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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대사가 양무제에게

“황제여, 모든 선의 으뜸은 집착하지 않는데 있나이다”

504년 양무제 불제자 선언
공무 바빠도 아침저녁 예불
511년 승려 육식 금지 선언
동아시아불교 새 전통 마련
동태사 등 수많은 사찰 건립
지나친 숭불에 반발도 커져

부대사 농사지으며 큰 깨침
양무제에게 선의 참뜻 설명
아무리 백성 위한 일이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 당부


 “삼가 나라의 주인 구세(救世)보살에게 아뢰나이다. 이제 상·중·하의 선(善)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받아 지니옵소서. 상급의 선이라 함은 가슴을 비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집착하지 않음을 으뜸으로 합니다. 중급의 선은 몸을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여기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종지로 삼습니다. 하급의 선이라 함은 뭇 생명을 보호해 잔인함을 이기고 살생을 버림으로써 온 백성이 모두 계를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 훗날 수많은 선사들의 찬사를 받는 부대사.
진(陳)나라 동양군 오상현(현 절강성 의오시)의 부흡(傅翕, 497~569).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바보로 통했다. 어릴 때부터 제 것으로 여기는 게 없어 무엇이든 내어줬다. 누가 화를 내든 욕을 하든 그저 웃기만 했다.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어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은 마을사람들과 포구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저녁 무렵, 부흡은 물고기가 담긴 광주리를 물속 깊이 담그더니 이렇게 말했다. “물고기들아, (너희들 업에 따라) 가려면 가고, 남으려면 남거라.” 애써 종일 잡은 물고기를 풀어주는 걸 본 마을사람들은 어리석다며 혀를 찼다.

부흡에게 숭두타(嵩頭陀)라는 인도의 승려가 찾아온 것은 24살 되던 521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비바시불(毘婆尸佛)께 서원을 세웠는데 지금 도솔천궁에는 의발이 남아있네. 도대체 그대는 언제 돌아가려는가?”

숭두타는 그를 물가로 데려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했다. 부흡은 깜짝 놀랐다. 화려한 관을 쓴 자신의 머리를 둥그런 광채가 환히 비추고 있는 게 아닌가. 이어 숭두타가 들려주는 온갖 교의들은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얘기들…. 순간 부흡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는 숭두타에게 말했다.

“못 쓰는 쇠들에게는 풀무가 필요하고, 병자들에게는 훌륭한 의원이 있어야합니다. 중생 제도하는 일이 급하거늘 어찌 나마저 그런 쾌락에 연연하겠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숭두타는 멀리 송산 쌍림수를 가리켰다. 부흡은 숭두타가 일러준 곳에 작은 처소를 마련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부지런히 도를 닦았다. 부흡은 밭을 갈고 콩, 보리, 오이, 과일 씨를 뿌렸다. 달이 차고 이지러졌다. 곡식과 과실도 익어갔다. 간혹 누군가 그것을 훔치러 오면 부흡은 얼른 달려가 광주리에 가득 담아주었다. 어느 날엔가는 게송도 지었다.

‘빈손인데 호미를 잡았고/ 걸어가매 물소를 탔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는데/ 다리는 흐르건만 물은 흐르지 않네(空水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부흡이 송산에 머물자 산의 정상에 황색 구름이 맴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차 송산을 운황산(雲黃山)으로 불렀다. 부흡이 농사짓고 정진하기 7년째, 그가 선정에 들었을 때였다. 석가(釋迦), 금속(金粟), 정광(定光) 등 세 분의 여래가 빛을 펼쳐 자신의 몸을 환히 비추었다. 부흡은 그것을 보고 선언했다.

“나는 이제 수능엄(首楞嚴)의 오묘한 경지를 얻었노라.”

부흡은 자신을 괴롭히던 마지막 번뇌까지 떨어져나갔음을 알았다. ‘능엄경’ ‘반야경’ ‘금강경’ 등 어느 경전을 보아도 막힘이 없었다. 부흡은 스스로 ‘선혜대사(善慧大師)’라는 호를 짓고 법을 설했다. 당시 그 지역에 혜집(慧集)이라는 유명한 법사가 있었다. 부흡보다 6살 많은 혜집은 그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나의 스승은 미륵의 응신(應身)이시다.” 혜집의 선언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쌍림수 아래로 모여들었다. 부흡의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다. 마을사람들도 더 이상 그를 바보로 보지 않았다. 한 번은 지방관이 요설로 백성을 현혹시킨다며 부흡을 가뒀다. 옥중에서 그는 십수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의 몸이나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흡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커져갔다. 지방관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따라 커졌다. 지방관은 부흡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부흡이 “부대사” “선혜대사” “미륵불 응신”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527년, 부대사가 31살 되던 해, 동양군(東陽郡)에 혹독한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든 풀처럼 쓰러져갔다. 민심도 흉흉해졌다. 부대사는 전답을 팔아 구제에 나섰다. 그의 아낌없는 보시에 인근 부자들이 거들고 나섰다. 흉년이 끝나갈 무렵 부대사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은 더욱 커져 있었다. 그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승려도 있었고 재가자도 있었다.

부대사는 깨침이 명징해질수록 양나라 건국자인 무제(梁武帝, 464~549)를 자주 떠올렸다. 황제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그를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도 굳어져갔다.

▲ 남조 최고의 전성기를 불러오며 불교문화를 활짝 꽃피웠던 ‘보살황제’ 양무제.
‘보살황제(菩薩皇帝)’ ‘불심천자(佛心天子)’로 불리는 양무제. 본명이 소연(蕭衍)인 그는 대대로 도교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깊었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음악과 서예, 문학에도 뛰어났다. 학자가 됐을 소연을 황제로 만든 것은 난세였다. 제(齊)나라 황제의 먼 친척이었던 소연은 젊은 나이에 고관으로 등용됐다. 498년 3월, 북위 효문제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침공했을 때였다. 최전선의 지휘자마저 대경실색해 도주했지만 소연은 달랐다. 그는 뛰어난 전략과 용맹으로 북위 군대를 패퇴시켰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명제(明帝)도 깊은 신임을 보냈다. 소연은 곧 보국장군에 임명됐다. 오래지 않아 병약한 명제가 세상을 뜨자 아들인 소보권(蕭寶券)이 제위에 올랐다. 그는 폭군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새 황제의 말 한 마디에 숱한 대신들이 죽어갔다. 소연의 친형인 상서령 소의(蕭懿)도 포함돼 있었다. 소보권은 소연까지 죽이려했다. 분노한 소연은 이에 맞섰다.

501년 3월, 북위의 재침에 대비해 군사력을 키우던 소연. 그는 소보권의 동생 소보융(蕭寶融)을 황제로 내세웠다. 그해 소보권이 있던 수도 건강(健康, 현 남경)을 포위한 소연은 폭군 소보권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502년 4월8일, 소연은 유약한 황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제국이 명멸하고 황제가 단명하던 시대. 48년의 긴 재임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양나라 무제시대의 시작이었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용병과 정치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양무제. 38살에 제위에 오른 그는 제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낮에는 정사에 몰두했다. 밤이면 치국(治國)의 이념을 찾으려 책에 묻혔다. 그때 무제가 발견한 것이 바로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이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실존 인물인 아육왕은 덕을 갖추어 세계를 통일하고 정법으로 세상을 다스린 이상적인 제왕이었다. 아육왕이 이교도를 믿다가 뒤늦게 불법에 귀의한 점도 눈에 띄었다. 무제는 천하를 통일해 덕으로 다스리는 중원의 아육왕이 되고자 원을 세웠다.

무제가 제위에 오른 지 꼭 2년째인 504년 4월8일, 그는 불교인의 길을 걷겠다고 세상에 선포했다. 황제의 뜻을 따르려는 2만여 대중이 중운전(重雲殿) 앞에 모였다. 무제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큰소리로 읽어나갔다.

“양나라 황제 소연이 머리 숙여 시방삼세의 거룩한 부처님과 법보(法寶)와 스님들께 예배드립니다. 엎드려 불경을 보니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불심(佛心)이라는데 여타의 선법(善法)으로 비할 데가 없나이다. 여래께서는 중생을 삼계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이끌고자 지혜의 횃불을 환히 밝히셨습니다. 역대로 삿된 법에 물들었으나 이제 미혹을 버리고 돌아갈 바를 알게 됐으니 정각(正覺)에 귀의해 의지하겠나이다. 제가 미래세에 태어나면 어려서 출가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중생들을 제도해 다함께 성불하기를 발원하오니 원컨대 불보살님께서 증명해주시옵소서.”

불교에 귀의한 무제는 곧 궁전 내 2층 누각인 중운전에 불상을 안치했다. 승려들을 수시로 초청해 법문하도록 했다. 그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중운전에서 예불을 드렸다. 저녁예불 때면 아무리 바빠도 참석하려 했다. 그렇게 무제는 45년을 매일 예불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지었다.

정사에도 부지런했다. 관제(官制)를 새롭게 정비하고 새 법률인 양률(梁律)을 반포했다. 새로운 인재 등용에 애썼고 조세를 경감해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나갔다. 국학원(國學員)은 귀천의 차별을 없앴다. 오관(五館)을 설치해 가난하지만 반듯한 선비들을 초빙해 공자의 학문도 연구토록 했다. 백성들은 무제를 찬탄했고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무제는 검약을 몸소 실천했다. 삼베옷을 입고 부들방석에 앉았다. 짚신을 신고 갈건(葛巾)을 썼다. 공무가 바빠도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예기’ ‘고문주서’ ‘좌전’ ‘장자’ ‘노자’ 등 제자백가서와 ‘논어’ ‘효경’ 등에 주석을 달았다. ‘아육왕경’ ‘공작명왕경’ 등 불경을 번역하도록 했다. 자신도 불경을 연구해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507년 의도(宜都) 태수였던 범진(范縝)이 ‘신멸론(神滅論)’을 저술해 불교사상을 공격했다. 이에 무제는 직접 ‘칙답신하신멸론(勅答臣下神滅論)’을 집필하도록 해 그의 이론을 비판했다. 범진을 불러 대신들 앞에서 공개적인 논쟁도 벌이도록 했다. 무제는 불교에 대한 반발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교단이 부패하고 승려가 존경받지 못하면 아무리 황제가 옹호해도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제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바로 출가자들의 술과 고기를 금하는 ‘단주육문(斷酒肉文)’의 공표였다. 511년 5월, 무제는 고승대덕을 비롯한 승려들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

“제자 소연(蕭衍)이 삼가 아룁니다. 지금의 불제자가 술을 마시고 육식을 즐기면서 죄의 원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의 결과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보시도 없고 인과도 없다는 범부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돈 주고 고기를 사면서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거리낌조차 없습니다. 술은 악의 뿌리이고 마군(魔君)의 위의(威儀)라고 재가신자에게 말해야 하거늘 거꾸로 출가자가 술을 마십니다. 출가자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사람들이 불법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불경에서는 일체의 고기를 끊되 저절로 죽은 것까지도 식용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씀했는데 하물며 죽지 않은 것은 어떻겠습니까? 고기를 먹으면 대자비의 종자가 끊긴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자비란 일체 중생을 다 함께 안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바로 악마의 행실이 됩니다. 중생의 살을 먹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종자가 됩니다. 무시이래로 금생에 이르기까지 육도를 거치며 일체중생이 부모였거나 형제였거나 자손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제는 육식과 음주를 하는 승려에 대해 강력히 제재할 것도 밝혔다.

“제자 소연이 시방의 일체 제불(諸佛)과 존법(尊法)과 성승(聖僧) 앞에 서약합니다. 만약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일이 있다면, 제자가 마땅히 왕법으로 다스려 문초할 것입니다. 승려가 만약 여래의 옷을 입고도 여래의 행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되게 스님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도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같은 이는 제자의 나라 백성으로 (환속시켜) 다시 호적에 편입시킬 것입니다.”

무제는 “오직 허물없는 이라야 남을 책할 수 있으며, 오직 스스로 깨끗한 이라야 남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부터 술과 고기, 음욕을 멀리할 것을 온 세상에 천명했다. 자신이 이를 어긴다면 지옥의 온갖 고통을 겪을 것이며, 모든 중생이 성불하더라도 자신은 아비지옥 한 가운데 남게 해달라고도 서원했다.

무제는 경전과 율장의 해석을 통해 ‘세 가지 깨끗한 고기(三淨肉)’는 먹어도 된다는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무제는 죽는 날까지 술과 고기, 여색을 멀리했다. 심지어 오신채도 철저히 금했다. 517년에는 국가의 제사나 잔치를 여는데 어떤 생명이든 죽이지 않도록 칙령을 내렸다. 태의(太醫)에게도 살아있는 생명으로 약을 조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무제의 불심은 갈수록 깊어졌다. 불사 규모도 점점 커졌다. 광택사(光宅寺), 법왕사(法王寺), 개선사(開善寺), 대경애사(大敬愛寺), 지도사(智度寺), 동행사(同行寺) 등 수많은 사찰을 건립해 나갔다. 521년 9월 착공해 527년 3월 완공된 동태사(東泰寺)는 ‘염부제(閻浮提) 최고의 사찰’이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로 큰 황실사찰이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대규모 9층탑은 단연 압권이었다.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법회도 열렸다. 법회가 끝나면 종종 죄수들에 대한 대규모 사면(赦免)을 단행했다. 무제는 황제로서 처음으로 사신공양(捨身供養)도 여러 차례 실시했다. 그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채 절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짧게는 4일, 길게는 21일간 그렇게 절에 머물렀다. 그럴 때면 신하들이 거액을 사찰에 보시하고 황제를 모셔왔다. 무제에 대한 반감도 커지기 시작했다.

부대사가 무제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532년 1월28일이었다. 부대사는 무제가 보살의 서원을 세워 실천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백성은 물론 일체 생명을 고통에서 건지려는 구세보살(救世普薩)의 길. 무제 아니면 어느 황제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동시에 부대사는 무제의 의지가 굳어질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서원이 집착으로, 숭불(崇佛)이 강압으로 흐르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부대사는 편지에서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뭇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고 했다. 경을 읽고, 절을 짓고, 교단을 지원하는 것은 큰 공덕이다. 허나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야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설파했다. 일체가 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은 것.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집착과 번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편지를 읽은 무제는 부대사를 궁궐로 초청했다. 무제는 부대사와 법에 대해 얘기했다. ‘속고승전’에는 감동한 무제가 부대사를 종산(鐘山) 아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벽암록’ 67칙에는 새로운 얘기가 전한다. 무제와 첫 만남 뒤 부대사는 지공(誌公, 418~514)의 추천으로 궁궐에서 ‘금강경’을 법문하게 됐다. 무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부대사는 법상(法床)에 올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부대사는 돌연 경상(經床)을 치고 곧바로 내려왔다. 훗날 송(宋)의 원오극근(1063~1135)은 “언어문자를 번거롭게 사용하지 않고 ‘금강경’을 강의했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공은 부대사가 18살 때 입적한 고승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무제는 직접 ‘열반경’ ‘정명경’ 등 수백 권의 불경을 일일이 풀이해 펴냈다. 문무백관과 사절단을 위해 법을 설했으며, 사찰 건립을 돕고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형벌에 처할 때에도 감형을 해주거나 눈물을 흘렸다. 살인죄에 해당하는 자들을 살려주기도 했다.그는  자비로웠다. 하지만 귀족들은 갈수록 부패했고 사치향락은 극에 달했다. 오랜 평화는 군대의 약화를 불러왔다. 동위(東魏)의 장군으로 양에 투항했던 후경(侯景, 503~552)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548년이었다. 그해 12월 수도 건강이 함락됐다. 후경에게 유폐된 무제는 다음해 5월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조 최고의 전성기를 불러오며 불교문화를 활짝 꽃피웠던 ‘보살황제’의 마지막이었다.

무제가 동아시아불교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그는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경전을 배포해 불교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승려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동아시아불교 전통도 그의 ‘단주육문(斷酒肉文)’에서 비롯됐다. 무제의 지극한 신심은 훗날 많은 제왕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무제가 떠나고 300~400년 뒤 편찬된 선어록에서는 돌연 달마가 그를 만났다고 기록되기 시작했다. 무제는 자신의 업적을 자화자찬하며 달마에게 그 공덕을 묻자 “없다[無]”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모멸감을 느낀 무제가 달마를 죽이려 자객까지 보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선종 초조 달마의 사상과 행적을 신성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살생을 금지하고 평생 오신채도 마다한 무제로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한편 부대사는 무제의 도움으로 송산에 쌍림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이곳에 머무르며 그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부대사는 다시 전 재산을 털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노력했다. 그는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청빈하게 살며 ‘금강경’ 등 경전을 해설하고 시를 지었다. 부대사가 지은 ‘심왕명(心王銘)’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569년 4월24일, 그는 임종을 앞두고 제자와 두 아들을 불렀다. 마지막 숨을 가다듬은 그는 “부지런히 육바라밀을 닦고 항상 참회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앉은 채 적멸에 들었다.

부대사가 양무제에게 보낸 편지는 ‘속고승전’과 ‘경덕전등록’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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