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울진 불영사 환생전기 현판

역병으로 죽은 남편 지극한 기도로 되살린 생생한 기록

▲ 한때 ‘환생전’으로도 불렸던 불영사 대웅보전. 지금의 건물은 환생전에 관한 영험담 이후인 18세기에 새로 지었다.

우리나라 사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잘 엮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이 쓰는 사찰 역사는 종종 무미건조하고 맥 빠진 사실의 나열에 그쳐 도중에 책을 그만 덮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1700년 불교사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여간 많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역사 읽기가 마치 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건, ‘정사(正史) 콤플렉스’라고 해도 될 만큼 정사만 고집하고 거기에 근거하는 도식적인 서술 태도를 고집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찰마다 한 두 개씩은 있는 현판이나 비석에는 여간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역사란 낮에는 따스한 햇볕을 받고 밤에는 달빛에 쬐이고 새벽에 내리는 찬 이슬을 머금으며 열리는 열매와 같다. 여러 가지 면을 골고루 보아야 비로소 온전한 역사를 엮을 수 있게 된다. 어느 한쪽만 보려한다면 우리 사찰 역사는 그만큼 고갈되어갈 것이다. ‘밤의 역사’에도 꼭 관심을 쏟아야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밤의 역사에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죽음 아닌가. 세상일에 초연한 은둔자에게도, 평범한 사람에게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법. 겉으론 대범해보여도 죽음이 두렵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가능하면 이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또 반대로 죽음으로부터의 ‘기사회생’은 바라마지 않는 커다란 선물로 여길 것이다.

1396년 현령으로 간 백극재
전염병 걸려 객지에서 사망
부인 이씨 불영사 대웅전서
죽은 남편 위해 지극한 기도
3일 뒤 혼백이 “원한 풀라”
관 뚜껑 여니 남편 살아나
금당, ‘환생전’ 바꾸고 중수

12년 뒤 안동 판관 이문명이
보고 들은 얘기 현판에 기록


울진 불영사(佛影寺)의 ‘환생전기(還生殿記)’는 바로 이런 죽음과 환생을 소재로 한 보기 드문 기담(奇談)으로, 불영사에 있는 현판(懸板)에 적혀 전해 내려온다. 죽음과 환생은 전설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주제겠지만, 사찰을 배경으로 해서 그것도 실재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이 기담을 소개하는 사람 역시 한 시대를 살아간 흔적이 남아 있는 엄연한 실존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 곧 실화(實話)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600년도 더 된 옛날 불영사에는 ‘환생전’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전각이 하나 세워졌다. 글자 그대로, 죽었다가 부처님에게 기도한 끝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기념해 지은 건물이다. 이 이야기는 1408년 경상도 안동의 판관(判官) 벼슬을 했던 이문명(李文命)이 지었다. 이 글은 당시 사람들에게 불교의 신이함을 소개하는 글로서도 화제가 되었다. 얼핏 보면 그 내용이 허황한 듯도 한데 실제 등장인물이나 전하는 내용이 아주 실감나서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명망 높던 문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자신의 문집에 ‘환생전기’를 그대로 실어놓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선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고 넘어가야겠다.

▲ 조선초 울진 현령 백극재가 죽었다가 살아난 얘기가 실려 있는 ‘환생전기 현판’.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현판 중 하나다.

1396년 백극재 선생이 울진 현령으로 임명되어 떠났을 때의 이야기다. 임지로 내려가는 도중 전염병에 걸려 그만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가 3월, 부인 이씨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퍼하며 남편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자 했다. 고을의 관리에게 울진 지방에 기도를 올릴 만한 절이 어디 있는가 알아보니 그 관리가 이렇게 얘기했다.

“서쪽에 적당한 절이 있으니 불영사라 합니다. 전각은 오래되었고 그 안에 모셔진 불상도 영험하지요.”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상여를 불영사 탑 앞에 옮기도록 하고는, 부처님 앞에 분향하고 울면서 축원했다.

“제 지아비가 길을 떠나다 죽었으니 횡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극락왕생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법당에 꿇어앉아 3일 낮밤을 기도드렸다. 그날 부인이 설핏 잠들었는데 머리를 풀어헤친 한 혼백이 나타나, “10생에 맺힌 원한을 풀라”며 외치고 사라졌다. 부인이 깜짝 놀라 남편이 누운 관을 열어보니 죽었던 남편이 이미 환생해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부부는 환생의 기쁨으로 탑 앞에 있는 요사를 환희료, 금당을 환생전이라 부르고 중수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러고 나서 ‘묘법연화경’ 7권을 금물로 사경(寫經)해 부처님의 은혜를 되새겼다.

‘아! 옛날 당나라의 식하(食荷) 스님이 6일 만에 환생한 것도 부처님에 힘입은 것이고, 양 나라의 유씨 여인이 7일 만에 환생한 것도 불력(佛力)에 힘입은 것이며, 두(杜)씨의 아들이 3일 만에 환생한 것도 역시 법력(法力)에 힘입은 것이다. 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감응되는 바가 있기 마련인 것은 고금이 한 가지라 세속이 이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를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영락 6년 무자년 8월에 통훈대부 판관 이문명이 지었다.

(昔光山白先生克齋 除蔚珍縣令 下車三月 橫得癘疾忽然而卒 夫人李氏悶惧 而問曰此境有可禱□精舍否 一吏曰 有寺在西名曰佛影 殿古而像靈也 夫人趣令 轝棺就寺之塔 夫人於佛前 焚香泣祝曰 妾夫之亡命則己矣 若橫天則 伏祈覺天之濟 跪至三日三夜 夫人假寐 有一梵魔魅 披髮而走曰 今以覺天光中 解十歲寃結 更不復崇矣 夫人驚悟開棺視之則 奄然還生 不勝歡喜 卽以塔僚 爲歡喜僚 佛殿爲還生殿 因寫金字蓮經七軸 而佛恩 噫 唐之食荷比丘 六日還生者 蒙佛力也 梁之劉氏女之七日還生者 蒙法力也 杜氏子之三日還生者 蒙天力也 誠□之所感古今一轍 拘據世俗 豈可擬議於其間哉 永樂六年戊子八月 日 通訓大夫 行安府判官 李文命 謹識)

이 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사랑의 커다란 염원이 기적을 일으키는 멜로드라마인데 바탕에 깔린 분위기는 꽤 몽환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런 영화. 사실 이 이야기의 플롯은 평범하달 순 없는 기적을 말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지방의 장관 벼슬에 임명되자 두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향한 부푼 꿈을 안고 함께 임지로 내려갔다.

하지만 남편은 부임하자마자 마침 그 지방에 유행하던 역병으로 인해 갑자기 죽고 만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녀는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통곡도 미룬 채 그의 왕생극락을 먼저 빌고자 했다. 그래서 남편의 시신을 장지(葬地)가 아닌 불영사로 운구(運柩)했다. 남편의 관은 법당의 석탑 앞에 안치한 뒤 자신은 금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서 죽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3일 낮밤으로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숙세의 인연을 풀기를 권한 뒤 사라지고, 잠에서 깬 그녀가 느낀 바가 있어 탑 앞으로 달려가 관을 여니 죽었던 남편이 갑자기 가쁜 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바로 부처님의 가피임을 안 부부는 그 뒤 여러 좋은 인연을 쌓아가면서 해로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여느 지방에서고 흔히 듣는 그런 전설이라면 모르되 불영사라는 고찰이 무대가 되고 있고, 죽은 사람의 부인이 대웅전의 불상에게 간절히 기도해 남편을 저승에서 이승으로 다시 살아나오게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보통 흥미로운 게 아니다.

이 글을 쓴 사람도 지방관직에 있던 공인(公人)이었다. 그가 이 글을 썼을 때는 그저 그렇고 그런 전설이라고 생각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환생 이야기가 일어난 지 불과 12년 만에 쓴 글로 추정되니, ‘전설 따라 삼천리’ 식의 문장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일 가능성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백극재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일까? 만일 그렇다면 언제 활동한 인물일까? ‘환생전기’가 1408년에 지어졌으니 조선 초기이거나 그 이전에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환생전기’에 나오는 것 외에는 달리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를 ‘광산 백 선생’이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본관이 광산, 곧 광주 백씨라는 사실 정도만 알 뿐이다. 다만 ‘울진군지’를 찾아보면 조선이 건국한 지 2년 뒤인 1396년에 ‘백 모(某)’ 현령의 부임 사실이 간략히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백극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활동연대가 12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데다가 성씨도 같기 때문이다.

불영사의 ‘환생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건물 이름이다. 다른 절에서 이런 이름을 썼다면 유생들로부터 황탄한 이야기라고 비난받을 게 빤하다. 하지만 그 유래에 관해 뚜렷한 근거가 있는 불영사 환생전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못 흥미롭게 여겨왔다. 또 ‘환생전기’에 등장하는 법당과 탑의 묘사는 지금 불영사의 대웅전과 그 바로 앞에 있는 삼층석탑의 배치와 동일하여, 더욱 더 사실감을 더해주었다.

사실 ‘환생’ 이야기는 몇 가지 익히 알려진 게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삼국유사’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金大城)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죽은 뒤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환생이다. 하지만 이 불영사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환생은 아니었다. 죽은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게 의학적으로 가능한 지 여부는 말할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풀지 못하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한 둘이 아니니까.

소멸과 탄생은 아마도 종이 한 장 만큼의 차이도 없는 건 아닐까? 아니, 이 둘은 실은 같은 것의 서로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환생전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 사찰에 전하는 갖가지 흥미로운 얘기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