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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타관

‘연기법’ 관점 차이로 ‘부처’ 정의 달라져

▲ 그림=김승연 화백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두드러진 차이는 부처를 보는 다른 관점에 있다. 초기불교는 부처를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여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불본행집경’에는 이 세상에는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스물 네 분의 부처님이라고도 한다)이 출현했다. 앞으로도 부처님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부처는 한 시대에 한 분만 출현한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부처가 한 시대에 여러 분 나온다거나 한 지역에 또 나타날 수는 없다. 석가모니부처님 바로 이전의 부처는 연등불이고 이후의 부처는 미륵불이다. 이들 부처님들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다. 부처는 신도, 영적존재도 아닌 사람이다. 사람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징적인 모습과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삼십이길상(三十二吉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 그리고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삼십이길상과 팔십종호는 부처의 육체적 특징을, 십팔불공법은 부처의 정신적 특징을 가리킨다. 부처가 이런 모습과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과거 생에 닦았던 보살도 때문이다. 부처는 삼아승지겁이라는 무수한 세월동안 십바라밀이라는 보살도를 닦았고 그 공덕의 결과로 거룩한 모습과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초기불교 부처는 인격적 존재
삼십이길상 팔십종호로 상징
천부적 상호·능력 겸비 못하면
아라한일 뿐 부처는 되지 못해

초기불교는 부처가 되는 필수조건으로 이런 삼십이길상과 팔십종호, 십팔불공법을 거론한다.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이루었어도 거룩한 상호와 정신능력을 구비하지 못하면 부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탈을 해도 아라한이라고 할뿐 부처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기 어려우며 중생들이 부처를 만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앞으로 나타나게 될 미륵부처님 이전까지는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없고 누구도 부처를 만날 수 없다. 이러한 교리에 따라 초기불교를 따르는 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대승불교에서처럼 쉽사리 성불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부처를 바라보는 시각이 초기불교와 많이 다르다. 대승불교도 초기불교와 같이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부처를 특정한 인격체로만 보지는 않는다. 부처는 어떤 선택받은 사람만이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초기불교와 다른 대승불교의 부처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대승불교는 부처를 삼십이길상과 팔십종호, 십팔불공법을 갖춘 사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아뇩다라삼보리(무상정등정각)를 성취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관상이나 상호에 관계없이 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삼아승지겁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바라밀을 닦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오래 수행하지 않아도 단박에 부처가 될 수 있다. 둘째 대승불교는 중생 모두를 부처로 본다. 깨달은 사람만이 부처라고 한정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중생도 부처다. 중생이라고 할 만 한 실체가 없고, 중생 누구나 마음에는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든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본래 차별이 없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대승, 모든 중생 부처로 여겨
연기 이법인 법신불서 기인
특정 인격 아닌 의미로 인식
‘부처=연기법’으로 동일시 

세 번째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를 깨달은 사람이나 중생의 마음 속 불성(佛性)이나 진여심(眞如心)에서 더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들을 가리켜 부처라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또 세 가지 부처를 말한다. 법신불(法身佛)·보신불(報身佛)·화신불(化身佛)이 그것이다. 법신불은 우주 만법 속에 깃들여져 있는 이법(理法)을 부처로 본 것이고 보신불은 이법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공덕을 부처로 본 것이다. 화신불은 이 공덕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인격화된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 중에서 법신불을 핵심으로 한다. 석가모니불 이전에 법신불이 먼저 존재했으므로 석가모니불 보다는 법신불에 비중을 둔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모든 존재는 연기의 이법에 의지하여 건립한다고 가르쳤다. 어떤 법도 스스로 발생하거나 생길 수 없고 반드시 원인과 조건을 빌려서 발생하고 생길 수 있다는 것이 곧 연기의 이법이다. 법신이란 이러한 연기의 이법을 부처로 삼은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이와 같은 법신불을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초기경전의 법신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은 자주 ‘여래는 법의 몸’이라고 하거나 ‘연기를 보는 자 여래를 본다’고 가르쳤다. 대승불교는 이런 초기불교의 법신사상을 법신불의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일부 초기불교론자들의 주장처럼 법신불은 힌두사상의 브라흐만 개념이 아니다. ‘금강경’ 구경무아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 존자에게 ‘여래란 일체법이 한결같음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우주만법의 한결같은 이치를 부처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승불교는 부처를 특정한 인물에게만 적용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모든 법을 부처의 존재로 본다면 세상에 부처는 한량없이 존재하게 된다. 시기와 장소도 필요치 않다. 부처는 언제 어디서나 만법이 존재하는 한 항상 세상에 머물러 있게 되고 지혜를 얻기만 하면 누구라도 만나게 된다. 이른바 ‘시방삼세 상주일체 불타야중’ (時方三世 常住一切 佛陀耶衆)인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서로 다르게 부처를 보는 이유는 연기법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연기법을 별개로 본다.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에 사람과 이법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를 연기법과 별개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연기법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연기법이다. 왜 연기법이 그대로 부처인지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연기설을 다룰 다음 회에 밝히고자 한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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