마음에 새긴 채 복수를 꿈꾸려 이 바다 끝까지 피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던 그에게 드디어 때가 왔으니, 한 때 자신을 패퇴시켰던 김제륭과 김명이 이제는 서로 적이 되어 맞선다는 정변의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는 장보고에게서 군사 오천 명을 빌어 군대를 결성해 곧바로 경주로 향했다. 김명의 군대는 강했다. 838년 12월 지금의 전남 나주 전투에서 관군에 대승하여 승기를 잡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1월 경주를 코앞에 둔 대구까지 일사천리로 내달았다. 양측은 여기서 마지막 일대 결전을 벌여 수십일 동안 서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이 이렇게 치열했을까?

전투는 결국 실전에 능한 장보고 군사를 거느린 김우징의 승리로 끝이 났다. 패배한 민애왕은 왕궁에서 도망 나와 민가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겨우 23세의 젊은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승리한 김우징은 그렇게 소원하던 왕위에 즉위하니, 그가 곧 제45대 신무왕이다. 그로서는 3년 전 죽은 선친을 대신해 옥좌에 올랐으니 드디어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복수에도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한 업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왕위에 오른 지 세 달 만에 갑자기 서거하고 만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역사는 말문을 닫는다. 여하튼 이로 인해 두 가문의 2대에 걸친 복수극은 끝나고 비극은 막을 내린다.

내전은 끝났지만 잇단 정변으로 나라는 두 편으로 나뉜 채 너무도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초석이 흔들릴 판이었다. 그러자 신무왕, 곧 앞서의 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김우징의 후손이자 제48대 임금 경문왕이 결단을 내렸다. 오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한때 가문의 원수였던 민애왕을 추모하기로 하였다. 전쟁이 난 지 24년째 되는 해인 863년 동화사 비로암에 탑을 세우고 여기에 민애왕을 추모하는 글을 새긴 사리 항아리를 봉안토록 한 것이다. 더 이상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화쟁의 선언이기도 했다.

천 년도 넘은 옛날이야기라고는 해도 권력을 향한 인간의 속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비와 용서를 최고의 가치로 친다. 왕권쟁탈의 욕심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불러왔지만 결국 그 핏자국을 씻어낸 건 불교의 자비심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이곳만한 헛된 욕망과 참회의 장이 교차하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현장이 바로 동화사였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30호 / 2014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