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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해사와 직지사 진영

섬광 같은 안목과 삶의 진실 담긴 고승 진영 비밀

▲ 고승 진영은 사대부들의 초상화와 달리 짤막한 글과 주변 기물에 담긴 의미가 자못 크다. 은해사 영파 스님의 진영(왼쪽)과 직지사 성월 스님의 진영(오른쪽)은 이러한 진영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근래 초상화가 우리 문화가 지닌 또 하나의 가치로 조명을 받고 있다.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에는 목 이하를 과감히 생략하고 얼굴만 그려 주인공의 내면을 강조한 파격이 높게 평가받는다. 또 사방으로 뻗치다시피 한 수염과 상대방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히 내뿜는 눈빛도 돋보인다. 이조판서 이덕수(1673~1744)의 초상화에는 천연두 때문에 생긴 얽은 자국이 뚜렷하고, 한성부 판윤을 지낸 홍진(1541~1618)은 혹이 달린 것처럼 커다랗게 부어오른 코를 사실 그대로 표현해낼 만큼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들이다.

스님의 초상화를 사대부들의 그것과 비교해서 진영(眞影)이라고 한다. 회화적 기교는 둘째 치더라도, 그림 속 주인공의 인생을 짧게 축약한 찬문(讚文)이라든가 그림 곳곳에 나타나는 상징성은 일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요소들이라 진영의 가치가 작지 않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진영을 논한 글에는 진영의 회화적 요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이런 면들이 잘 드러나지 못했다. 감상 방법이 온전치 못해 진영의 가치가 덜 부각된 것이다. 진영이란 물론 그림이므로 회화라는 커다란 틀에 속한다. 그렇다고 진영을 회화적 관점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그림만 볼 뿐 그 안에 담겨진 소중한 상징과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회화적 요소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진영은 고승 묘사한 그림
회화적 요소에만 주목하면
상징과 의미 놓치기 십상

인생 짧게 축약한 찬문도
주인공 이해 위한 키워드

영파 스님 진영, 찬문의 백미
성월 스님 진영 상징성 강해

그렇다면 진영만의 고유한 감상법이 있는 것일까? 그런 게 있다면 과연 진영을 어떻게 보아야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진영을 보는 데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명(題名)·찬문 그리고 진영 속 그림이 표현하는 상징 등이 그것이다. 제명이란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을 적은 것인데 주인공의 직함까지 함께 적은 경우가 많아 한 마디로 제목이라고 보면 된다. 찬문은 주인공의 일대기를 간결하면서도 핵심 있는 말로 쓴 것이다. 그리고 그림이 표현하는 상징이란, 언뜻 보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그림 속 자세나 주변 기물의 배치에 실은 갖가지 상징이 담겨 있음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관점을 진영에 적용해서 살펴보겠다. 먼저 제명인데, 주로 왼쪽 혹은 오른쪽 위에 구획을 그리고 그 안에 주인공의 법호 및 법명을 적어 넣은 것이다. 이름 외에 별도의 칭호가 있을 경우 이름 앞에 붙여 쓴다. 찬문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림의 제목이나 다름없는 제명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제명을 보고서 이 그림이 누구의 초상화인지를 아는 것이니 명패와도 같다.
진영이 고승에 대한 경건한 회고라면 찬문은 헌사(獻辭)라 할 만하다. 찬문은 주인공이 직접 쓰기도 하지만 주로 생전의 도반이나 알고 지내던 문인 그리고 그의 전법(傳法) 제자들이 쓴다. 찬문의 이 같은 특징은 가까이서 보았던 주인공에 대한 인상과 행적뿐만 아니라 사상과 업적도 포함되기에 인물사(人物史)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어떤 스님에 대한 공식적 기록이 전무하더라도 진영이 전하고 또 그 안에 찬문이 있다면 이를 통해 그 스님의 일생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찬문은 대체로 짧은 글이다. 글을 써넣을 공간이 너무 작은 탓인데, 반대로 보면 그로 인해 최대한 절제된 언어로 주인공의 면모를 드러내려는 섬광과 같은 또렷함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찬문은 거의 다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나는 이 찬문이야말로 문학의 또 다른 장르로 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또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쓰는 자찬(自讚)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를 적은 일종의 자기회상인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요 연민이 가득한 독백, 나아가 굴곡진 인생의 대한 유쾌한 독설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이러니와 반어법도 등장한다. 이런 문학적 수사(修辭)가 얼마만큼 잘 녹아있는가 하는 것으로 찬문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그 예를 영천 은해사에 전하는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의 진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내외 경서를 두루 읽었고, 글씨도 잘 써서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문하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적 소양이 높았다. 이후 영남을 대표하는 화엄학자가 되었는데, 그의 진영이 여러 점이 전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그 중 김천 직지사에 전하는 진영의 찬문은 자신이 직접 써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불교적 인식이 드러나는 글로 장식했다.

“네가 참인가, 아니면 내가 참인가? 본래의 면목으로 본다면야 둘 다 참은 아니겠지. 오라! 가을 시내가 하늘까지 닿듯이 땅과 하늘이 둘이 아닐진대 걸림 없이 트여있으니 모습도 없는 것, 하물며 색과 형상은 무슨 까닭에 찾는다는 말인가?”

(自題曰 爾是眞耶 我是眞耶 若據 本來人面目 則二皆非眞 咄  秋水連天 乾坤若無 廓落無影 色相何求 癸未三月日 六世孫 雪海珉淨 謹敬于焚香改造)

나는 여기에서 꽤 심오한 불교 철학을 느낀다. 뼈와살을 갖춘 지금의 내가 참인가, 아니면 그림 속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는 네가 참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말놀음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세상 만물의 허허함을 바로 진영에서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찬문은 이렇게 매우 중요한 자료라서 진영과 함께 논해야 하는 것임에도 지금까지는 진영 자체만 연구했지 찬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아주 미약했다. 찬문을 읽고 볼 때 그 진영의 가치가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찬문의 내용을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꼭 필요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진영의 주인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섬세한 상징성들을 보겠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진영 가운데 성월(城月) 스님의 것이 있다. 그런데 성월 스님에 대해 알려진 자료는 이외에 전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오로지 이 그림을 통해서만 그가 어떤 스님이었는지, 문경 김룡사에 있어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등을 추론해 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먼저 제명을 보자. ‘총지제방대법사성월당진영(摠持諸方大法師城月堂眞影)’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만 가지고는 이 그림의 주인공 이름이 성월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그림으로써 그를 이해해야 한다.

주인공의 주변을 보면 오른쪽에 놓인 작은 서안(書案)에 책을 넣는 상자가 보이고, 등 뒤 좌우에 겹쳐서 쌓아놓은 책들이 보인다. 특히 오른쪽 책 더미 위에 펼쳐놓은 경전 위로 안경이 놓여 있고, 왼쪽 책 더미 위에는 필통이 있고 그 안에 여러 자루의 붓과 봉투, 그리고 두루마리가 꽂혀 있다. 가장 뒤에는 10폭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병풍 양 끝으로 3폭씩 접혀져 있는 것은 화면의 시선집중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열인 것 같은데, 이런 표현 역시 다른 진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기법이다.

자, 우리는 이상과 같은 물건들에서 주인공과 관련된 어떤 것을 읽어낼 수 있을까? 얼핏 보면 단순한 장식물 이상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각각의 사물들이 상징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고, 이것으로써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데 참고로 삼을 수 있다. 우선 양쪽 책 더미부터 보자. 오른쪽에 있는 책 더미 위에 펼쳐진 경전과 안경은 조금 전까지 그가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펼쳐진 면에는 글자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오른쪽 페이지에 ‘諸聲聞衆亦復無數 無有魔事 雖有魔及魔民 皆護佛法 爾時世尊欲重(宣)此義 而說偈言告諸比丘 我以佛眼 見是迦葉 於未來世 過無數劫 當得作佛’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 이 책은 ‘법화경’의 ‘수기품(授記品)’ 제6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문장 가운데 본래는 ‘爾時世尊欲重(宣)此義’여야 할 것이 진영에 그려진 책에서는 중간에 ‘宣’자가 빠져있다. 하지만 이것은 화가의 사소한 실수일 따름이니 우리는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다. 이 펼쳐진 경전과 안경은 몇 겹으로 쌓여진 책 더미와 더불어 성월 스님이 평소 경전을 즐겨 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서 ‘법화경’ 가운데서도 ‘수기품’을 읽고 있었다는 것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

수기란 부처님이 보살 등에게 다음 세상에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내세에 대한 축복인 셈인데, 이것과 이 그림의 주인공인 성월 스님과 연결시켜 본다면 이는 곧 성월 스님의 이 세상에서의 공덕이 그만큼 컸다는 상징일 수도 있다. 또 안경도 그냥 보고 넘길 일이 아니다. 안경이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세기 후반에는 고관대작의 신분으로 안경을 썼다는 묘사가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대체로 그 무렵에는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민이나 품계가 낮은 관리들은 시력과 상관없이 안경을 쓰는 것이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성월 스님의 진영에 안경이 등장하는 것은 곧 그가 꽤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간에서 떠나 있는 승려가 세속적인 지위를 얻고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불교교단 내에서의 승직(僧職)은 있었으므로 그런 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영 속에 그려진 여러 기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진영 주인공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와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진영이야말로 훌륭한 역사자료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38호 / 2014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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