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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평 현등사 보광전 수월관음도

고려불화 전형적 양식 벗어난 조선불화 새 아이콘

▲ 가평 현등사 경내 모습

문화재를 감상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역사는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해야 하는 학문이지만 문화재는 예술품이니 마음과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문화재는 한편으론 역사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화재를 감상의 대상에서 더 나아가 역사의 한 자료로 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시대성·희소성·역사성 등 세 가지를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이 외에 ‘예술성’도 함께 놓으면 금상첨화인데, 다만 예술성 자체가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객관화시키기 어렵고 흔히 주관적 관점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앞서의 세 요소를 말한 다음에 부가적으로 예술성을 설명하는 게 안전하다.

‘시대성’은 작품이 만들어졌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얼마만큼 잘 담고 있느냐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시대정신은 곧 당시의 역사로 치환할 수 있으니, 문화재가 역사의 자료로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대성을 오해해서 ‘오래될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는 연구자들을 종종 본다. 그래서 같은 불상이라도 조선시대 작품보다는 삼국시대 작품을 더 가치 있게 보려는 관점이 만연되어 있는 것 같다. 오래될수록 더 좋은 것이라는 ‘호고주의(好古主義)’는 역사연구가 아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시대순위로 매기려는 이런 저열한 생각은 미술사를 오염시킨다.

다음에 ‘희소성’이란 말 그대로 어느 시대의 작품이든 간에 그와 비슷한 작품을 잘 보기 어려울 때 점수를 더 주는 방법이다. 오래된 작품이라도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가치는 낮아지기 마련이다. 경제에서 말하는 희소성의 법칙이 미술품 판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역사성’은 그 문화재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보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술품을 곧 하나의 역사적 퍼즐 조각으로 여겨서 드문드문 비어 있는 역사 지도를 보완해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작품을 찾기란 아주 어렵다.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된 국가문화재 중에서도 세 가지가 다 담겨 있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번에 소개하는 현등사 ‘수월관음도’는 이런 요소들을 두루두루 갖춘 보기 드문 작품이다.

1800년 왕대비 조씨 등 조성
헌종 극락왕생 발원이 목적
화기 중요인물 등장 이례적
희소성·역사성 등 갖춘 수작

태극무늬 그려진 정병 독창적
‘관심수’ 글자도 유일한 사례
시대적 염원 불화 통해 표현

▲ 가평 현등사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 새롭게 재해석한 뛰어난 작품이다. 사진=박해진

수월관음도란 관음보살을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그림의 한 종류다. 관음보살의 역할과 존재감은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불교 전래 이래로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불교미술로 꼽힌다. 중국의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라는 책은 7세기에 쓰인 관음보살과 관련된 영험담이고,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에도 관음보살과 관련된 설화가 20편 넘게 등장한다. 요컨대 관음신앙은 위로 왕에서부터 아래로 필부필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믿고 따를 정도로 매우 보편화된 신앙인 것이다.

관음보살은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설법을 듣고자 하는 이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현신해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관음보살의 매력인 것 같다. 한 가지 모습에 고정되지 않고 상대에 따라 적합한 모습으로 변해 등장한다는 것은 곧 요즘 말하는 ‘맞춤교육’과 다름없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관음보살 중에서 ‘수월(水月)관음도’의 특징은 물 위에 비친 달을 바라보듯이 높은 바위산에 앉아 반가부좌를 하고 있고 그 옆의 기암(奇巖) 위에 정병(精甁)이 놓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면 이제 앞에서 말한 시대성·희소성·역사성 등의 감상 포인트를 적용해서 현등사 수월관음도를 분석해보자. 먼저 ‘시대성’인데, 사실 조선시대에서는 관음도 자체가 썩 많은 편은 아니다. 주로 고려시대에 그려졌고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중반에 수월관음도가 그려진 예는 이 외엔 거의 없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수월관음도의 시대적 하한(下限)에 해당하는 작품인 것이다. 미술에서 하나의 양식이 꼭 어떤 특정 시대에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패션에 유행이 있듯이, 한 양식은 어떤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도 한참 후에 문득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현상이 보이는 까닭은 그 시대가 옛날의 시대정신을 갈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을 이 작품에 대입해서 말하면, 불교가 들어온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초들이 갈망해 마지않던 관음보살 등장의 간절한 바람이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중반에 다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숭유억불의 사조가 서서히 밀려가던 시대 탓일까. 거의 500년 만에 수월관음도가 재등장하는 것을 보는 건 역사연구의 즐거움이다.

다음으로 ‘희소성’인데, 이 수월관음도의 희소성은 작품의 양식에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보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화면을 보면 한 가운데에 원형 공간을 배치한 다음 이 안에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림의 주인공을 잘 드러나게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전형적 수법이다.

관음보살은 기암괴석에 앉아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 무릎을 눕힌 자세를 하고 있는데 이를 유희좌(遊戱坐)라고 부른다. 가장 편한 자세에서 세상사를 관조하는 모습이라는 뜻일 것이다. 관음보살 아래에 보이는 출렁이는 바닷물은 이곳이 관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락가산을 상징한다. ‘화엄경’에 “바다 위에 산이 있어 많은 성현들이 있는데 많은 보물로 이루어져 지극히 청정하며, 꽃과 과실수가 가득하고 샘이 못에 흘러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海上有山多聖賢 衆寶所成極淸淨 華果樹林皆遍滿 泉流池沼悉具足)”라고 나와 있어 보타락가산이 바다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 속 관음보살의 모습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은 길고 작은 코에 작게 오므린 입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효과적으로 담아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이 그림의 구도가 보편적인 수월관음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희소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관음보살 왼쪽 불쑥 솟아난 바위 위에 놓인 정병에 있다. 정병이란 목이 긴 물병을 가리킨다. 정병은 수월관음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주둥이 아래에 기다란 목이 있고, 그 아래의 몸통은 오이[瓜]처럼 주름이 있거나 배가 부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청자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유일’하게 현등사 수월관음도 속의 정병만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목이 기다란 것은 다른 그림과 같지만 거기에 위에서 아래로 ‘관심수(觀心水)’라는 글자가 있는 정병은 이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관심수’란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물이라는 뜻인데, 경전에 나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관음보살이 늘 인간들의 마음을 보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인 것 같다. 이것보다 더 특이한 것은 정병의 몸통에 팔괘(八卦)를 둥글게 표현하고 그 안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는 점이다. 이런 정병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아이콘이다. 이런 형태가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과연 이런 모습의 정병을 다른 그림에서 본 적이 있는가?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패턴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새로운 아이콘을 창조해낸 화가의 솜씨가 여간 아니다. 역으로 보면 이 시대가 그 만큼 불교의 가르침을 간절히 원했기에 이런 새로운 아이콘이 나타난 것인지 모른다.

끝으로 이 수월관음도의 ‘역사성’은 복장(服藏)을 넣는 통인 후령통(候鈴筒) 안에 넣어졌던 원문(願文)겸 화기(畵記)에 잘 나오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을 옮겨본다.

‘至誠奉祝 朝鮮國王大妃殿下 戊辰生趙氏 謹遣臣尙宮辛丑生玄氏尙宮庚戌生柳氏等 敬請良工新畵成…觀音一部…憲宗…仁哲孝大王丁亥生完山李氏仙駕 上生兜率頓 證法王大妃殿下辛卯生洪氏 玉體安康 聖壽萬歲 永無疾患 無憂快樂 德嬪邸下壬辰生金氏貴體 安康福壽增長’

이 글은 1850년 4월에 왕대비 조(趙)씨가 헌종(憲宗, 1827∼1849)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상궁 몇 명을 현등사에 보내어 수월관음도를 그리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종의 왕후 홍씨, 후궁 경빈 김씨의 이름도 나온다. 이토록 자세하게 조성과정과 목적 그리고 헌종·조대비 등 대부분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나오는 화기는 아주 드물다. 바로 ‘역사성’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각별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 그림을 발원한 신정왕후, 일명 조 대비다. 그녀는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1819년 순조의 아들과 결혼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남편이 일찍 타계하고-그는 훗날 익종(翼宗, 1809∼1830)으로 추존되었다-1834년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철종 임금 때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헌종과 철종 그리고 고종 즉위 초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등 정치의 최고 권력으로 있었던 여장부였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할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훗날의 고종(高宗)-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수렴청정을 끝내면서 그 권력을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어 그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녀야말로 조선시대 후반 권력 풍향도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상황을 현등사 수월관음도의 원문에서 읽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그림 한 장이 우리 역사의 몇 줄을 채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36호 / 2014년 3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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