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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단개혁의 배경 - ④ 비구니 차별

비구 중심 승단 독점이 비구니의 개혁 의지 높여

▲ 1994년 종단개혁 당시 비구니들은 범종추를 적극 지지했으며 마스크를 착용하고 직접 물리적 투쟁대열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진은 1994년 3월29일 구종법회에 참가한 비구니 스님들이 조계사 경내에 진입한 경찰들에게 연행당하고 있는 모습.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1994년 7월27일 오후,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속개된 제6차 조계종 개혁회의에서는 뜻하지 않은 설전이 벌어졌다. 비구니 참종권을 두고 비구·비구니 스님들간의 공방이었다. ‘개혁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주된 안건은 총무원장 선출방식을 결정하는 종헌개정이었다.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할 것인지, 간선제를 채택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그러나 논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직선제를 도입하면 강원 학인들과 비구니들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하는데 그럴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된다”는 무착 스님(원로회의 사무처장)의 발언이 신호탄이 됐다. 법혜 스님(동국대 교수)은 한발 더 나아가 오랜 세월 비구니들을 옥죄었던 ‘비구니 팔경계(八敬戒)’를 거론했다. 비구니 팔경계는 ‘100세 비구니일지라도 새로 계를 받은 비구를 보면 마땅히 일어나 맞이하고 예배하라’ 등 비구니가 비구에게 지켜야 할 8가지 계율 조목이다. 비구·비구니 차별적 요소가 농후할 뿐 아니라 부처님 당시 제정된 것인지에 대한 진위논란이 지금까지 분분한 항목이기도 하다.

법혜 스님은 “비구니 교단 출연의 전제조건은 팔경계의 실천약속이었다”며 “비구 총무원장을 뽑는데 왜 비구니를 참석시켜야 하느냐”고 비구니들을 자극했다. 무착 스님이 다시 거들었다. 스님은 “앞으로 총무원장이 되려면 비구니에게 가서 굽실거려야 할 텐데, 비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구니 스님들의 거센 항의와 질타가 쏟아졌다. 일연 스님(동학사 강사)은 “5000명 비구니들을 무시하는 말”이라며 “비구니들을 배제하고 선출된 총무원장은 결국 교단 절반 밖에 동의를 얻지 못한 총무원장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도 “사회가 진보할수록 남녀평등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훗날 불교가 가장 뒤처지는 종교가 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며 “개혁회의 법안이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총무원장을 ‘비구’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승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커지자 개혁회의 부의장 설조 스님이 진화에 나섰다. 스님은 “이 문제는 율학을 전공한 분들과 논의를 거쳐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비구니들의 실망감은 적지 않았다. 비록 개혁 대상이었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벗어났지만 종단에 고착화된 ‘비구 우월주의의 벽’을 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
승단에도 그대로 적용
‘비구니팔경계’ 앞세워
비구니에게 의무 강요

수적 열세였던 비구승
비구니 끌어들여 정화
‘참종권’ 보장 등 약속
종권잡자 ‘모르쇠’ 일관

개혁종단 출범 과정서
비구니 활동 두드러져
종회의원 수 늘렸지만
참종권은 여전히 미흡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비구니는 늘 비구의 종속적인 위치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남존여비’ 사상이 승단에까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틈만 나면 비구들은 ‘여인오장설(女人五障設, 여성은 범천, 제석천, 마왕, 전륜성왕과 더불어 성불할 수 없다는 부파시대 논리)’과 ‘비구니 팔경계’를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고는 했다. 비구니 스스로 승단의 주체로 나서기 어려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비구니들에겐 의무만 강조됐을 뿐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종단 운영의 모든 권한도 늘 비구들의 전유물이었다.

비구·비구니 차별은 일제강점기 이후 더욱 노골화됐다. ‘일제시기 신문으로 살펴본 비구니의 활동과 지위’(임이랑, 한국문화연구 18집)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비구·비구니 차별은 더욱 노골화돼 비구니들은 비구의 보조적 위치에 머물렀다. 비구니를 위한 전문교육기관인 강원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비구들을 찾아가 허락을 얻어야만 비구니는 청강형태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일제로부터 부와 권력을 보장받은 일부 비구들은 비구니를 성적대상으로 삼거나 폭행하기도 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3년 4월 통도사의 한 유명한 비구가 비구니를 임신시킨 뒤 강제로 약을 먹여 낙태시켰고, 1935년 3월 망월사의 한 비구는 비구니를 심하게 구타해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1920년대 비구니들은 독자적으로 강당을 마련해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다양한 복지 사업을 통해 대사회활동도 전개했다.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따르면 금강산 신계사 경화 스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나눠줬고, 부여 무량사 상완 스님은 평소 선행을 많이 해 이웃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안양암 숙경 스님도 쌀 다섯 가마니를 빈민들에게 보시해 화제가 됐으며 팔달암의 한 비구니는 의복 100벌을 불우이웃에게 기부하는 등 비구니 스님들의 선행은 줄을 이었다. 본공 스님은 1937년 오대산 지장암에 최초의 비구니 전문선원을 마련해 비구니 승단의 수행전통을 이어나갔다. 특히 일제강점기 후반 몇몇 뜻있는 비구니들이 교육기관을 건립하면서 비구니들의 의식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종단의 비구니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다. ‘한국불교 조계종단 종법의 성차별성에 관한 여성주의적 연구’(옥복연, 서울대 박사학위논문)에 따르면 해방 이후 교육체계가 갖춰지면서 비구니들은 사찰 재건과 대중포교 등 대사회적 영역에서 활동을 크게 확대해 나갔다. 비구니들의 대사회적 인지도도 더불어 높아졌다.

1950~60년대 정화운동은 비구니들이 직접 종단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가 됐다. 당시 비구들은 비구니를 정화운동에 적극 끌어들였다. 취처승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비구들로서는 비구니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승단정화사’에 따르면 1954년 9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1회 전국비구승 대회에는 비구니 30명(비구 116명)이 참석했다. 비구에 비해 조직력이 열악했던 비구니계를 감안하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비구니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비구들은 참종권으로 화답했다.

비구들은 같은 해 11월 개최된 임시종회에서 8명의 비구니를 종회의원으로 선출했다. 제2회 임시종회에서도 재적의원 50명 가운데 10석을 비구니에게 배정했다. 비구들은 한발 더 나아가 12월 대회 명칭을 ‘전국 비구·비구니대회’로 바꾸고 비구니도 정화의 명확한 주체임을 인정했다.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처음으로 비구와 동등한 위치를 보장 받은 셈이다. 그러자 비구니들은 정화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폭력이 난무하는 속에서 비구니들은 생명을 담보로 조계사에서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런 공로로 1955년 성문 스님은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교구본사인 대구 동화사 주지로 임명됐다. ‘백년 동안 한국불교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김순석, 운주사)에 따르면 당시 비구들은 전국 632개 사찰에 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비구니 종회의원 6분의 1 할당제, 동화사에 전국비구니 총림 개설 등도 약속했다.

그러나 비구들이 취처승을 내몰고 종단운영의 중심에 서자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던져졌다. 비구니 총림을 약속했던 동화사 주지를 불과 1년 만에 비구로 교체했고, 비구니들은 말사인 운문사로 강제 이동시켰다. 종회의원 6분의 1 배정 등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1962년 통합종단 출범과 동시에 종헌을 공포하고 종정을 ‘비구’로 한정하는 등 비구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종단 운영도 비구들의 독차지였다. 2003년 탁연 스님이 총무원 문화부장으로 임명되기까지 비구니가 총무원 부장 소임을 맡는 것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비구니들이 1994년 종단개혁에 적극 나선 배경에는 ‘평등’에 대한 염원이 크게 작용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라는 절대 권력의 척결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승단 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비구 중심의 종단 운영구조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당면 과제였다. 비구니들은 정화 때와 마찬가지로 개혁운동의 일선에 뛰어들었다. 범종추를 적극 지지했으며 마스크를 착용하고 직접 물리적 투쟁대열에 앞장서기도 했다.

개혁이 성공하자 비구니들은 조직체계를 갖췄다. 비구니들의 결집된 조직력으로 종단의 비구·비구니 차별에 대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계획이었다. 1994년 5월9일 비구니 600명이 ‘정혜도량’을 출범시킨 것도 이런 이유였다. 정혜도량은 출범과 동시에 “비구니의 위상 제고에 앞장설 것”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언했다. 공청회와 설문조사를 통해 비구니 의견을 수렴했고, 개혁입법 마련을 위한 개혁회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비구니 스님들의 개혁의지는 또다시 꺾여야 했다. ‘개혁회의록’에 따르면 개혁입법 성안 과정에서 비구들은 계율과 전통을 내세우며 비구니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비록 비구니 종회의원 수를 10석으로 늘리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었지만 비구 중심 종단 운영체제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개혁회의가 마련한 종헌종법은 종정과 총무원장은 고사하고 호계위원, 법규위원 등에 참여하는 것도 철저히 배제됐다.

심지어 비구니회에서 비구니 중앙종회의원을 선출한다는 이유로 중앙종회의원 선거권도 가질 수 없게 됐다. 전국승가대학 학인연합이 “개혁회의가 비구니 참종권을 극도로 제한한 것은 승단을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만든 반개혁적 발상”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로부터 20년. 당시 개혁회의에 의해 성안된 종헌종법은 그동안 수없이 개정됐다. 그럼에도 비구·비구니 차별적 요소를 담은 종법은 여전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비구·비구니의 동등한 지위 보장은 종단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여기는 기득권 비구들의 강한 반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종단개혁은 종단 내부에 존재하는 낡은 구태와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혁신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종단 내 비구니 차별은 종단개혁에 대한 오점이자 시대를 거스르는 역주행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3호 / 2014년 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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