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근대 판화사’ 펴낸 판화가 홍선웅

칼 끝에 새긴 민족자긍심 격동의 역사 관통하다

▲ 판화가 홍선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족 자긍심만큼은 잃지 않으려 했던 예술가들의 염원이 근대 판화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고 했다. 사진 남수연 기자

소설 ‘태백산맥’의 표지 판화 주인공 홍선웅. 그의 작업실이 있는 판화공방 2층은 서재다. 홍 작가는 ‘작은 도서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

2010년 여름, 필자는 그의 서재를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서재산책’에 여념 없던 필자에게 그는 시집 한 권을 불쑥 내 보였다. 최석두 시인의 ‘새벽길’. 표지가 압권이었다. 추운 겨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누구라도, 시를 읽기도 전에 어떤 시집일 것이라는 직감을 떠올릴 만큼 강렬했다. 살펴보니 1948년 출간된 시집이다.

홍 작가는 “최은석의 목판화”라며 최은석의 목판화를 표지화 한 또 다른 시집 ‘나 사는 곳’(오장환 시인)을 뽑아 보였다. 그의 손길을 따라가 보니 ‘고서’들이 즐비했다. 시집 뿐 아니라 잡지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 때 홍 작가는 “2003년부터 모아 온 자료”라며 “지금 한국 근대 판화사를 집필 중”이라 했다. 결국 홍 작가는 4년간의 집필 끝에 ‘한국 근대 판화사(미술과문화)’를 내놓았다.

조선후기를 시작으로 개화기와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초기, 1930년대와 40년대의 판화를 소개하고 있다. 작가들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는지, 어느 매체에 실려 대중에게 전달 됐는지까지 상세하게 서술해 놓았다. 따라서 추각, 인각, 타각법에 따른 판각기법의 변화를 읽는 것은 물론 판화 자체가 주는 회화미감에도 흠뻑 젖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격동의 근대사에서 나타난 민족정신이다. 저자는 그 한 예로 고종황제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고 한다.

“고종 황제가 유약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신식 의료시설 추진과 인쇄 기술 도입, 교육기관 설립을 통한 신문화정책을 우선시 했습니다. 근대화 사업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 한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부산, 원산, 인천 개항과 함께 납활자가 도입됐다. 목판에 그림을 새긴 판목과 연활자를 같은 판에 앉혀 인쇄한 간행물은 이때부터 등장한다. 그 한 예가 교과서다. 조선의 역사와 웅지를 고취시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고종 황제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라 저자는 말한다.

자료수집 10년·집필 4년
신문잡지 수록작품 집대성
광복염원·선각자 고뇌
시대아픔 담은 판화 ‘절절’

국권상실 아픔 함께 한
민영환 소재 ‘혈죽도’ 아찔
조선지광 표지 ‘백두산’
민족기상 고취시켜 압권

서구인쇄 기술이 도입되면서 판화계는 또 한 번 요동친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신문잡지 등의 출판문화가 성장하면서 판화는 더욱 주목을 받는다. 대한제국 시대서 보이는 신문잡지 만평은 압권이다.

▲ 대한민보에 실린 양기훈의 ‘민충정공 혈죽도’. 1906년 목판화.

‘을사조약’이라 알려진 제2차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1905년 11월30일 자결했다. 1906년 7월4일 그의 유품이 있던 본가의 영연실에서 유가족은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를 발견했다. 겸곡생이란 필자는 ‘혈죽기(血竹記)’제목으로 이 사실에 대한 글을 써 ‘대한매일신보’ 1면 상단에 실었다. 4면에는 양기훈의 목판화 ‘민충정공 혈죽도’가 전면 특보로 실렸다. 이외에도 남정철의 찬문이 있는 양기훈의 ‘혈죽도’와 안중식, 현채, 정인호의 ‘혈죽도’ 역시 당시 역시 민영환의 고고한 정신을 담고 있다.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배우창곡도’ 판화만평도 눈에 띤다. 판소리 명창 권삼득이 사랑가를 부르는 가운데 ‘이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저 산으로 가며 복국, 복국, 복국. 복복국’하는 장면이다. 국권회복의 간절한 소망을 뻐꾸기 소리에 빗대 부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서도 판화가들은 고군분투했다. 나혜석은 ‘개벽’창간 1주년기념 특호 13호 표지에 ‘개척자’를 발표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대지 한 가운데서 괭이로 밭을 일구는 농민의 모습을 담았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조선인을 소재로 했습니다. 개척자의 실천적 의지와 희망을 붉은 해로 상징하고, 굵고 힘찬 필선을 살린 각법으로 노동을 통한 삶의 의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 1922년 창간된 월간잡지 ‘조선지광’ 창간호 표지. 오일영의 목판화 백두산.
나혜석의 개척자도 눈에 띄지만 ‘조선지광’창간호 표지는 보는 순간 굳건하면서도 비장한 힘이 느껴진다. 1922년 11월 창간된 월간잡지 ‘조선지광’은 정치와 시사, 경제, 학술, 문예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룬 잡지였다. 창간호 표지는 백두산을 소재로 한 오일영의 밑 그림을 어느 각수가 판각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동양화의 가는 필선이나 전통 고판화의 가는 선각과는 달리 두터운 각선을 사용했다.

“화면 전체에 웅비하는 기운이 느껴지도록 굵은 각선 각법을 사용했습니다. 비록 국권을 상실했지만 우리 민족의 핏줄 속에 흐르는 백두산의 기상만큼은 잃지 말자는 뜻을 담은 수작입니다.”

▲ 1927년 발간된 ‘조선농민’ 제3권 제8호 표지. 안석주 작품 추정.
농민계몽 월간잡지인 ‘조선농민’은 1925년 창간됐다. 이 잡지는 일제 당국의 삭제, 압수, 발매금지 등의 탄압을 받았지만 농민의 호응을 받으며 꾸준히 발행됐다. 조선농민 제3권 8호 표지는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한 손에는 낫을 들고 밀밭을 향해 가는 당당한 농민의 모습이다. ‘러시아 모더니즘 영향을 받은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게 홍 작가의 설명이다. ‘한국 근대 판화사’를 받아 본 일본 마치다 시립 국제판화미술관 다키자와 쿄지 학예원은 책에 실린 작품 중 최고작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고 한다. 저자는 안석주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방기, 좌우익 정당과 문예 진영 간에 신탁통치 찬반논쟁이 격렬했다. 당시 화단에서는 일제 식민지 미술의 잔재와 부역 미술에 대한 철저한 논의와 청산이 없는 가운데 미술단체들이 창립되기 시작했다.

“많은 미술인들은 해방을 맞고도 ‘미술인은 미술에만 전력하는 것이 건국을 돕는 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지호는 ‘일제 식민지를 통해 깊게 뿌리박힌 이기주의적 경향’이라며 ‘일제의 정신적 유산인 직역봉공의 정신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예술인들의 또 다른 고뇌가 시작 된 셈입니다.”

이후 사실주의에 바탕 한 수준 높은 판화들이 등장했다.

“일제 강점기 전후에도 판화는 민중과 함께 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담았고, 광복의 염원을 새겼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족 자긍심만큼은 잃지 않으려 했던 선각자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서려 있습니다.”

 
홍선웅의 ‘한국 근대 판화사’는 칼 끝에 새긴 민족자긍심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 판화사를 넘어 격동의 역사 속에서 예술인들이 가졌을 고뇌마저 담아내고 있기에 무게가 실린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30호 / 2014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