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열반관

‘개인의 성취’서 모든 존재로 개념 확대

▲ 그림=김승연 화백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는 소승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대승경전에서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직접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소승이라고 지칭되는 대상이 초기경전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심밀경’에서 해심심의 보살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처음 법의 바퀴를 굴리셨던 설법의 내용은 후에 논쟁의 여지를 남겨 두셨습니다”라고 한 내용이나 ‘법화경’에서 5000명의 아라한이 퇴장했던 사건은 초기불교가 소승이며 미완성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를 논할 때 중생들의 교화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소승은 자신만의 해탈을 위한 가르침이고 대승은 모든 중생들의 해탈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단순히 중생 교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는 내용 전반에 걸쳐 소승불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가르침을 전한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와 달리 부처님이 성취하신 경지나 법을 온갖 존재들에게 확대시키고 있다. 불교의 진리를 한 개인의 체험과 완성에 두지 않고 존재하는 일체의 법들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소승이라는 용어는 범어 히나야나(Hina-yana)를 번역한 말이다. 히나(Hina)라는 용어는 ‘작다’라는 뜻인데 ‘작다’라는 의미보다는 ‘열등하다’ ‘저열하다’는 의미가 더 크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초기불교는 낮은 차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초기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이런 시각은 부처님이 실현하신 열반에 대한 입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초기경전 열반은 탐진치 소멸
개인 수행으로 이뤄야할 상태

대승서는 부처님의 성취 경지
존재하는 일체의 법들로 확장
열반은 항상 구현돼 있다 여겨

제법 연기성 부동의 원리 삼아
본래부터 열반이라는 근거 제시

열반은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표다. 중생은 열반의 실현을 통해 생사의 고리를 끊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해탈한다. 열반이란 무명과 갈애와 집착 등 모든 번뇌가 꺼져 일체의 고통이 소멸된 경지를 뜻한다. 그런데 열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전혀 다르다.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불, 진애의 불, 우치의 불이 꺼진 것이라 설명한다. 수행을 통해 이런 불들을 끄고 나면 비로소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열반의 실현이 한 개인의 몸과 마음 안에서만 구현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열반은 수행을 완성한 당사자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당사자의 범주를 초월하여 온 우주 일체의 모든 존재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반은 개인의 번뇌가 있고 없음에 따라 실현되거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가 본래 열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열반이다. 그래서 열반은 모든 존재가 지닌 본래의 모습이며 번뇌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항상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불자들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시제법공상불생불멸(是諸法空相不生不滅)의 말씀과 의상조사 ‘법성게’의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라는 말씀은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열반임을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에서는 한 개인의 탐진치가 소멸되어 자신만을 열반의 구현자로 보고 세상의 본래 모습이 열반임을 알지 못하는 초기불교의 열반을 소승의 열반이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의 열반관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앞서 불타관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 안에서 발생하고 성립된다고 가르친다. 연기는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법칙으로 어떤 법이 일어나고 생길 때에는 반드시 그 법이 일어나고 생기게 하는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가령 박수소리가 있다면 그 박수소리는 스스로 발생 할 수는 없고 반드시 양손바닥과 마주치는 작용과 소리를 전달하는 공기로써의 조건(緣)들이 갖추어져야 박수소리가 일어날 수(起)있다. 만법은 이런 법칙의 지배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은 연기에 따라 조합된 것일 뿐 본래의 실체가 있거나 자기성품이 있지 않다. 그래서 연기된 모든 법은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박수소리가 박수소리 자체에서 발생 한 것이 아니라 손바닥과 마주침 등의 다른 법들에 의존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박수소리는 무아이고 무자성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의 성품도 이와 같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연기는 곧 무기(無起)라고도 가르친다. 조건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든 법의 나고 죽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오고 가고 하는 등의 온갖 움직임은 실제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움직이려면 움직이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대승에서는 연기된 모든 법에는 움직이는 주체로써의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밥 먹는 사람이 없다면 밥 먹는 행위가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제법은 무자성이며 무아이므로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오거나 가거나 하는 등의 온갖 움직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오거나 가거나 하는 등의 움직임이 없다면 모든 법은 그대로 고요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인 것이다. 대승불교의 측면에서 이를 다시 설명하면 박수소리는 박수소리가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박수소리는 실로 일어난 적이 없으며 시끄러운 적도 없다. 박수소리 그대로가 불생이며 부동이고 본래적인 것이다. 이 같은 대승의 교리를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일어남이 아니며 시끄럽고 번잡한 이 세상의 모습이 본래는 고요하다는 것을 범부들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은 바로 이와 같은 제법의 연기성을 움직임 없는 부동의 원리로 삼고 그 원리를 다시 열반으로 환원시켜 제법이 본래부터 열반이라는 근거를 제시한다. 대승에서의 열반은 단순히 초기불교처럼 수행자 개인에게 발생하는 번뇌의 멸진을 열반으로 삼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는 온 우주가 그대로 열반이며 온갖 존재가 낱낱이 본래부터 열반을 실현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연기된 모든 법은 곧 부처의 몸이며 열반이다. 낱낱의 존재와 부처와 열반은 동체를 이룬다. 연기를 보면 부처를 보고 부처를 보면 열반을 실현한다는 대승불교의 교리는 그래서 초기불교와는 전혀 다른 열반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