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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막존순역(莫存順逆)

기자명 혜국 스님

“항상 마음 들여다보라, 생각에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 혜국 스님은 틈틈이 불자들과 함께 중국순례를 했다. 혜국 스님이 중국 청정계율의 상징인 계단사에서 불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증애심만 없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하시고 바로 뒤를 이어서“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벌어진다고 못을 박아 놓습니다.

뭇 중생들이 생각하기를 “아! 도가 쉽구나. 우리가 이미 도안에 있고 그 도는 완벽하게 갖추어 있으니 언제라도 보게 되겠지.”, 이런 당치않은 생각을 할까봐 염려하는 노파심이 역력히 보입니다. 벌써 말에 떨어진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스승들만이 갖는 대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도를 바로 보려거든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순역심(順逆心)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순역심이란 거슬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함인데 일체 세상사 순역심 아닌 게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순역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제발 생각에 놀아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몰록 무심삼매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바로 한 생각 차이가 천지현격(天地懸隔)이 되는 도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양변을 초월한 도리인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합니다.

순역심은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중생들의 마음
세상사 순역심 아닌게 없어
생각 따라 모두가 천지현격
양변 초월한 중도 통찰해야

인류, 중도 삶 깨닫는다면
현재 인구 70배 공존 가능
경쟁 집착해 에너지 고갈

자연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는 그 빛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춥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는 물론 동식물이나 곤충들에게도 똑같이 비춥니다. 완전평등이지요.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하는 순역심이 전혀 없습니다. 양변이 없으니 그냥 중도입니다. 태양빛만이 아니라 공기도 큰사람이라고 더 주고 작은 사람이라고 적게 주는 법이 없습니다. 꼭 같이 준다는 생각 자체도 없습니다. 그냥 조건 없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어찌 너니 나니 거슬림이니 따름이니 하는 순역심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본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려면 무심경계를 맛봐야 합니다. 그 길은 곧 일념이 되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두 참선할 때 화두란 바로 그러한 도리 즉, 중도를 보여준 말길이 끊어진 세계입니다. 심행처멸(心行處滅)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중도를 여실하게 보여주신 마음의 언어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중도연기를 직접 깨달으시고 그 세계를 역력하게 보여주신 귀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이시니 가섭 스님이 파안대소하신 소식,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해주신 소식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간화선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가 있고 티베트에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살아있듯이 우리나라에 화두참선법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간화선을 직접 참구할 수 있다는 게 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화두가 마음의 언어라고 하여 그런 언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심(無心)의 언어로 보여주신 게 화두입니다.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라”, 잣나무든지 소나무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뜰 앞에 잣나무라는 말을 가지고 보여준 그 깊은 뜻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숙제처럼 준 것이 아니고 그냥 마음을 보여주신 건데 마음눈이 열리지 않으니 보지 못하는 겁니다. 누가 듣는지, 듣는 참 나를 모르니까요. 순역심이 끊어진 화두참선에 인생한번 투자해 보십시오. 정말 한번 크게 죽어볼만한 일입니다. 그게 곧 영원히 사는 길이니까요.

이렇듯 태양도 물도 공기도 대지도 온자연이 일체 모든 생명에게 평등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평등 그 자체죠. 자연이 우리를 대하듯이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진리는 하나라는 이름도 넘어선 원융무애(圓融無礙)이니까요. 어떠한 상대를 만나든 간에 싸워야할 경쟁자로 보지 말고 같이 공존해야 할 존재, 꼭 내 곁에 있어야 할 필요한 인연으로 보도록 하십시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순역심을 벗어난 상태, 거슬림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따름까지 지나가는 그림자로 받아들여서 결국 공성이라는 믿음을 세워 보십시오. 이렇게 양변에 걸림없는 존재원리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고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좋다, 나쁘다에서 나쁘다는 거슬림만이 아니라 좋다는 따름까지 초월하여 중간이라는 세계마저 없어진 거죠. 원융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에 ‘대자유’라 부득이 이름하기를 중도라고 한 겁니다. 본래 존재원리입니다.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새로 꾸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본래 모습이건만 우리가 그 지극한 도에서 너무 멀리 나와서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바로 보라고 네가 바로 부처라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평생 설하신 겁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에서 그러한 본래모습, 지극한 도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일체 순역심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만약 인류역사가 이러한 상생의 원리에 눈을 뜨기만 한다면 즉, 중도의 삶을 깨달아서 서로 공존의 원리로 살아간다면 지금 현재 지구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를 싸워야할 적으로 보기 때문에 경쟁하고 투쟁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여 지구자원이 이렇게 모자란다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군비경쟁에 들어가는 그 엄청난 돈을 농업이나 학문, 수행문화에 투자한다면 지금보다 70배가 아니라 그 이상도 상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중도라는 지극한 도가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가를, 그래서 세계의 석학 ‘토인비’는 이러한 원리를 불교경전에서 알고 나서 얼마나 마음에 느낀바가 컸으면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한 석학의 눈으로 볼 때 20세기의 가장 큰일이 2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달나라에 인간이 발을 디딘 일도 아니고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랍니다. 부처님께서 중도선언을 하신 중도원리가 ‘토인비’라는 석학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중도상생의 원리가 이렇게 여여(如如)하고 진실이 그런데도 그렇게 삶이 안 되는 원인을 순역심에 이어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네 탓이다 내 탓이다, 싸우는 병폐가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병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필요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습니까, 이러한 중도원리를 감정표현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언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석두 스님께서 조용히 앉아 참선하고 있는 약산 스님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응, 그러면 그냥 한가하게 앉아 있다는 얘기로구먼. 스님 앉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옛 스승들의 언어가 이렇게 통연명백합니다.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중도를 이 보다 잘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석두 스님의 게송입니다.

“언제나 함께 살아도 이름도 알지 못했는데 자유자재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일천성인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어찌 범부들이 쉬이 밝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는 의미는 안다, 모른다 하는 순역심이 아닙니다. 모를 뿐인‘청정’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원인이 신심명에서 걱정하는 바와 같이 순역심으로, 위순상쟁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우주자연이 모든 생명을 완전히 평등하게 받들고 있건만 인간들의 불평불만은 끊어질 줄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욕망, 그 욕망에서 온 조그만 손님이 온통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계에서는 욕망이 단연코 왕이거든요. 욕망은 성성적적 지극한 도에 가장 약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누구나 지극한 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요한 마음의 바다에 위순상쟁이라는 감정,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그만 파도가 일어납니다. 위순상쟁하여 시위심병이라, 나와 남을 가르는 갈등이 파도를 일으키는 겁니다. 이때를 당하여 파도를 싫어하는 순역심이 더 큰 파도를 일으키게 합니다. 왜냐면 파도라는 욕망은 없애려고 할수록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바로 바람이거든요.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도 거칠 수밖에요, 그럴수록 더 파도를 없애려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번뇌망상으로 바로 보리(부처)라는 진리를 세상에서 배워보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바로 바닷물이다. 파도를 없게 하려거든 파도를 없애려고 파도와 싸우지 말고 바람을 잠재우면 파도란 실체는 없다. 번뇌 망상이라는 파도는 바닷물이라는 부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와 같은 진리,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금생에 만났다는 것, 이건 정말 행운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보여주신 중도의 가르침 말입니다. 이런 법 만나기 그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기법에 의지해서 파도라는 순역심과 싸우지 말고 순역심의 본질, 파도의 본질을 바로 보십시오. 어디서 파도가 일어났는가를 자세히 지켜보십시오. 파도가 바닷물에서 바람에 의해 잠깐 변형된 바닷물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보여질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보십시오. 바람이 자고 나면 파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람만 없으면 파도는 더 이상 파도일 수가 없습니다.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니, 옳다 그르다 하는 갈등의 바람, 너다 나다 하는 거슬림과 따름의 바람, 이 바람이 다 그림자요 환영임을 알기에 부처님께서는 공(空)이라고 하신 겁니다. 있던 파도가 없어져서 공(空)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든지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점이 단점일수만은 없게 됩니다. 죄업도 영원한 죄업일 수가 없습니다.

▲ 혜국 스님
자기 단점을 바로 보는 안목이 생기는 거죠. 장점도 단점도 내 마음의 바다에서 만든 내 작품이고 내 인생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 아는데 그치지 말고 몰록 깨달으면 더 바랄게 없고요.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요.

 

 

 

 

 [1231호 / 2014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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