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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읍 내장사 용굴

승려들이 왜군으로부터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보관터

▲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던 희묵 스님이 머물렀던 정읍 내장사.

우리나라 역사에는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아이템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역사의 한 중요한 흐름이나 사건인데, 이에 대해 학자 또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온전히 정리되지 못한 항목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흥선대원군이 시행했던 쇄국정책이나, 그 반대로 발달된 서양문명을 도입해야 한다는 갑신정변이 그렇다. 두 사건 모두 성공 못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과연 무엇이 옳은 일이었던가? 근현대로 더 내려오면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역사적 정리가 안 된 이런 애매모호한 아이템들이 훨씬 많다.

불교사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호국불교’란 단어가 이러한 가치개념 혼동의 한 아이템이다. 교과서에도 설명돼 있듯 대부분 사람들은 호국불교를 우리나라 불교가 자랑할 만한 특출한 면모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승려의 몸으로 무기를 잡고 살생을 했다면 그것을 과연 올바른 가치로 봐야하는지 진지하게 되묻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생명, 그것도 사람을 해치는 것이 부처님의 법에 온당한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지금 내리지 못한다. 그보다는 스님들이 전장에 나설 때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혼란스러웠을 지에 대해 생각한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어보자.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격려했을 때, 많은 승려들이 동참해 관군과 연합하거나 혹은 자체 조직한 승군(僧軍)으로 왜군과 싸우면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렇지만 전쟁에 참여한 스님들의 마음가짐이 결코 군인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살생유택’이라는 원광법사의 호국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살생의 길에 나서지 않은 스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전장에 나섰던 스님들 중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굳이 기록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다. 우리는 과연 그런 스님들을 탓할 수 있는가?

서울 춘추관 등 史庫 불타고
전주 실록도 멸실 위기 봉착
내장사 승장 희묵 스님 등이
실록·왕 초상화 용굴로 옮겨

용굴서 비래암 옮긴 뒤에도
승려 4~5명 밤낮으로 지켜
正史에서는 승려 활약 배제
조익 등 문인 기록서 확인

여하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가장 신망이 높던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이 궐기해 전장에 나서자고 격문을 돌렷다. 그 이후 사명대사·처영(處英) 스님 등 숱한 승군이 무공을 올려 역사의 기록에 남은 예가 적지 않다. 반면에 단순히 구전이나 전설로만 그 이름과 활약상이 전하는 승군들도 꽤 많다. 나는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승군으로서 이름을 날린다는 게 분명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스님들의 마음가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구전이든 전설이든 역사는 역사다. 비록 정사(正史)라고 부르는 문헌에 나오지는 않아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장수 스님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전설 속의 승장 중에는 기록을 자세히 찾아보면 그 뛰어난 행적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번에 얘기하는 내장사(內藏寺)의 승장 희묵(希黙) 스님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우선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부터 짚어보자. 역대 왕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다른 세 곳의 사고(史庫)와 함께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에 소장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고, 그 일부는 전주 방향으로 치고 올라왔다. 바로 조선왕조의 정신적 본산이랄 수 있는 전주를 장악하고 경기전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경기전에는 앞서 말한 ‘조선왕조실록’과 역대 어진(御眞, 임금들의 초상화)들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이를 탈취함으로써 조선의 저항정신을 떨어뜨리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실록은 이미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해서 충주·성주의 사고에 있던 것이 모두 왜적의 침입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경기전에 있는 실록만 남았다. 이런 위급의 순간에 관군이 아닌 민간에 의해 재빨리 실록과 어진들이 내장산 깊은 곳에 자리한 ‘용굴(龍窟)’로 이안됨으로써 적의 수중에 떨어질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바로 내장사 스님들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이 큰 일의 주역으로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정읍의 유생 손홍록(孫弘祿)·안의(安義) 등 뿐이다. 하지만 이들과 더불어 이 일을 수행한 내장사 주지 희묵 스님과 그가 이끌었던 승군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합리적 사고(思考)로 본다면 학문만 하던 유생들보다는 평소 여러 가지 부과된 잡역으로 인해 힘든 일이 몸에 배어 있고, 무장까지 했던 승군이 실록과 어진 수호를 위한 작전에 훨씬 큰 공을 세웠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건만 희묵 스님과 승군의 활약은 정사에는 빠져있고 전설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승군들이 내장사에 이안된 실록과 어진을 정읍의 유생들과 더불어 수호했던 과정, 그리고 정읍 지역 1000여 명의 승군을 이끈 승장(僧將)으로서의 ‘희묵’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조익(趙翊, 1556∼1613)의 ‘가휴선생문집’이다. 조익은 1582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8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병조좌랑·광주목사(光州牧使) 등 벼슬을 지냈던 문인이었다. 그가 당시 희묵 스님과 승군들의 활약상을 다음처럼 묘사한 것은 상당한 사실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1592년) 가을에 들어서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1540~1594)과 함께 의병들을 모았다. 9월에 군량미를 얻기 위해 호남 땅으로 갔다.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인 자수(子受) 신경희(申景禧, ?~1615)가 고산(高山, 지금의 완주군 일대)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난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만났다. 얼마나 슬프고 또 한편으론 기뻤는지 모른다. 희묵이라는 스님도 (승군) 수백 명을 모아 장차 (임금님이 있는) 서쪽으로 떠나려 해 자수와 더불어 일을 함께 도모하기로 했다. (고산)현 경계도 왜병의 침탈을 받았지만 다행히 읍은 무사했다. 길을 떠나려 하는 차에 희묵 스님이 내게 시를 요청하므로 일필휘지로 한 수 써주었다.”

(秋初 與金沙潭 同聚義旅 九月 因募糧往湖界 申同年子受 景禧 宰高山 亂後始相遇 不覺悲喜 有僧煕默 亦聚徒數百 將西赴 子受與之同事 縣境亦被兵 而邑居幸免 臨行 默也求詩 走草以塞其願 汀樹經霜葉盡飛 天涯病客怯寒威 一年西塞無消息 何處鑾輿賦式微 我愛雲山釋 提師赴日邊 天時吁瘼矣 世事卻茫然 鼔角連平楚 旌旗動遠川 懸知奏凱處 勳業上凌煙)

이밖에 호남의 실학자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학자로 꼽혔고, 독서와 저술로 평생을 보내며 존경받던 고창 출신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유고(頤齋遺稿)’에는 실록과 어진을 수호하던 희묵 스님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나타나 있다.

“먼저 실록을 옮겼다. 보자기에 싸고 주머니에 넣은 다음 나무 상자에 넣어 가지고 갔다. 7월 9일 다시 어진을 옮겼다.… 실록은 먼저 용굴에 이안하고 이어서 어진을 옮겨 모두 다 이곳에 이안했다. 실록을 은적암에 옮겼다가, 다시 더욱 험하고 떨어진 곳을 찾아 비래암으로 옮겼다. 9월에 어진을 용굴로부터 다시 실록과 함께 (비래암으로) 이안했다. (김)홍무·(안)의·(손)홍록 등 3인과 희묵 스님 등 4∼5명이 근방의 정재인(呈才人, 中人 이하의 계급) 100여 명과 함께 낮이나 밤이나 종일토록 암대(庵臺)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

(先移實錄 將袱袋樻各去之 七月九日 又移御容…實錄首安龍窟 而御容以次偕安 實錄尋移隱寂 再相尤險絶處 移飛來庵 九月 自龍窟移御容 復偕實錄安焉 弘武義弘祿等三人 僧煕默等四五名 近邑呈才人百餘名則 日夜衛庵臺不離)

앞에서 소개한 조익과 황윤석의 이 간단명료하면서도 정직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희묵 스님의 실재는 그저 전설 정도로 가려질 뻔했다. 하지만 희묵 스님은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승군의 지도자로서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또한 실록이 왜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일을 막고자 재빨리 경기전에서 내장산으로 옮기고 내장사의 수도처였던 용굴에 이안함으로써 이를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사실이 이로써 명확해졌다. 실록은 용굴에서 약 2년 동안 잘 보위되었고, 이후 오대산 사고로 옮겨 오늘날에 전한다. 만일 희묵 스님 등의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가 세계에 자랑스러워하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희묵 스님의 행적은 역사에서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건만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음은 깊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희묵 스님 등의 활약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스님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다. 사진은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숨겨두었던 내장사 용굴.

이 용굴은 내장산 중턱에 있으며 이름 그대로 굴(窟) 모습을 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보다는 좁아지지만 실록이나 어진 등을 보관할 정도의 공간은 충분하며, 실제로 내장사 수행처로 존재해왔던 흔적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불교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조직된 승군들이 외적 퇴치의 전장에 나서야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승려의 몸으로 살생에 나서야 했던 그들의 정체성(正體性) 고민, 정신적 고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활약은 정사에 옳게 기록된 경우가 드물다. 승려의 몸으로 살생의 현장에 나서야만 하는 곤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전장에 나서 산화했던 그들을 위해서라도 승군들의 행적은 제대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그런 존재감을 내장사의 용굴에서 되새겨볼 수 있을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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